복원할 수 없는 시간
색이 바랜 벽화를 긁어내듯, 마음의 얼룩도 시간이 지나면 흔적 없이 지워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박물관의 소장품처럼 내 그리움 위에도 제작 연도와 보존 기한이 명확히 라벨링되어 있었다면, 그날 서먹한 소음 속에서 너를 마주치고도 이토록 무력하게 바래지지는 않았을지 모른다.
그날, 무채색의 인파 속에서 익숙한 윤곽을 발견한 순간, 내 안의 잔잔했던 호수가 거칠게 요동쳤다. 찰나의 순간 머릿속을 스친 것은 해묵은 원망도, 서글픔도 아니었다. 어떤 인위적인 조명으로도 재현할 수 없는, 우리 생의 가장 찬란하게 빛나던 시절의 채도(彩度)였다.
너는 여전히 내가 사랑했던 그 결의 미소를 짓고 있었고, 내 기억 속에 박제된 특유의 호흡으로 걷고 있었다. 멀어지는 너의 실루엣을 망연히 바라보며 나는 비로소 깨달았다. 내 그리움은 시간의 풍화 속에서 소멸하는 유기물이 아니었다는 것을. 어쩌면 처음부터 빛과 공기가 차단된 진공의 수장고 속에 고스란히 박제되어 있던, 박물관의 유물 같은 기억이었음을 말이다.
찰나의 조우가 지나간 자리, 내 안의 깊은 침묵 속에 묻어두었던 열망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다시 너라는 세계를 유영하고 싶다고, 다시 네 목소리를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감각하고 싶다고.
하지만 이내 이성이 감정을 가로막는다. 우리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궤도를 지나쳐 왔음을 안다. 심하게 훼손된 캔버스 위에 아무리 정교한 안료를 덧칠해 보아도, 결국 오래된 균열 사이로 과거의 상처가 다시 배어 나올 것임을 잘 안다. 만약 우리가 다시 시작한다 해도, 결국은 똑같은 오류를 범하며 서로를 할퀴고 파수(破守)할 터였다. 이제는 그 필연적인 결말을 너무 잘 알아버렸다. 결코 우리를 이전의 완벽한 상태로 복원할 수 없다는 그 잔인한 자각이, 가슴 깊은 곳에서 숨을 막히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