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필이면(2화)

그날의 우리

by하얀 나비
동네 산바카라중

​아이가 어릴 때
아내는 집에 있었다.
나는 회사에 있었다.

​둘 다 하루 종일 일했는데
이상하게 나는 집에 있는
아내가 부러웠다.

​출근길 만원 전철의 피로,
상사의 잔소리와 끝없는 회의,
월급날보다 늘 한 발 먼저 오는 카드값 명세서.
​'그래도 오늘은 웃으면서 들어가야지.'


퇴근길 전철역에서 늘 다짐하며
현관문을 열지만,
눈앞에 펼쳐지는 건
우는 아이와 지친 아내, 그리고 전쟁터 같은 집구석. ​조심스레 던진

"오늘 어땠어?"

라는 말에
"당신은 회사라도 갔잖아"

라는 날카로운 답이 돌아올 때면,
오늘 회사에서 깨진 보고서와
주머니 속 사직서는
다시 깊숙이 구겨 넣을 수밖에 없었다.

​가끔 만나는 친구 놈들은
저만치 앞서가는 것 같았다.
누구는 승진을 했고, 누구는 외제차를 샀고,
누구는 주말마다 골프를 친단다.
꼭 한 명쯤은 어깨를 툭 치며 묻는다.
"야, 너는 요즘 돈 좀 모았냐?"
​그저 허허, 웃을 뿐이었다.
속으론 눈물이 고이는데.

​돈 잘 버는 남편과 돈 잘 쓰는 부인.
늘 우리 옆집에만 살던 그 '부유한 이웃'들이
내 초라한 주머니를 더 얄궂게 만들던 어느 가을날.
​추석이 지나고 며칠 뒤,
퇴근길에 마주한 아내의 얼굴이 유독 어두웠다.


​“큰일 났어... 옆집 아저씨,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대.”
“뭐라고? 아니, 그게 무슨 소리야?”


​추석 명절을 맞아 고향으로 향하던 길이었다고 했다.
조금이라도 빨리 가려고, 조금이라도 더 잘 사는 모습을 보여주려 서둘렀던 걸까. 과로와 장거리 운전이 부른 비극이었다.


​가장(家長)은 허망하게 세상을 떠났고, 그 예쁘던 옆집 엄마는 중상을 입어 수술실을 전전했다.
다행히 의자 아래 틈새에 끼어 아무런 상처도 없는 건 그 집 어린 아들 녀석뿐이었다.

​기나긴 명절 연휴를 누리느라 늦는 줄 알았던 옆집 불은
그렇게 영영 켜지지 않았다.
​동네 여자들의 웃음소리가 가득하던
"커피 마시러 오라"는 반가운 호출은 더 이상 울리지 않았다.

아내도 조용히, 그저 감사함으로 아이들을 품에 안았다.
​화려해 보였던 옆집이 하얗게 비워지고, 얼마 뒤 또 다른 낯선 이가 이사를 왔다

우리는 늘 벽 너머의 풍경만 보며
타인의 행복을 부러워하고,
내가 가지지 못한 것에 힘들어 한다.
​하지만 인생이라는 긴 길 위에서
누가 더 빨리 가는지, 누가 더 좋은 차를 탔는지는
그리 중요한 게 아니었다.

​만원 전철에 시달려도 돌아갈 집이 있다는 것,
지쳐서 소리를 지를지언정 내 곁에 아내가 있다는 것,
기저귀를 갈아달라고 울어대는 내 아이가 건강하다는 것.
​그 지독했던 '독박육아'와 '회사 노예'의 삶이
실은 옆집이 그토록 바랐을,
지키지 못한 기적 같은 일상이었음을
우리는 미처 몰랐다.

​하필이면 늘 잘 사는 집만 내 옆집에 왔던 게 아니라,
어쩌면 신이 내게
‘너는 이미 가장 잘살고 있으니 곁눈질하지 말라’고
보내준 나침반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때의 우리는,
그것만으로도 이미 눈부시게 부자였다.


●□● 실화를 바탕으로 한 글입니다. 비극적인 일이라서 (하필이면 1화)를 끝으로 하려고 망설이다 올리게 되었습니다. 늦게나마 오직 부인과 아들을 위해 열심히 사셨던 너무나 순박하고 착하셨던 옆집 아저씨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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