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

5화

by더블윤


“그들과 접촉한 뒤에는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노라가 물었다.

“그들의 행동에 따라 달라지겠지. 구체적인 접촉 절차까지 알려줄 수는 없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네.”
로쉬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우리의 만남이 반드시 평화롭지는 않을 거야.”

“그들이 인류에게 적대적일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노라가 다시 물었다.

“적대적이라.”
로쉬는 그 단어가 흥미롭다는 듯 천천히 되뇌었다.
“자네는 벌레 한 마리가 방 안에 들어왔다고 해서 그 벌레를 적으로 규정하나?”
“그렇지는 않죠.”
“하지만 필요하다면 죽이겠지. 미워해서가 아니라 귀찮거나 위험할 수 있다는 이유로.”

노라는 그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그들에게는 인류가 그 정도의 존재일 수 있다는 말씀이군요.”
“은하 사이를 건널 수 있는 문명이라면 우리와 같은 기준으로 사고하리라 기대해서는 안 되네. 그들이 우리를 증오할 필요도 없어. 제거에 증오가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니까.”
“그렇다면 그들이 태양계에 온 목적은 무엇입니까?”
로쉬는 창밖의 잔해를 바라보며 잠시 생각했다.
“어쩌면 개미집이 예상보다 커졌다고 판단한 것일 수도 있겠지.”
“네?”
“아니야, 노라. 방금 한 말은 잊게. 그냥… 아무것도 아니야.”

그는 고개를 떨구고는 잠시 머리를 저었다. 희미한 조명 아래, 그의 얼굴에 엷은 미소가 스치듯 지나갔다.
함장실엔 잠시 고요한 침묵이 흘렀다.

“왜 이 모든 것을 제게 알려주는 거죠?”
노라의 물음 뒤로 잠시 침묵이 흘렀다.

로쉬는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창밖에는 태양빛을 받은 수성의 잔해들이 느리게 부유하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 그것들을 죽은 행성의 흔적이라고만 생각했지만, 이제는 오래된 만남을 위해 마련된 무대처럼 보였다.

“이유는 간단하네.”
로쉬가 식어가는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자네가 그들의 흔적을 처음 발견했기 때문이지. 원본 영상을 확인하고 보고서를 작성한 사람도 자네고. 앞으로 비슷한 현상이 나타난다면 자네의 관측과 판단이 필요할 수도 있어.”
“그래도...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무엇이 말인가?”
“제게 알려주신 정보의 양입니다. 외계 문명의 존재뿐만 아니라 코라의 실제 임무까지 말씀하셨습니다. 단순히 영상을 발견했다는 이유만으로 공개할 내용은 아닌 것 같습니다.”

로쉬는 머그잔을 내려놓았다.
“어차피 이 함선에 탑승한 사람이라면 결국 알게 될 비밀이네.”
“모든 승무원에게 알려주실 생각입니까?”
“그들이 모습을 드러낸다면 숨길 수 없을 테니까.”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러나 노라는 여전히 납득하지 못했다. 언젠가 모두 알게 될 사실과 지금 자신만 따로 불려 와 들어야 하는 비밀은 같은 것이 아니었다.

그런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로쉬가 덧붙였다.
“물론 그것이 전부는 아니네.”
그는 소파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이번 항해의 승무원 명단은 내가 직접 검토했네. 자네의 이름도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지.”

“저를 말입니까?”
노라의 물음에 로쉬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노라를 바라보며 작게 웃었다.
“자네의 경력을 살펴봤네. 연구 실적도 나쁘지 않았지만, 논문 하나가 특히 흥미로웠어.”
“어떤 논문말입니까?”
“「코어리움 의존 문명의 지속 가능성에 관한 연구」”

노라는 무릎 위에 올려둔 손에 힘을 주었다. 학위 과정 말기에 제출한 논문이었다. 수성 붕괴 당시 공개된 채굴 기록과 공명파 자료를 재구성해, 제9 구역에서 시작된 붕괴가 어떻게 행성 전체로 확산했는지를 분석한 연구였다.

로쉬는 논문의 한 구절을 외우듯 천천히 말했다.
“‘수성은 과학기술의 발전 때문에 파괴된 것이 아니다. 문명의 규모가 그것을 통제할 과학기술의 수준을 넘어섰기 때문에 파괴되었다.’”

