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령이 씌었나 봅니다

온라인 게임 상사의 감정기복, 왜 팀원들은 감정 쓰레기통이 될까

by비타민W
감정 기복인가요, 빙의인가요?

회사라는 조직에 오랫동안 몸담다 보면 과학으로 설명되지 않는 '현상'들이 존재한다.


월급은 왜 받자마자 증발하는지,

팀마다 빌런은 왜 꼭 한 명씩 배치되는지,

내가 퇴사해도 어떻게든 회사는 잘만 돌아가는지,

그리고 시간은 왜 기어코 우리를 꼰대로 완성시키는지.


이 불가사의한 현상들 중 내가 가장 공포스러워하는 건, 무속인의 손길이 간절해 보이는 '기분파'들의 인격 변화다. 그들은 마치 빙의가 된 듯 순식간에 타인으로 변해 주변에 감정을 쏟아붓고는, 본인의 속이 시원해지면 언제 그랬냐는 듯 온화한 낯으로 돌아온다. 이런 사람들과 한 공간에 있는 건 업무가 아니라 수양을 빙자한 고행에 가깝다. 내가 만난 A 씨는 웬만한 무속인보다 빙의 횟수가 잦은, 그야말로 돌아다니는 '감정의 롤러코스터' 그 자체였다.




천사와 악령이 공존하는 한 지붕 두 자아

그의 자아는 늘 두 버전으로 나뉘어 존재했다. 기분이 좋은 날의 A 씨는 그야말로 '천사'였다. 내가 스스로 할 수 있는 일도 "내가 좀 도와줄게요"라며 먼저 손을 내밀었다. 사람 좋은 웃음을 띠는 그날만큼은 세상 어디에도 없는 훌륭한 동료였다.


문제는 예고 없이 찾아오는 '악령 버전'의 A 씨였다. 가정에서 불화를 겪고 온 날이면 그는 상처받은 감정을 여기저기 던지며 심술을 부렸다. 회사는 그의 도피처였다. 주말에 부부싸움이 있었던 날이면 팀원들의 월요일 아침은 그의 요청과 확인 메일을 처리하는 것으로 시작됐다. 팀원들은 그의 본명 대신 '(감정)기복 씨'라는 별명을 붙인 채, 그가 몰고 오는 감정의 태풍으로부터 최대한 멀어지기만을 바랄 뿐이다.


A 씨의 변덕스러운 기분 앞에서는 '연차'는 아무런 보호막이 되지 못했다. 한 번은 휴가 중인 직원에게 전화를 걸어 불같이 화를 냈다. 노트북을 챙겨가지 않았다는 게 이유였다. 당장 처리해야 할 급한 일도 아니었다. 단지 심드렁해진 본인의 화풀이 대상을 찾았을 뿐이고, 운 나쁘게도 연차 중인 동료가 그의 '감정 쓰레기통'으로 낙점된 것뿐이었다.


쉬고 있는 사람의 전화기를 울려대 '프로 정신'을 운운하며 화를 냈고, 그 탓에 즐겁게 연차를 보내던 동료는 그날 하루를 완전히 망쳤다. 반면 A 씨는 화를 쏟아낸 뒤 평온해졌다. 이런 모습을 반복해서 보다 보니 문득 궁금해졌다. 왜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기분을 남에게 처리시키려 할까.


감정이 태도가 되는 순간

심리학에서는 이를 투사(Projection)라고 부른다. 자신이 감당하지 못한 불안과 분노를 타인에게 떠넘기고, 그것을 상대의 문제로 해석하는 방어기제다.


"내가 기분이 나쁜 이유는 저 사람 때문이다."

"내가 화를 내는 이유는 저 사람이 부족해서다."


이런 식의 해석은 자신의 감정을 정당화하는 데는 도움이 될지 몰라도 주변 사람들에게는 재앙이 된다. 감정은 원래 개인의 몫이다. 하지만 감정이 태도가 되는 순간, 그 감정은 조직 전체의 업무가 된다.




일을 하는 건지, 기분을 관리하는 건지

A 씨만 그런 것은 아니었다. 감정이 태도가 되는 건 기성세대의 전유물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어떤 선배는 기분이 좋은 날에는 최고의 사수였다. 하지만 기분이 가라앉은 날에는 어제 통과했던 서류도 다시 반려했다. 검토 기준이 문서의 품질인지, 본인의 컨디션인지 알 수 없었다.


어떤 후배는 하루 종일 한숨을 쉬며 핸드폰만 봤다. 눈도 마주치지 않았고, 짜증 섞인 비속어가 간간이 흘러나왔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주변 사람들은 어느새 그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괜찮은지 묻고, 기분을 맞추고, 분위기를 수습하느라 바빴다.


우리는 일을 하러 온 게 아니라, 한 사람의 기분을 관리하러 온 셈이었다.


조직을 병들게 하는 사람들

감정이 태도가 되면 조직에는 이상한 문화가 생긴다. 보고서의 완성도보다 보고하는 타이밍이 중요해진다.

지금 말을 걸어도 되는지, 오늘은 기분이 어떤지, 회의 전에 눈치를 봐야 하는지부터 계산한다. 상대방의 기분을 계산하느라 정작 업무에 써야 할 에너지는 휘발되고 만다. 업무 능력보다 눈치가 생존 기술이 된다면 그 조직은 이미 병들기 시작한 것이다.




감정은 누구에게나 있다. 나도, 당신도, 그들도 인간이기에 좋은 날과 나쁜 날이 교차한다. 문제는 자신의 감정을 고스란히 태도로 꺼내 타인에게 처리시키는 것이다. 내 짜증을 타인의 업무로 만들고, 내 불안을 타인의 바카라임으로 돌리고, 내 스트레스를 타인의 하루에 흘려보내는 것. 그것이 진짜 문제다. 그래서 나는 감정 기복이 심한 사람을 만나면 예전처럼 이유를 찾으려 하지 않는다. 대신 거리를 둔다.


"네, 알겠습니다."

"그렇군요."


일은 하되 영혼은 담지 않는 것. 당신을 '감정 쓰레기통'으로 써봤자 아무런 반응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건조한 시위가 필요하다. 만약 너무 화가 나서 한마디를 보태야 한다면, 맞서 싸우기보다 담백하게 상황을 분리해야 한다.


"지금 머리가 복잡하신 일이 있으신가요?

괜찮으시면 추후에 다시 보고 드리겠습니다."


어쩌면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퇴마사가 아닐지도 모른다. 다만 자신이 뿌린 짜증과 한숨, 신경질이 어떤 얼굴로 돌아다니고 있는지 보여줄 거울 한 장이면 충분할 것이다. 악령은 원래 거울을 싫어하니까.


나의 기분이 남의 일과가 되지 않게 하는 것.

그것이 온라인 게임인이 갖춰야 할 최소한의 매너이자 격이다.

목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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