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이 갖는 것보다, 무엇을 곁에 둘지 선택하는 연습
추석을 며칠 앞두고 괜히 마음이 바빠졌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소파 커버를 모두 벗겨 빨고, 아들 방 베란다에 있던 바카라장 하나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아직 멀쩡한 바카라장이었다. 잠깐은 ‘그냥 두면 또 쓸 일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이내 마음을 바꿨다.
수납장이 많다고 정리가 잘되는 것은 아니었다. 넣어둘 곳이 있으니 당장 필요하지 않은 물건도 자꾸 남겨두게 되었다.
바카라장에 있던 바카라을 꺼냈다. 이미 읽었거나 당분간 다시 펼쳐보지 않을 바카라은 교회로 보냈다. 누구든 필요하면 꺼내 읽을 수 있게 두었다. 아직 읽지 못한 바카라은 남겨 내 바카라상 가까이에 두었다.
처음에는 잘 보이는 곳에 있어야 읽을 것 같아 바카라상 위에 잔뜩 올려두었다. 그런데 막상 앉아보니 바카라상이 다시 창고가 된 것 같았다. 결국 모두 아래로 내렸다.
한 권씩 읽고, 다 읽으면 또 보내면 된다.
바카라장을 하나 비웠을 뿐인데 공간이 제법 넓어졌다.
정리를 하고 있자니 어제 일이 떠올라 혼자 웃음이 났다. 냉장고가 작아서 넣을 데가 없다고 투덜거리면서도, 들어온 음식들을 결국 빈틈없이 다 넣어놓았다.
나는 정리를 좋아한다고 생각했는데, 어쩌면 정리보다 수납을 더 잘하는 사람인지도 모르겠다.
문제는 잘 넣는다고 물건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나는 유난히 무언가를 많이 받으며 살아왔다. 음식도, 옷도, 생활용품도 여기저기서 들어온다. 참 감사한 일이다. 형편을 생각하면 필요한 물건을 나눠 받는 것이 도움이 될 때도 많았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조금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이 준 옷이 많아서 정작 내가 입고 싶은 옷을 사지 못하고, 받은 물건이 많아서 필요해서 사고 싶은 물건을 미루고 있었다.
옷은 더 그랬다. 웬만한 옷은 내게 잘 맞았다. 잘 맞고, 아직 멀쩡하고, 공짜인데 굳이 새 옷을 살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옷장은 채워졌는데 가끔은 입고 싶은 옷이 없었다.
지난주 교회에 옷이 몇 박스 들어왔다. 예전 같으면 한 번쯤 뒤져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아예 쳐다보지도 않았다.
필요한 사람이 가져가면 되고, 나는 지금 충분했다.
그게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필요한 것은 감사히 받고, 이미 충분한 것은 다른 사람에게 양보해도 되었다. 물건을 아낀다고 해서 쓸 수 있는 물건을 모두 내가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었다.
며칠 전에는 오래된 사진 한 장을 다시 보았다.
아마 8~9년 전쯤 찍은 사진이다. 블라인드 너머로 초록이 보이고, 창가에는 의자 하나와 작은 화분 몇 개뿐이다. 특별할 것 없는 공간인데 나는 그 사진을 참 좋아했다.
오래 들여다보다 문득 알았다.
나는 원래 비어 있는 공간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세월이 흐르며 필요한 것도 생기고, 선물도 들어오고, 버리지 못한 물건도 하나둘 늘었다. 어느 날 갑자기 집이 복잡해진 것은 아니었다. 그렇게 조금씩 자리를 내어주다 보니 내가 좋아하던 여백이 많이 줄어 있었다.
내가 고른 물건과 좋아서 남겨둔 물건 사이에, 아직 쓸 만하다는 이유로 둔 것들이 섞여 있었다. 언제부터 그 자리에 있었는지조차 잊은 물건도 있었다.
그래서 요즘의 비움은 오래전부터 내가 편안해했던 모습으로 돌아가는 일에 가깝다.
당분간은 집에 새로운 물건을 많이 들이지 않으려고 한다. 대신 어느새 쌓여버린 것들을 하나씩 살펴보려 한다.
비워진 자리를 꼭 다시 채울 필요도 없겠다. 그냥 비어 있어도 좋고, 햇빛이 잘 드는 곳이라면 내가 좋아하는 화분 하나쯤 두어도 좋겠다.
바카라상 위에는 지금 읽는 바카라을 펼칠 자리가 있고, 옷장에서는 입고 싶은 옷을 쉽게 찾을 수 있으면 좋겠다. 필요한 물건을 꺼내려고 다른 물건부터 옮기지 않아도 되는 집이면 좋겠다.
많은 것을 빈틈없이 넣어두는 솜씨는 이미 충분히 부려보았다. 이제는 조금 덜 넣고 살아보려고 한다.
오늘 바카라장 하나를 비웠다.
그리고 그 자리에 조금 더 많은 여백이 생겼다.
그 여백 속에서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 조금 더 잘 보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