노라는 그것이 자신이 썼던 문장이라는 것을 바로 알아차렸다.
“당시에는 코어리움 공명을 국지적인 현상으로만 이해했습니다. 각 채굴 구역의 안전 기준도 독립적으로 설정되어 있었고요. 제9구역의 주파수가 주변 채굴망과 일치했을 때, 어느 기관도 행성 전체의 연쇄 공명을 예측하지 못했습니다.”
“더 정확한 관측 장비와 통합된 제어 체계가 있었다면?”
“초기 단계에서 채굴을 중단할 수 있었을 겁니다. 공명파를 분산하거나 구역 사이의 연결을 차단했을 가능성도 있고요.”
“그렇다면 수성 붕괴는 피할 수 있었던 사건이군.”

노라는 반박하지 않았다. 그 또한 논문을 쓰는 동안 같은 결론에 도달했다. 수성 붕괴는 자연재해가 아니었다. 충분히 알지 못한 채 구축한 거대한 시스템이, 인간의 예측 범위를 넘어선 결과였다.

로쉬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들은 저 수성의 잔해를 보며, 인간이 기술을 지나치게 발전시킨 대가라고 말하곤 하지. 하지만 실상은 반대야. 우리는 너무 멀리 나아간 것이 아니라, 충분히 멀리 나아가지 못했네.”
그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우리는 코어리움을 발견함으로써 멸망의 문턱에서 살아남았어. 화성을 개척했고, 금성 궤도에 도시를 건설했으며, 이전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규모의 문명을 이루었지. 만약 그 발전이 없었다면 지금의 인류도 존재하지 않았을 걸세.”

그 말은 노라의 아버지가 오랫동안 품어왔던 생각과 닮아 있었다.
과학기술의 발전은 인류를 구원했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실패와 희생이 뒤따랐지만, 그 성취를 부정하는 것은 결국 그 힘으로 살아남은 수많은 인간의 삶을 부정하는 일과 다르지 않았다.

“그 점에서는 저도 동의합니다.”
노라의 대답에 로쉬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역시 그럴 줄 알았네.”
“하지만 기술적 미성숙만이 원인은 아니었습니다.”
로쉬의 미소가 조금 옅어졌다.
“붕괴 이전에도 여러 채굴 구역에서 비정상적인 공명 현상이 보고됐습니다. 물론 행성 전체의 붕괴를 예측할 만한 근거는 부족했지만, 위험 신호가 없었던 것은 아니죠. 그럼에도 채굴은 계속됐습니다.”

“그렇지. 채굴을 중단했다면 화성의 에너지 공급이 심각한 위기에 처했을 테니까.”
로쉬는 머그잔을 들어 올렸다.
“자네도 논문에서 밝혔듯, 수성의 붕괴는 당시의 자료만으로는 발생 가능성이 매우 낮다고 평가되던 사건이었네. 반면 코어리움 공급을 중단했을 때 발생할 피해는 비교적 명확했지. 그렇다면 당시 바카라임자들의 선택이 반드시 잘못되었다고 할 수 있을까?”
“저도 채굴을 지속한 결정 자체가 비합리적이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위험을 모두에게 알리고, 만일의 사태에 대비할 방법을 마련했어야 한다는 겁니다.”
“위험을 공개했다면 상황이 달라졌을 거라고 생각하나?”
“적어도 시민들에게 선택할 기회는 주어졌겠죠. 에너지 소비를 줄이거나, 대체 에너지원이 마련될 때까지 불편을 감수하는 방법도 있었을 겁니다.”
“모든 사람이 기꺼이 동참했을까?”

노라는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모두가 그렇지는 않았겠죠. 하지만 많은 사람이 자신의 불편을 감수하면서까지 공동체를 위해 행동했을 거라고 믿습니다.”

로쉬가 희미하게 웃었다.
“자네는 인간의 선의를 꽤나 신뢰하는군.”
“우리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도 결국 서로의 협력 덕분 아닙니까?”
“물론이지. 하지만 공동체가 언제나 선의에 의해서만 유지되는 것은 아닐세. 자네도 알고 있겠지만, GU가 존재하는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지. 선택의 주체는 모두에게 돌아가선 안돼. 더 큰 혼란이 있을 뿐이고, 결정의 지체와 유보가 일어날 뿐이지.”

