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멋지게 만드는 건 따로 있었다

말로 존경을 요구하는 사람과 행동으로 존경을 얻는 사람

by비타민W
이런 상황에서 내가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합니다.
어른의 사과였다.

스무 살. 성인이라고 부르는 나이였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아직 아이였다. 온라인 게임생활을 꽤나 했다고 생각했던 서른 살의 나를 돌이켜봐도, 과연 그때 나는 어른이었을까 싶다.


오랜 시간 온라인 게임생활을 하며 많은 사람을 만났다. 나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도, 직급이 높은 사람도 많았다. 하지만 내가 진심으로 “저 사람은 어른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열 손가락을 다 채우지 못한다.


많은 사람들이 존경을 말로 얻으려 했다. 자신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얼마나 많은 경험을 했는지 이야기하면서.

“나 때는 말이야.”

하지만 내가 진심으로 존경했던 사람들은 달랐다. 그들은 말로 존경을 요구하지 않았다.


행동으로 존경을 이끌어냈다.




반항아를 잠재운 리더

내가 대리였을 때였다. 퇴직하신 팀장님을 대신해 새로운 팀장님이 오셨다. 그분은 국내 대기업에서 오랫동안 근무하셨지만, 안타깝게도 큰 교통사고를 겪은 후 그 후유증으로 회사를 그만두고 긴 공백기를 보내셨던 분이었다. 다시 슬롯로 돌아오기로 결정하고, 우리 팀의 팀장이라는 자리를 선택하셨다.


팀장님은 손꼽히는 기업에서 오랫동안 일했던 사람답게 업무에서 빛이 났다. 풍부한 경험과 열정 덕분에 당시 리더의 부재로 수렁에 빠져 있던 우리 팀은 다시 수면 위로 올라올 수 있었다. 그분이 오고 나서 우리 팀은 경영진의 큰 관심과 지지를 받기 시작했다. 그의 능력이 만들어낸 결과였다.


사실 나는 팀장님이 어려웠다. 그는 조금 차가운 사람이었다. 말수가 많지도 않았지만, 눈에 칼이 서려 있는 느낌이 종종 들었다. 그리고 능력자를 향한 동경이 ‘실망시켜드리고 싶지 않다’는 마음으로 바뀌면서 자연스럽게 두려운 존재가 된 것이었다. 하지만 내가 그분을 진심으로 존경하게 된 이유는 업무 능력 때문만은 아니었다.


팀장님은 사람을 잘 보는 사람이었다. 슬롯적이지 않은 내 성향을 파악하고 그대로 인정해 주셨다. 긴 말 하지 않아도 내가 불편하고 어려워하는 것이 있으면 먼저 알아차리고 없애주셨다.


회식 참석을 불편해하는 것 같으면 다른 방법으로 회식비를 쓸 수 있도록 배려해 주셨고, 내가 어려워하는 회의나 부서가 있으면 직접 함께 참석해 꼬인 실타래를 풀어주셨다.


물론 가끔은 보고서를 보며 이맛살을 찌푸리셨다. 한숨이나 차가운 눈빛 하나만으로도 나는 바로 긴장했다.

굳이 목소리를 높이지 않아도 느껴지는 카리스마가 있었다. 반항아였던 나도 그 앞에서는 자연스럽게 두 손을 모았다.




미안합니다

어느 날이었다. 팀장님이 회의로 자리를 비운 사이, 다른 부서의 임원 N 씨가 나와 같은 팀 선임이었던 D 과장을 불렀다. 그리고 꼬투리를 잡기 시작했다.


아마 최고 경영자가 근래 우리 팀을 지지하고 있는 상황에서, 본인의 부하 직원에게 들은 업무 불만까지 겹치면서 그 화풀이의 대상이 된 것 같았다.


나는 요목조목 말로 따지고 반박할 수 있었다. 연장자들 뒷목 잡게 하는 것, 그것은 내 주특기 아닌가? 나이가 많은 연장자라고 해서 무조건 참아야 한다는 법은 없다.

하지만 목 끝까지 올라온 말을 계속 삼켰다. 팀장님이 내게 해준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가만히 듣고 있다고 해서 지는 것이 아닙니다.

