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쳐간 운명, 머무른 평온
20대 초반 지루하리만큼 평온한 오후였다. 회사에서의 시간은 늘 더디게 흘렀고, 딱히 밀린 일도 급할 것도 없는 날들이 이어졌다. 적은 월급마저 서글프지 않게 수긍이 가던, 그런 심드렁한 일상이었다.
점심을 먹고 커피 한 잔을 비운 뒤, 마음속으로 퇴근 시간을 계산하고 있을 때였다. 같은 부서의 말단 직원이 저만치 홀로 앉아 있는 내 자리로 우물쭈물 걸어왔다. 무슨 일인지 얼굴은 이미 잘 익은 사과처럼 붉어져 있었다. 그는 머리를 긁적이며 수줍게 말을 건넸다.
“미스 하, 혹시 제 친구 한번 만나 볼래요?”
그 수줍은 청이 뭐 그리 어려운 부탁이라고, 나는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그 가벼운 대답 하나가 어떤 인연들을 불러올지 그때는 알지 못했다. 한국은행에 다닌다는 친구를 시작으로 대한항공 직원, 의대 4학년 생, 그리고 마지막으로 작은 키에 조금 뚱뚱한 남자까지, 그는 부지런히 도 내게 친구들을 소개해 주었다. 마지막 친구에 대해 그는 별다른 설명이 없었고, 나 역시 묻지 않았다. 어차피 그 모든 만남은 단 한 번의 스침으로 끝이 났으니까.
그로부터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 나는 고국을 떠나 멀리 캐나다의 일상 속에서 뜻밖의 뉴스를 마주했다. 성도 이름도 특이했던 낯익은 이름과 사진이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설마!!! 나는 설거지를 멈추고 TV앞에 섰다. 순간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오래전 명동 성당 앞 그 찻집에서 마주 앉았던, 그 뚱뚱했던 남자의 얼굴이었다.
문득 그날의 기억이 선명해졌다. 그는 내 앞에서도 전 여자친구가 유학을 떠나 이별하게 되었다며 깊은 슬픔에 잠겨 있었다. '지우지 못한 과거를 품은 사람을 왜 내게 소개해주었을까' 하는 불쾌함과, 나이가 나보다 훨씬 많았고 첫눈에 끌리지 않았던 외모 탓에 뒤도 돌아보지 않고 끝냈던 인연이었다.
화면 속 그는 유명한 호텔의 사장이 되어 있었고, 세상의 온갖 비극적이고 어두운 사건의 중심에 서 있었다. 돈이 얽힌 가족 간의 불화와 아내의 비극적인 종말, 그리고 시간이 더 지나 그 자신마저 아직은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했다는 소식까지. 순간 등줄기에 서늘한 소름이 돋았다.
만약 그때 우리의 이야기가 다르게 흘러갔더라면, 그 모진 풍파를 견뎌내야 했던 이가 내가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아찔한 가정이 머릿속을 스쳤다. 내가 피한 것은 단순한 '남자'가 아니라, 감당할 수 없었던 거대한 '운명의 폭풍'이었던 셈이다.
인생이란 얼마나 수많은 우연과 인연의 그물망으로 짜여 있는 것일까. 우리가 살아가는 오늘은 어쩌면 수많은 잘못된 길을 용케도 비켜 와닿은 기적 같은 종착지일지도 모른다.
눈앞의 화려함에 눈이 멀지 않았던 무심함이, 내 직관이 속삭인 작은 거절이 결국 나를 지켜낸 방패가 되어주었다. 오늘도 나는 나를 비껴간 수많은 불행에 감사하며, 지금의 평온을 소중히 보듬는다.
문득 글을 맺으며, 오랜 의문 하나가 마음 가장자리에 피어오른다. 그 시절 그 말단 직원은 왜 그렇게 얼굴이 빨개지면서까지 내게 계속해서 친구들을 소개해 주었을까.
어쩌면 그 순박한 청년은 홀로 서성이던 내게 자신이 아는 가장 좋은 미래를 선물해주고 싶었던, 운명이 보낸 수줍은 안내자가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