로쉬는 머그잔을 내려놓았다.
“때로는 정보의 비대칭이 필요한 법이야. 그리고 공동체의 생존을 위해 개인의 자유를 제한해야 하고, 일부의 이익을 포기하도록 강제해야 할 때도 있네. 만약 인류 전체의 존속이 걸린 문제라면 더욱 그렇겠지.”

“... 저도 질서와 제도의 필요성을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노라는 자세를 고쳐 앉았다.
“인류가 하나의 문명을 이루고 살아가기 위해서는 법과 질서, 합리적인 통치 체계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때로는 개인의 자유보다 공동체의 안전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사실도 이해합니다.”
“그렇다면 자네는 필요하다면 일부의 희생을 감수하는 결정도 내릴 수 있겠군?”
노라는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로쉬는 재촉하지 않았다. 그저 맞은편에 앉은 젊은 연구원이 어떤 결론에 도달할지 기다리고 있었다.

“...모두가 희생되는 상황을 피할 수 있다면, 저 역시 합리적인 선택을 해야겠죠.”
노라가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희생이 당연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는 이유로 그 고통까지 정당화할 수는 없으니까요.”
“그 둘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지?”
“바카라임의 문제입니다. 누군가의 희생으로 살아남았다면, 우리는 그 희생을 기억하고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때로는 자신의 이익을 포기하면서까지 말입니다.”

로쉬는 잠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이 자네 논문 마지막 부분에서 언급했던 윤리적 감수성인가?”

“네. 과학기술의 발전은 문명의 존속을 가능하게 합니다. 하지만 그 문명을 어떤 방향으로 이끌어야 하는지는 기술만으로 결정할 수 없습니다.”
노라는 잠시 숨을 골랐다.
“저는 과학적 진보와 문명의 진보가 결코 별개의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과학이 가져오는 풍요는 실제로 많은 갈등을 해결해 줄 수 있죠. 하지만 진정으로 성숙한 문명이라면, 그 풍요가 사라지는 순간에도 인간다운 모습을 잃지 않을 수 있어야 합니다.”

“인간다운 모습이라...”
로쉬가 나지막이 되뇌었다.
“타인을 배려하고, 서로를 이해하며, 자신의 이익을 양보하는 것을 말하는 건가?”
“그것도 포함됩니다. 인간은 양심과 감정을 통해 자신의 행동을 돌아볼 수 있으니까요. 저는 바로 그런 성찰과 변화가 진정한 진보의 일부라고 생각합니다.”

로쉬는 잠시 생각에 잠긴 듯 머그잔의 가장자리를 손가락으로 쓸었다.
“하지만 노라. 인간이 가진 감정이 반드시 그런 결과만을 가져오는 것은 아닐세.”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차분했다.
“사랑은 누군가를 위해 희생하도록 만들지만, 동시에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다른 사람을 희생시키도록 만들기도 하지. 두려움은 위험을 피하도록 도와주지만, 때로는 타인에 대한 불신과 적개심을 낳기도 해. 그토록 소중히 여기는 감정이 오히려 갈등의 원인이 되는 셈이지.”
로쉬는 고개를 들어 노라를 바라보았다.
“그렇다면 인간이 더 나은 존재가 되기 위해 반드시 감정에 의존해야 할 이유가 있을까? 과학과 이성은 인간이 저지른 잘못을 분석하고, 같은 실수가 반복되지 않도록 만들 수 있네. 굳이 슬픔과 후회를 경험하지 않더라도 말이야.”

노라는 미간을 좁혔다.
“함장님께서는 감정이 문명의 진보에 불필요한 요소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적어도 문명의 존속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요소라고 생각하지는 않네.”
로쉬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다.
“감정은 오랫동안 인간의 생존에 도움을 주었겠지. 하지만 과거에 유용했던 특성이 미래에도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야. 우리는 이제 본능에만 의존하지 않고도 공동체를 유지할 수 있는 기술과 제도를 갖추고 있으니까.”
그는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가볍게 두드렸다.
“생각해 보게. 만약 인간이 불필요한 욕망과 분노, 두려움에 휘둘리지 않고 언제나 합리적으로 판단할 수 있다면 어떻겠나? 개인의 감정 때문에 공동체가 분열되는 일도, 사소한 이해관계 때문에 전쟁이 벌어지는 일도 크게 줄어들겠지.”

