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수한 고백

자전거 탄 소년

by하얀 나비
금계국(Coreopsis)

완행열차를 타고 창밖을 바라본다.
유리창에 비치는 풍경들은 눈에 익숙한 모습들이다.

특별히 눈길을 끌 것도 없는 나무들, 그 사이로 펼쳐지는 작은 평야. 멀리 얕은 산 아래 드문드문 집들이 보이고, 바라보는 동안 움직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기차는 속도를 내지 않고 여유롭게 미끄러지듯 덜컹거리며 달린다. 복잡한 도시 한가운데를 벗어나자 바쁘지 않은 평화로운 풍경이 온몸의 긴장을 내려놓게 만든다.

기차 안 통로로 계란이나 음료수를 파는 사람이 지나가고, 몇몇 사람들이 돈을 건넨다. 돈도 없었지만, 설령 그냥 준다 해도 사춘기 소녀였던 나는 기차 안에서 혼자 그런 것을 먹을 용기가 없었다.

둘 곳 없는 어색한 시선은 볼 것도 없는 창밖에 고정된 채 그저 멍하니 흘러가는 풍경을 바라본다.
고향에 가면 나를 반겨줄 가족과 변함없는 고향집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아궁이에 불을 지펴 지은 무쇠솥밥, 아궁이 안쪽에서 끌어낸 붉게 이글거리는 숯불 위에 올린 뚝배기 속 보글보글 끓는 된장찌개, 그리고 잘 익은 김치.
생각만으로도 나도 모르게 침을 꼴깍 삼켰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기차는 알맞은 시간에 내가 내려야 할 허름한 역에 도착했다.

이제 다시 버스를 타야 한다.
알루미늄으로 허술하게 만든 작은 사무실 창문을 빼꼼히 열고 버스표를 산다.

시골길을 달리는 버스는 유난히 흔들렸다. 마치 자갈길을 달리는 것처럼 가만히 있지 못하게 흔들어댄다. 하지만 6개월 만에 다시 찾는 고향집에 가려면 반드시 거쳐야 할 과정이었다.

나는 버스 맨 뒷자리를 좋아했다.
남의 시선을 피할 수 있고, 조금 높은 자리에서 내려다보이는 버스 안 풍경과 양쪽 창밖의 모습까지 한눈에 들어와서 좋았다.
뒷자리에 앉고 보니 옆자리 건너편에 먼저 앉아 있던 남자아이가 얼굴을 붉힌다.

아뿔싸.
초등학교 때 우등생이었던 친구인 것 같았다.
괜히 모른 척하며 다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내릴 때까지 한쪽 창밖만 바라보았다.
버스는 덜컹대는 길을 한참 달렸고, 결국 나도 내리고 그 아이도 내렸다.

아주 작은 마을과 학교 옆을 지나 걷는다. 구불구불한 길이 작은 산 사이로 이어지고, 길가에는 키 큰 코스모스가 하늘하늘 자유롭게 피어 있다.

뜻밖의 아름다운 풍경을 뒤로한 채 걸음을 재촉한다.
초등학교 3년 동안 수없이 오갔던 익숙한 길이다.
저 언덕을 넘으면 친구네 과수원이 나온다.
변한 것이 없는 것 같은데, 그 친구는 아직도 이 집에 살고 있을까?
그 친구는 내가 연필로 그린 인형 그림을 좋아해서 과일과 바꿔 먹곤 했다.

이제 저 언덕만 넘으면 우리 집 뒷산이 보일 것이다.
인적 없는 길 위로 자전거 한 대가 다가오고 있었다.
길옆으로 비켜서는데 자전거가 내 앞에 멈춰 섰다.

“너 유미 맞지?”

“나 영우인데, 기억하니?”

버스에서 옆자리 건너편에 앉아 있던 바로 그 아이였다.

“응, 알아.”

그러자 영우가 잠시 머뭇거리더니 말했다.

“우리 친구 하면 안 될까?”

얼마나 급히 자전거를 타고 달려왔는지 이마에 맺힌 땀을 연신 닦아내고 있었다.
순간 마음이 놀라고 복잡해졌다.
하지만 나는 나도 모르게 말했다.

“아니, 괜찮아.”

그의 실망한 얼굴과 돌아서 달려가는 자전거를 차마 오래 바라볼 수 없었다.
그가 좋고 싫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저 아직 어린 내가 누군가와 특별한 약속을 한다는 것이 두려웠다.

혹시 상처를 받지는 않았을까.
기대를 품고 자전거를 힘껏 달려왔을 그의 마음을 생각하니 한없이 미안해졌다.

세월이 흘러 캐나다에서 동창회 소식을 전해 들으며 알게 되었다.
영우가 경찰관이 되었다는 소식이었다.

문득 그날, 땀을 흘리며 자전거를 타고 달려오던 소년의 모습이 떠올랐다.

친구야.
멋지게 잘 살고 있지?
그날 네 용기 있는 고백에 제대로 답해 주지 못해서 미안했다.
그래도 네 순수한 마음만은 오랫동안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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