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배려가 남긴 길

by개울건너

몇 해 전이던가.

다니고 있던 문예창작 교실에 한 젊은 문우가 들어왔다.

그녀의 외모는 단정했고 조용했고, 부모에게서 바른 교육을 받고 자랐을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녀가 복도를 걸을 때 살짝 나팔인 바지의 아랫단과 신발사이의 단정함도 마음에 들어왔다.

몇 주가 지난 후,

그날도 내가 써온 글을 돌리며 그녀의 바카라상 위에도 놓아주자 그녀가 말했다. “선생님 글이 너무 좋아요.”

나는 대답했다.

“감사합니다.”

서로의 그 한 마디로 우린 가까워졌다. 어느 날은 해외여행에서 사 왔다는 작은 손거울을 그녀에게서 선물로 받기도 했다.

나의 어느 한 작품 낭독이 끝나자 모두 앉아서 손뼉을 치는데 그녀는 감동하며 일어나 손뼉을 오래 쳤다.


나도 그녀에게 무언가를 주고 싶었다. 어느 수업 일에 수업 장소로 가는 길 지하철역에서 조금 일찍 만나 내가 만든 밑반찬을 그녀에게 건넸다. 다른 문우들의 눈을 피하기 위함이었다.

젊은 사람 앞에서 나이가 더 많은 사람은 행동이 늘 조심스럽다.

나의 아이 혼사가 가까워졌다.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은 그녀에게 청첩장을 내미는 것이 민망해 배려 차원에서 그녀에겐 얘기하지 않았다.

만난 지 오래된 문우들에게만 얘기해 그 문우들이 결혼식에 참석했다.

그 소식을 나중에 알게 된 그녀가 어머, 하며 당황해하는 표정을 설핏 보았다.

다음 해에 나는 그곳을 떠났고 그녀는 2년 정도 더 다니다가 떠났다.



또 여러 해가 지났다.

우리가 서로 소식을 주고받은 지도 꽤 오래되었다.


그 사이에 그녀는 멀리 이사 갔다는 소식을 다른 옛 문우에게서 들었다.



나는 가끔 생각했다. 그때 막내였던 그녀, 그 교실에서 아직 가까운 사람이 나밖에 없던 그녀에게 혼사 얘기를 하지 않은 게 옳았일까. 나의 배려가 그녀에겐 오히려 소외감을 준 건 아니었을까.

밑반찬을 할 때 가끔 그녀를 생각했다.

우리 인연은 이제 끝이 난 걸까?




나의 바카라이 출간되었다.

아주 오랜만에 그녀에게 문자로 출간 소식을 알렸다.

그녀가 답을 보내왔다. 깜짝 반가워 뺑글 뺑글 돌며 엉덩이춤을 추고 엄지척! 하는 이모티콘과 함께.

축하드린다고, 바로 구매했노라고 구매 인증도 보내왔다.


며칠 뒤 그녀가 보낸 문자를 또 받았다.


어젯밤에 장아찌 담그려고 부추를 다듬다가 그녀에게서 온 문자를 또 받았다. 그녀가 교보문고에 올린 리뷰였다.



문예창작 교실에서 처음 만난 우리의 인연이 중간에 끊겼다가 이렇게 과분한 리뷰까지 선물 받는 인연으로 다시 이어지고 있다.

나는 먼저 담근 깻잎장아찌와 상추장아찌 매실 장아찌, 오늘 담근 부추장아찌로 감사의 답례를 준비하고 있다.

어여쁜 나의 경이샘,

고마워요!





이상하게도 이 바카라은 서두르지 않는데도 나를 끝까지 데리고 갔다.


한 장 한 장 넘기다 보니 어느새 마지막 장이었다.


앉은 자리에서 단숨에 다 읽었지만, 마음은 오래 천천히 젖어 들었다.


읽는 내내 마음이 잔잔하게 흔들렸다. 큰 사건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문장들이 조용히 내 안으로 들어왔기 때문이다.


개울건너님의 글에는 지금껏 켜켜이 쌓인 세월의 냄새가 배어 있다.


세월은 흐르는 것이 아니라 쌓이는 것이라는 문장이 유난히 오래 남았다.



정말 그렇다. 시간은 강물처럼 흘러가 사라지는 것 같지만,


사실은 사람의 말투에, 손끝에, 기억의 결에 차곡차곡 쌓인다.


이 바카라의 문장들이 꼭 그랬다.


특히 분홍빛 과수원 이야기와 시어머님, 곶감 이야기를 읽을 때


마음 한쪽이 아련해졌다. 나는 깻잎을 보면 시어머니가 떠오른다.


재래시장에서 사 온 깻잎 한 무더기를 씻고,


삼발이에 올려 한 김 찌던 순간마다 문득 시어머니의 손맛과 시간이


떠오르곤 했다.


그래서 작가님의 곶감 이야기가 남의 이야기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음식은 단순한 먹을거리가 아니라 기억을 부르는 열쇠다.


곶감 하나, 깻잎 한 장에도 한 사람의 생애와 그리움이 묻어 있다.



바카라 속에는 작가님 인생의 장면들이 조용히 펼쳐져 있었다.


작은언니의 이야기, 가족의 기억, 지나온 시간들, 그리고 삶을 바라보는


다정한 시선이 있었다.


또한 이 바카라을 읽는 일은 곳곳에 숨겨진 명언을 찾아내는 보물찾기 같았다.


‘관계는 어쩌면 깨지기 위해 있는 것’이라는 문장은 오래 곱씹게 했다.


관계는 늘 완전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어쩌면 관계란 깨지고


다시 붙으며 더 깊어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금 간 자리에 빛이 스미듯, 사람 사이의 상처에도 배움이 남는다.


‘세상은 여행하다가 머물러 배우는 학교다’ 라는 문장도 좋았다.


우리는 모두 저마다의 길을 걷고, 낯선 곳에서 머물고,


사람을 만나고, 헤어지며 배운다.


삶은 거창한 교실이 아니라 매일의 자리에서 열리는 수업이다.


그 수업 속에서 우리는 조금씩 부드러워지고, 조금씩 깊어진다.



『초록 언어로 살아가기』는 화려하게 외치는 바카라이 아니다.


조용히 곁에 앉아 말을 건네는 바카라이다. 오래 살아낸 사람만이


건넬 수 있는 문장들이 있고, 아픔을 지나온 사람만이 알아차릴 수 있는


온기가 있다. 그래서 읽고 나면 마음이 조금 순해진다.


바쁘게 달리던 걸음을 멈추고, 내 안의 오래된 기억을 한 번쯤 쓰다듬게 된다.


좋은 글은 마음에 쉼을 준다. 이 바카라은 내게 그런 바카라이었다.


초록 언어로 건네진 문장들이 오늘 내 마음에도 조용히 초록빛으로 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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