“하지만 그런 인간이 과연 지금의 우리와 같은 인간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노라의 목소리가 조금 높아졌다.
“감정은 단순히 판단을 흐리는 장애물이 아닙니다. 우리는 누군가의 고통에 슬퍼하기 때문에 그를 돕고 싶어 하고, 잘못을 저질렀을 때 후회하기 때문에 다시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려 노력합니다.”
“그러한 판단을 감정 없이 내릴 수 있다면?”

“그게 전부는 아닙니다.”
노라는 조금 더 단호하게 말했다.
“함장님 말씀대로 감정은 때로 인간을 어리석게 만듭니다. 하지만 그 어리석음마저도 우리가 인간이기에 갖는 특성 아닙니까? 우리는 실수를 하고, 그 잘못을 후회하며, 때로는 자신이 옳다고 믿었던 것조차 의심합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조금씩 달라지는 거죠.”
그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덧붙였다.
“진보는 단순히 앞으로 나아가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때로는 멈추고 돌아보는 것이, 기술을 한 단계 더 발전시키는 것보다 중요할 수도 있습니다.”

로쉬의 입가에 머물던 미소가 사라졌다.
“성찰을 말하는 건가?”
그는 천천히 소파에 등을 기댔다.
“자네는 인간이 자신의 잘못을 돌아보고 반성한다면, 언젠가는 더 나은 존재가 될 수 있다고 믿는 모양이군.”
“저는 그렇게 믿습니다.”
“그렇다면 어째서 인간은 같은 잘못을 반복하는가?”

뜻밖의 질문에 노라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로쉬가 말을 이었다.
“지구의 역사를 돌아보게. 인간은 수없이 전쟁을 겪었고, 그때마다 평화를 약속했지. 수많은 사람이 굶주리고 죽어가는 모습을 보면서도, 자신들의 풍요를 포기하지 못했어. 그리고 마침내 지구가 죽어가는 순간까지도 서로를 혐오하고 분열했지.”
그의 목소리에 서늘한 냉소가 묻어났다.
“그들에게 양심이 없었던 것일까? 아니면 사랑과 연민을 느낄 수 없었던 것일까?”
로쉬는 고개를 저었다.
“아닐세. 그들에게도 감정은 있었어. 누구보다 사랑하는 가족이 있었고, 자신이 옳다고 믿는 신념도 있었겠지. 하지만 바로 그 신념과 감정 때문에 서로를 증오하고, 타인의 고통을 외면했던 거야.”
그는 잠시 창밖을 바라보았다.
“인간은 자신의 이익을 좇는 존재일세. 아무리 훌륭한 제도와 사상을 만들어도 그 본성까지 완전히 바꾸지는 못하지. 성찰은 그때마다 고인 물을 갈아주는 일과 같아. 잠시 맑아질 수는 있겠지만, 물은 언젠가 다시 썩기 마련이지.”
로쉬는 다시 노라에게 시선을 돌렸다.
“물을 계속 갈아주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아. 아예 고이지 않도록 새로운 길을 만들어야 하지.”

노라는 고개를 떨구었다가 다시 그를 바라보았다.
“저도 인간의 본성이 완전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영원히 반드시 같은 실수를 반복할 거라는 보장도 없잖습니까?”
그의 목소리에 조금씩 힘이 실렸다.
“첫 시도가 실패했어도 다시 도전할 수 있고, 넘어져도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지구를 잃고도 화성에서 새로운 문명을 건설할 수 있었던 것처럼요.”
“그것은 과학기술이 발전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일세.”

