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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계약 서명식 사진에서 이준은 뒷줄 왼쪽 끝에 서 있었다.
경제지에 실린 그 사진에는 회장과 부회장과 세인화학 창업주가 앞줄에 앉아 있었지만, 그룹 안에서 사진을 읽는 법을 아는 사람들은 뒷줄 왼쪽 끝을 먼저 봤다. 대리가 저 자리에 서 있다는 것. 그것이 이 거래의 실제 조직도였다.
십이월의 이준은 그룹에서 가장 바쁜 사람이 되었다.
월요일 아침 임원 회의에 배석했고, 화요일에는 케미칼 통합 태스크에 불려갔고, 수요일에는 회장 독대가 있었고, 목요일에는 사장단 회의 자료의 최종 검토가 그의 바카라상을 거쳤다. 언제부턴가 회의 시작 전에 누군가 묻는 것이 관례가 되었다. 강 대리 검토는 받았나?
받지 않았으면 안건이 미뤄졌다. 미뤄지는 것이 당연해졌다.
"결재선에 병목이 생기면 그게 권력이에요."
홍유진이 말했다.
"근데 강이준 씨. 병목은 물이 마를 때 제일 먼저 갈라지는 자리이기도 해요."
이준은 웃어넘겼다. 요즘 그는 경고를 웃어넘기는 속도가 빨라져 있었다. 경고들이 전부 틀렸기 때문이다.
노경환의 감사는 두 번 다 그를 뚫지 못했고, 백기호의 심문은 엿새 만에 박수로 바뀌었고, 사천억은 그의 손에서 깎였다. 세상이 자꾸 그가 옳다고 판정해주는데 혼자 조심하는 것은 위선처럼 느껴졌다.
운주공장 증설안이 올라온 것은 본계약 삼 주 뒤였다.
세인화학의 분리막 코팅 공정을 태원케미칼 운주공장에 통합하는 안이었다. 시너지 창출의 첫 단추. 유상범 사장은 공사 기간을 구십 일로 잡아 왔다.
"내년 이분기 실적에 통합 효과를 반영하려면 삼월 말 가동이 마지노선입니다. 야간 돌관으로 갑니다."
"화학 공정 통합을 석 달에요?"
배진수가 자료를 넘기며 중얼거렸다.
"우리 아파트 인테리어도 두 달 걸렸는데."
"기술진이 된다고 했으면 되는 겁니다."
이준이 말했다.
"우리가 볼 건 일정하고 예산이에요. 안전계획은 기술 검토 영역이고. 지금은 속도가 먼저예요."
배진수는 네, 하고 자료를 덮었다. 덮는 손이 반 박자 늦었지만, 이준은 그 반 박자를 읽는 사람이었던 적이 있었고, 지금은 아니었다.
십이월 중순, 증설 착공 전 통합 안전협의가 화상으로 열렸다. 이준은 그룹 측 배석자였다. 화면 분할창 속에 운주 현장 사람들이 앉아 있었고, 발언자 표시에 '태원케미칼 정비1반장 조성만'이라는 이름이 떴다.
오십 대의 남자였다. 발언 차례가 오자 그는 마이크에 대고 또박또박 말했다.
"코팅 공정 들어오면 용제 사용량이 배로 늡니다. 지금 임시 보관 계획이 배관 보온 작업 구간하고 너무 가까워요. 이격을 다시 봐주셔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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