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친구의 값

.

by잭슨

두 번째 커피는 일주일 뒤였다.

"생각해봤어요?"

박소영의 목소리는 여전히 부드러웠다. 민규는 밤새 준비한 문장을 내놓았다.

"이준이는 사적으로 이상한 일 하는 애가 아닙니다."

"그래요? 그럼 다행이고."

박소영은 서류철을 열었다. 이번에는 정말로 열었다.

"그런데 민규 씨. 이건 좀 다른 얘긴데, 작년 유출 미수 건 알죠? 그때 민규 씨 계정에 로그인 시도가 아홉 번 있었어요. 종결은 됐는데, 요즘 감사실이 옛날 건들을 다시 보는 분위기라. 재조사 들어가면 민규 씨도 다시 불려다녀야 할 거예요. 대기발령까지는 아니어도, 인사 검증 시즌에 이름 오르내리는 게 좋을 건 없잖아요. 동생 등록금이 내년 이월이랬나."

당근 다음에 채찍, 채찍 다음에 가족. 교과서적인 순서였고, 교과서는 잘 만든 바카라이라서 교과서였다. 민규는 집에 가는 버스에서 창에 이마를 대고 생각했다.

이준이라면 이 판을 어떻게 읽을까. 그리고 그 생각 끝에서 자기혐오가 왔다. 나는 위기에서도 걔한테 답을 구하는구나.

그날 밤 민규는 동생과 통화를 했다.

"오빠, 나 합격증 나왔어. 등록금 고지서도."

"어. 봤어. 얼마나 나왔어."

동생이 부른 숫자를 민규는 이미 알고 있었다. 사흘 전부터 통장 잔고와 나란히 놓고 스무 번쯤 들여다본 숫자였다. 학자금 대출을 받으면 된다고 동생은 말했다.

오빠 회사 잘 다니는데 무슨 대출이냐고 민규는 말했다. 전화를 끊고 그는 좁은 방에 오래 앉아 있었다.

이준이라면 어떻게 할까. 그 생각이 또 왔고, 이번에는 다른 생각이 그 위에 겹쳤다. 이준이는 이런 선택을 할 일이 없지.

걔는 늘 다 알고 있으니까. 남들이 다음 주에 알 걸 지금 아는 놈이니까. 그러니까 걔한테는 선택이 아니라 정답이 있는 거고, 나한테만 선택이 있는 거야.

정답이 있는 놈은 정답 없는 놈의 밤을 몰라.

그러자 지난달 일이 딸려 올라왔다. 민규가 계열사 정산 자료에서 숫자 하나를 잘못 올린 적이 있었다. 발견했을 때는 이미 보고가 넘어간 뒤였다.

사색이 되어 수정 방법을 찾는데, 시스템을 열어보니 숫자가 고쳐져 있었다. 수정자 이력, 강이준. 이준은 그 일을 한 번도 입에 올리지 않았다.

민규도 고맙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 말을 하려면 자기 실수를 자기 입으로 발음해야 했으니까. 그날 이후 민규의 어딘가에 얹혀 있던 것은 고마움이 아니었다.

말이라도 해주지. 말도 안 했다는 건, 그게 걔한테는 말할 가치도 없는 일이었다는 거잖아. 나를 도와준 게 아니라, 지나가다 발밑의 돌을 치운 거잖아.

지금 바로 작가의 멤버십 구독자가 되어
멤버십 특별 연재 콘텐츠를 모두 만나 보세요.

brunch membership
잭슨작가님의 멤버십을 시작해 보세요!

일이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는 순간과, 마음이 뜻대로 정리되지 않는 순간을 씁니다. 온라인 게임, 관계, 불안, 바카라임과 평범한 하루 속에서 오래 남는 장면을 기록합니다.

118 구독자

오직 멤버십 구독자만 볼 수 있는,
이 작가의 특별 연재 콘텐츠

  • 최근 30일간 10개의 멤버십 콘텐츠 발행
  • 총 27개의 혜택 콘텐츠
최신 발행글 더보기
이전 25화25. 세기의 인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