빼앗긴 봄

우리는 언제 남이 되었을까

by하얀 나비
앞 마당

"너, 내 남편이랑 여기서 뭐 하는 거야?"

그녀는 다짜고짜 베트남 여인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낯선 땅 미국의 어느 거리였다.

여인은 놀란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고, 그 옆에 서 있던 남편도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어떤 사이야?"


떨리는 목소리였다.

그녀는 이미 오래전부터 의심하고 있었다. 남편의 무관심, 차가운 눈빛, 무표정한 얼굴.

그 모든 것에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믿고 싶었다.

아니, 차라리 다른 여자가 있다고 믿는 편이 더 견디기 쉬웠는지도 모른다.


그 순간 남편이 그녀를 밀쳐냈다.

예상하지 못한 힘에 몸이 뒤로 넘어졌다.

하필 목욕탕을 다녀오던 길이었다. 깜빡 잊고 새 속옷을 챙겨 가지 못한 날.

바닥에 나동그라진 그녀의 치맛자락 사이로 맨살이 드러났다.


사람들의 시선이 쏟아졌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수치심보다 더 견디기 힘든 것은 남편의 다음 행동이었다.

남편은 급히 베트남 여인 쪽으로 몸을 돌렸다.


"I am sorry."


그리고 말했다.


"애들 학교 친구 엄마야. 당신 미쳤어?"


그녀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그날 그녀는 깨달았다.

남편의 사랑은 누가 훔쳐 간 것이 아니라, 이미 오래전에 사라졌다는 것을.


십 년 전 남편은 아이들을 데리고 미국으로 떠났다.

온라인 게임을 잃은 뒤였다.

그는 한국 슬롯에 실망했고, 더 나은 미래를 찾아 미국행을 선택했다.


그녀는 남았다.

생활비를 벌어야 했고 정년까지 일해야 했다. 아이들을 위해서였고 남편을 위해서였다. 혼자 서울에 남아 일하며 생활비를 보냈다.

그때는 믿었다. 사랑은 거리를 이길 수 있다고.


처음 몇 년은 정말 그랬다.

남편이 한국에 올 때마다 그녀는 공항으로 달려갔다. 짧은 만남은 오히려 설렜다. 함께 있는 시간이 귀해서 작은 식사 한 끼도 특별했다.

멀리 떨어져 있어도 부부는 부부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은 생각보다 길었고 사람은 생각보다 쉽게 변했다.


몇 년이 지나자 남편은 달라졌다.

한국에 와도 피곤하다며 먼저 잠들었다.

같은 집에 있어도 다른 방에서 잤다.

대화는 점점 짧아졌다.

안부만 남았고 마음은 사라졌다.

그녀는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아니, 알면서도 인정하지 못했다.


정년퇴직을 한 뒤 그녀는 미국으로 갔다. 이제야 가족과 함께 살 수 있다는 기대를 안고.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을 수 있을 거라 믿으며.


하지만 그곳에서 그녀가 마주한 것은 가족이 아니라 낯선 사람들이었다.

아이들은 이미 어른이 되어 있었다.


그들에게 엄마는 사랑하는 존재이면서도 동시에 불편한 존재였다. 남편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늘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지나쳤다.

아침 식탁에서도.

거실에서도.

주말의 마트에서도.

그녀는 가족들 곁에 있었지만 가족 안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마치 오래전에 초대받았으나 이미 잊힌 손님처럼.


그날 길거리에서 넘어졌을 때.

사실 그녀는 베트남 여인을 붙잡은 것이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사라져 버린 남편의 사랑을 붙잡으려 했는지도 모른다.


십 년 동안 혼자 견뎌 온 세월을.

생활비를 보내며 버텨 온 외로움을.

언젠가 다시 가족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그녀는 놓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어떤 것은 붙잡으려 할수록 더 멀어진다.

사랑도 그렇다.

가족도 그렇다.

사람의 마음도 그렇다.

그날 이후 그녀는 자주 길을 걸었다.

잃어버린 것이 남편인지, 사랑인지, 아니면 자기 자신인지 알 수 없었다.

다만 한 가지는 알게 되었다.


사랑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함께하지 못한 시간 속에서 조금씩 닳고 마모되어, 어느 순간 돌아보면 흔적만 남게 된다는 것을.


늦은 오후, 그녀는 벤치에 앉아 햇살을 바라보았다.

봄은 해마다 다시 찾아온다.

하지만 어떤 봄은,

한 번 지나가면 끝내 돌아오지 않는다.



●□● 이 이야기는 오래전 알던 분에게 들은 실화를 바탕으로 재구성했습니다.

지금은 연락이 닿지 않지만, 어쩌면 그분은 다른 대지에서 온전한 새 봄날을 맞으며 행복하게 살아가고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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