무슨 말을 하는지 먼저 들어보고, 냉정하고 침착하게 판단하세요.

본인이 뱉은 말은 바카라임을 져야 합니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욕을 계속 듣고 있자니, 심장이 두근대고 얼굴에 피가 몰리는 느낌이 들었다. 흥분해서 바카라임지지 못할 감정적인 말이 나올까 봐 나는 힘들게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런데 임원 N 씨의 말이 점점 선을 넘기 시작했다. ‘야, 새끼’ 같은 단어가 나오자 같이 있던 D 과장이 화를 꾹꾹 눌러 담은 목소리로 말했다.


“말씀하실 때 선은 지켜주시죠.”


그러자 임원 N 씨가 종이를 집어던지며 폭주하기 시작했다.


“너 이 새끼. 싸가지 없는 새끼.

너 누가 예뻐한다고 영원히 갈 것 같아?

네가 언제까지 잘 나갈 거 같아?
내가 너 가만 안 둬.”


얇은 회의실 벽 너머로 수십 명의 직원이 듣고 있었다. 나 역시 더는 참을 수 없었다.


“이사님, 업무만 말씀해 주…”


그때였다.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모두의 시선이 한 곳으로 향했다.

팀장님이 우리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오며 말했다.


“부끄럽지도 않습니까? 지금 애들에게 화풀이하시는 겁니까?

다들 나가세요. 이사님, 저랑 얘기하시죠.”


그리고 회의실의 모두를 내보내셨다. 잠시 후 회의실 블라인드가 내려갔다. 무슨 이야기가 오갔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안에서 큰 소리가 오가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얼마 뒤 회의실 밖으로 나온 팀장님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정장 상의와 넥타이 매무새를 천천히 다듬었다.

그리고 차갑게 한마디를 던졌다.


“따라오세요.”


나와 D 과장은 서로 얼굴을 마주 봤다.


‘아… 우리 큰일 났나? 어떻게 해.’


우리의 표정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런데 부서로 돌아온 팀장님이 우리 둘을 바라보며 꺼낸 첫마디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미안합니다.”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팀장님이 다시 말했다.


“내가 마음에 안 들고, 나한테 화가 난 걸 두 사람에게 푼 겁니다. 두 사람은 잘못 없습니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내가 지켜주지 못해서,

들을 필요 없는 말을 듣게 해서 미안합니다.

다음에는 이런 일 없을 겁니다. 잘 이야기됐습니다.


그리고 열받아서 일할 맛 안 나겠지만,

일은 일이니까 진정하고 복귀합시다.

칼퇴해야죠.”




사람은 말보다 행동을 오래 기억한다

나는 아직까지도 그 회의실 안에서 무슨 이야기가 오갔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그 이후 그 임원 N 씨에게 다시 불려 가는 일은 없었다. 업무적으로 얽히는 일도 없었다.


한때 나는 회사에서 사적으로 나를 터치하지 않는 것, 그리고 맡은 일을 잘하는 것만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연차가 쌓이고 나도 후배들과 함께 일하게 되면서, 그때의 팀장님을 다시 떠올리게 됐다.


나를 대신해 앞에 서주는 사람이 얼마나 든든한지. 내가 불편해하는 것을 먼저 알아차리고 조용히 치워주는 사람이 얼마나 고마운지. 무엇보다 내가 잘못하지 않은 일 앞에서 “미안합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강한 것인지 이제는 안다.


진정한 존경은 말로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얼마나 많은 일을 해냈는지 백날 이야기해도 직접 경험하지 않으면 존경이라는 감정은 생기지 않는다.


작은 배려.

든든한 뒷모습.

묵묵한 신뢰.

그리고 결정적인 순간에 나를 지켜주는 행동.

그것이 내가 그분을 진심으로 존경하게 된 이유였다.


사람은 말보다 행동을 오래 기억한다. 그리고 나는 아직도 그날의 마지막 말과 공기의 무게감을 기억한다.

“미안합니다.”

그날 나는 알았다.

진짜 강한 사람은 약한 사람을 누르는 사람이 아니라, 약한 사람 앞에 대신 서줄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런 사람을 우리는 오래도록 존경하게 된다는 것을.

목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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