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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족 모임의 조건은 하나였다.
"기록 가지고 오지 말고, 사람으로 오라 하시더군."
차동철이 전한 말이었다. 서진항 노조 사무실에서 세 번을 더 만나고, 이준이 아버지의 기일과 달현공장의 골목 이름을 말하고 나서야, 위원장은 전화 한 통을 걸어주었다.
"임채근이라고, 대진정밀 경리부장 하던 양반이야. 사고 때 서류란 서류는 다 그 손을 거쳤지. 회사 무너지고 나서 절대 입 안 열고 산 지 십오 년이고. 그 양반이 자네들을 보겠다는 건—"
차동철은 잠깐 말을 골랐다.
"강명호 씨 아들이라서야. 다른 이유 없어."
만남 승낙이 떨어진 것은 수요일 저녁이었다. 접선은 열흘 뒤 토요일, 임채근이 사는 소도시에서. 전화를 끊고 나왔을 때 밖은 이미 어두웠고, 서린이 회사 뒷길 은행나무 아래서 기다리고 있었다.
"승낙했대요."
이준의 말에 서린은 숨을 길게 내쉬었다. 십오 년짜리 숨이었다.
두 사람은 버스를 탔다. 서린이 노선을 잘못 봐서, 천변과 반대로 가는 버스였다. 세 정거장을 가서야 그녀가 알아챘고, 내려서 한참을 웃었다.
방향을 잘못 본 것이 처음이라고 했다. 살면서 처음이라고. 그래서 두 사람은 그냥 걸었다.
삼십 분을 걸어 천변에 닿았고, 걷는 동안 편의점에서 산 어묵 국물이 다 식었고, 식은 국물을 서린이 마시다가 웃음이 터져 사레가 들렸고, 이준이 등을 두드려주었다. 노란 잎이 가로등 불빛 속에서 천천히 떨어졌다. 벤치 앞에서 서린이 걸음을 멈췄다.
"강이준 씨. 나 요즘 이상해요."
"뭐가요."
"십오 년 동안 아버지 생각만 하면 숨이 막혔는데, 요즘은 숨이 쉬어져요. 사건은 하나도 안 풀렸는데. 달라진 게 뭔가 생각해봤는데."
그녀는 이준을 올려다보았다.
"당신이 옆에 있다는 것밖에 없더라고요."
바람이 지나갔고, 잎이 하나 그녀의 어깨에 앉았다. 이준이 그것을 떼어주려고 손을 올렸을 때, 서린이 그 손을 잡았다. 차가운 손이었다.
처음 악수했을 때도 차가웠던 손. 그 온도 그대로, 그녀가 한 걸음 다가왔다.
입술이 닿은 시간은 길지 않았다. 물러선 서린이 말했다.
"이건 계산에 없던 거예요."
"저도요."
서린은 무슨 말을 더 하려다가, 갑자기 손목시계를 봤다.
"……내일 아침 회의가 아홉 시고."
"네."
"내가 지금 왜 회의 얘기를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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