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에도 못 잊을 친구야
목포로 여행을 떠나기 전에 다른 친구와 커피숍에 있는데 구석진 자리에 앉아있던 대여섯 명의 검정 잠바를 입은 꾀죄죄한 남자애들이 우릴 자꾸 쳐다봤다.
그리고 그중의 한 명이 다가와 같이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고 나에게 말했다.
나는 괜찮다고 말했고 그들은 멋쩍은 듯 하더니 잠시 후 커피숍을 나갔다. 그들이 나가자마자 내 친구가 나에게 말했다.
"야 쟤들 다 서울대학교 학생이야"
나는 서울대학교 배지도 본 적도 없었지만 친구는 그걸 알고 있었다. 사람을 겉만 보고 판단하는 나의 무지함이여...
그런데 열몇 명쯤 되어 보이는 서울대 졸업반 학생들은 하나같이 인물도 훤칠하고 좋았다.
하지만 내 친구에게 가장 적극적으로 다가왔던 그 남학생은 이내 커다란 실망감을 안고 돌아서야 했다.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두 사람이 같은 동성동본이었던 것이다.
지금에야 법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지만, 그 시절에는 결혼은커녕 교제조차 불가능하게 여겨지던 엄격한 시대였다.
그렇게 허탈한 얼굴로 물러서는가 싶던 그 남학생은, 방향을 틀어 나에게 대시를 하기 시작했다. 친구들이 옆에서 “둘 다 좋다는 거냐?”라며 짓궂게 놀려대기도 했다. 내 친구 그녀도 저 학생 진짜 괜찮아 보인다며 거들었다.
부산에 집이 있다는 그는 집안도 대단하고 청춘의 패기가 넘치는 매력적인 남자였다. 하지만 그릇이 작은 나는 결국 한계를 느껴 그의 마음을 받아주지 못했다.
생각지도 못했던 깜짝 서프라이즈 같았던 만남 덕분에, 우리의 목포 여행은 청춘의 낭만과 추억을 다 갖춘 완벽한 여행이 되었다.
그로부터 몇 달 후, 이번에는 그 친구와 함께 강원도에서 군 복무 중이던 나의 오빠를 면회하러 갔다. 역시 허름하고 무서운 모텔에서 부실해 보이는 문짝을 바라보며 밤을 지새웠다. 이튿날 두 어린 여자가 군대 사무실에 들어서며, 우리는 그야말로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오빠도 아주 행복해 보였다.
그날의 후유증은 오빠가 제대할 때까지 꽤 오래갔다. 군인들이 휴가를 나올 때마다 내게 계속 연락을 해왔던 것이다. 나는 오빠의 군 생활을 위해 얼굴도 잘 모르는 군인들을 번갈아 만나 커피를 마셔 줘야만 했다. 그 만남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말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우리 오빠 좀 잘 부탁합니다.”
그 후로도 우리는 늘 붙어 다녔다. “우리 대학에 가자” 누가 먼저 말했는지 모르지만 우리는 회사와 가까운 서울보건전문대학에 나란히 입학해, 언제나 맨 앞줄에 앉아 악바리처럼 수업을 들었다.
가끔 교수가 사정이 생겨 휴강이라도 하는 날에는, 아이처럼 신이 나서 학교 근처 분식집으로 달려가 함께 라면을 사 먹곤 했다.
회사 일이 끝나고 야간에 대학을 다니는 고단한 일과였지만, 그녀가 곁에 있었기에 그리 힘든 줄 몰랐다. 그녀와 함께라면 세상 그 어떤 것도 두렵지 않았다.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그렇게 서로에게 온전히 의지하는 존재가 되어 있었다.
어느 날은 사내 배당주가 나왔다며, 그녀는 자신의 이름으로 주식을 싸게 구입할 수 있는 지분을 얼마간 나에게 사게해 주기도 했다. 훗날 내가 결혼할 때쯤 그 주식은 거짓말처럼 두 배가 넘게 올랐고, 나는 그것을 팔아 요긴하게 혼수를 장만했다. 만약 팔지 않고 지금까지 가지고 있었다면 아주 큰돈이 되었을 테지만, 그 시절엔 그 주식이 내 결혼의 가장 든든한 밑천이 되어주었다.
대학에 다닌 지 얼마 되지 않아 나는 지금의 남편을 만났다. 결혼과 동시에 결국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휴학계를 던졌지만, 그녀는 끈기 있게 학업을 이어가 끝내 졸업장을 손에 쥐었다.
내가 결혼하고 몇 년이 지난 후, 그녀도 마침내 좋은 사람을 만나 결혼했다. 그리고 남편의 늦은 유학 길을 따라 미국으로 떠나 그녀의 고생길이 시작되면서, 우리의 긴 이별이 시작되었다.
그녀의 남편이 박사 학위를 따기까지 걸린 8년의 세월이 흐른 뒤에야 그녀는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야속하게도, 그녀가 귀국하고 딱 한 달 뒤에 이민을 말리는 그녀를 뒤로하고 나는 캐나다로 이민을 떠나게 되었다.
미국에서 가져왔다던 귀한 기계로 그녀가 정성껏 내려준 따뜻한 라테 한 잔. 그녀의 집 거실에서 마셨던 그 커피가, 우리의 마지막 만남이 되고 말았다.
캐나다로 이민을 온 초기에는 몇 번 전화를 주고받기도 했다. 그러나 낯선 타국 땅에서 이사를 거듭하는 와중에, 그녀의 연락처와 그녀 언니의 번호까지 꼼꼼히 적어두었던 소중한 수첩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온 집안을 아무리 뒤져도 수첩은 보이지 않았다.
내가 이사를 하며 내 전화번호마저 바뀌어버린 탓에, 이제는 서로를 찾을 수 있는 모든 방법이 끊어져 버렸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SNS에 이름을 몇 번이고 검색해 보았지만 끝내 찾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그녀는 이제 나만의 ‘줄리아’.
꿈에서도 잊을 수 없는, 가슴속에 영원히 살아 숨 쉬는 보석 같은 사람이 되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