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의 다른 모습

'마카레나(Macarena)'

by하얀 나비

​남편의 기도 소리를 듣다가,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해 방 밖으로 뛰쳐나갔던 적이 있다. 우리는 수십 년을 함께 살면서도, 문득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배우자의 낯선 모습을 맞닥뜨리는 순간 당황하곤 한다.


​십몇년전, 하와이로 여행을 갔을 때의 일이다. 아들도 여정에 동행했지만, 딸은 일 때문에 아쉽게도 함께하지 못했다.
​붉은 노을이 내려앉을 무렵, 우리는 디너 크루즈에 올랐다.


세계 각국에서 모여든 사람들로 배 안은 활기가 넘쳤다. 진행자가 흘려보내는 감미로운 음악과 노래, 그리고 낭만적인 분위기에 취해 마시는 와인까지. 세상이 온통 노을빛으로 물든 채, 우리는 바다 한가운데 둥실 떠 있었다. 어느덧 하나둘 불을 밝히기 시작한 하와이 섬이 멀리서 보석처럼 반짝였다.


​식사가 끝날 때쯤, 스태프들이 중앙의 테이블과 의자를 치우기 시작했다. 잔잔한 음악이 흐르자 사람들이 하나둘 무대로 나와 부드럽게 몸을 움직였다. 아들이 내게도 나가서 춤을 추라고 권했지만, ‘춤’의 ‘ㅊ’ 자만 들어도 어색해지는 나는 손사래를 치며 뒤로 물러섰다. 남편 역시 얌전히 테이블에 기대앉아 음료만 마실 뿐이었다.


​그때, 갑자기 신나는 '마카레나(Macarena)'가 울려 퍼졌다. 진행자는 모든 사람을 중앙으로 이끌었고, 사람들은 둥글게 원을 그리며 손을 뻗고 올리는 특유의 안무를 시작했다.


90년대판 '강남스타일'이라 할 만한, 스페인 그룹 로스 델 리오(Los Del Rio)의 메가 히트곡이었다. 알고 보면 가사는 조금 자극적이다. 마카레나라는 여성이 남자친구를 두고 다른 남자들과 바람을 피우는 내용이니 말이다.


​“마카레나, 네 몸에 기쁨을 주어라. 네 몸은 기쁨과 좋은 것을 누리기 위한 것이니까. 마카레나, 네 몸에 기쁨을 주어라. 에~ 마카레나!”


​나는 구석으로 밀려난 테이블 틈새로 쏙 숨어버렸고, 어느새 남편과 아들은 무대 한가운데로 나가 춤을 추고 있었다.
​모두의 흥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남편과 아들도 군중과 완벽하게 하나가 되었다. 남편은 너무나 행복해 보였다. 나는 남편의 그런 모습이 너무나도 낯설었다.


'아니, 저 넘치는 끼를 그동안 어떻게 참고 살았대?'


놀라움과 충격이 동시에 밀려와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졌다. 내가 남편의 이런 면을 전혀 모르고 살았다니, 묘한 기분이 들었다.


​나중에 슬쩍 물어보니, 남편은 결혼 전에 회사 여직원들과 봉사활동을 갈 때마다 기타를 메고 노래를 부르며 분위기를 리드하던 '골목대장'이었다고 한다. 오래된 사진 속에서 그 장면을 한번 본 기억이 났다.


결혼 후에는 그런 모습을 보여줄 기회조차 없었던 것이다. 날개를 접은 채, 그저 한 여자의 남편으로, 두 아이의 아빠로 묵묵히 희생하며 살아온 세월이었다.


​신혼 시절, 남편이 기타를 치며 불러주던 "송학사"라는 노래를 참 좋아했다. 나는 수시로 그 노래를 불러달라고 조르곤 했다. 얼마 전 문득 생각이 나 다시 불러달라고 청했는데, 애석하게도 그때 그 목소리가 아니었다.
오랫동안 연주하지 않아 녹이 슨 악기처럼, 그의 목소리도 세월의 먼지가 쌓여 있었다.


​우리는 결혼과 동시에 화려했던 젊은 날의 재능과 열정을 상자 속에 접어두고, 오로지 배우자와 자식을 위해 앞만 보고 바쁘게 달려온 것이리라.


​하와이에서 돌아온 뒤, 남편은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차분하고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왔다. 마치 그날 밤의 화려한 스텝이 한바탕 꿈이었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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