“물론입니다. 하지만 과학만으로 가능했던 일은 아니죠.”
노라는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누군가는 자신의 몫을 양보했을 것이고, 누군가는 다른 사람을 구하기 위해 위험을 감수했을 겁니다. 그런 선택들이 모여 지금의 문명을 이룬 것 아닙니까?”
그는 잠시 숨을 골랐다.
“우리는 아직 충분히 성숙하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한 세대가, 또 그다음 세대가 그렇게 노력한다면 언젠가는 달라질 수 있을 겁니다. 저는 인간의 본성조차 그 과정에서 조금씩 변화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노라는 말을 멈추었다가 마지막으로 덧붙였다.
“인류는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갔더라도 돌이킬 수 있어요. 그걸 가능하게 하는 것이 진정한 진보 아닐까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로쉬는 노라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에는 좀처럼 감정을 읽을 수 없었다. 그러다 문득, 낮은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하하... 자네는 아직도 그런 변화를 믿고 있군.”
그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무너진 문명을 다시 일으켜 세울 수 있고, 증오 속에서도 연대를 이뤄낼 수 있으며, 모든 인간이 서로를 이해하는 세상을 만들 수 있다고 말이지.”
그의 시선이 창밖으로 향했다.
“나도 한때는 그런 생각을 품고 살았네. 과학이 발전하고, 인류가 더 풍요로워진다면 언젠가는 모두가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으리라고 믿었지.”
로쉬는 한동안 수성의 잔해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 결과가 무엇이었나? 우리는 벌써 지구와 수성, 두 개의 행성을 잃었어. 그리고 화성이라는 새로운 고향을 얻고도 여전히 서로를 혐오하고 분열하고 있지.”
그의 목소리가 조금 낮아졌다.
“인간은 변하지 않았네, 노라. 우리가 만들어낸 세상이 달라졌을 뿐이야.”

노라는 그의 말에 반박하려 했지만, 로쉬가 먼저 고개를 돌렸다.
“자넨 아직 어려.”
조금 전까지 학문적인 토론을 나누던 그의 눈빛이 어느새 엄격한 스승의 그것으로 바뀌어 있었다.
“내가 자네를 잘못 본 모양이군. 명석한 연구자라고 생각했는데, 이토록 지독한 이상주의자였을 줄이야.”
그는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조금은 성숙해지게. 현실과 이상을 구분할 줄 알아야지. 아이들은 장난감 가게에 있는 모든 것을 갖고 싶어 하지만, 세상이 언제나 자신이 원하는 것을 허락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아.”
로쉬는 노라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인류도 마찬가지일세. 모든 사람을 구하고 싶다는 바람만으로 모두를 구할 수는 없어. 자네는 그것을 이해할 만큼 충분히 명석하면서도, 정작 받아들이려 하지는 않는군.”

그 순간, 노라는 참기 어려운 불쾌감을 느꼈다. 자신의 생각이 지나치게 이상적일 수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로쉬는 처음부터 인간이 달라질 수 있다는 가능성 자체를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마치 인간의 모든 노력과 성찰이 결국 아무런 의미도 없는 일이라고 단정하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함장님은 인류의 미래에 대해 어떤 해결바카라을 갖고 계십니까?”
생각보다 날카로운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인간이 그렇게도 어리석고, 그 본성조차 변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신다면... 계속해서 비관만 하실 게 아니라 분명한 대안을 제시해 보시지 말입니다.”

말을 마친 순간, 노라는 자신의 경솔함을 깨달았다. 눈앞의 상대는 인류를 대표하는 과학자이자, 자신이 탑승한 탐사선의 함장이었다. 그에게 이렇게 무례하게 대들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지나친 언행이었다.
그러나 이미 내뱉은 말을 주워 담을 수는 없었고, 로쉬는 예상외로 차분한 표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는 그저 노라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천천히 시선을 내렸다. 조금 전까지 이어지던 집요한 반박도, 냉소적인 웃음도 더는 없었다. 그 침묵이 오히려 노라를 더욱 불편하게 만들었다.

한참 뒤, 로쉬가 불쑥 한쪽 벽면을 가리켰다.
“저 그림을 보게, 노라.”

그가 가리킨 곳에는 커다란 액자 하나가 걸려 있었다. 짙은 어둠을 배경으로 눈부신 빛이 사방으로 뻗어 나가는 그림이었다. 중심부에서는 순백의 광휘가 폭발하듯 솟구쳤고, 그 주위로 금빛과 붉은빛, 푸른빛의 입자들이 소용돌이치며 퍼져 나가고 있었다. 무질서하게 흩어지는 듯한 빛의 흐름 속에는 희미한 성운과 별의 형상들이 숨어 있었다. 마치 하나의 순간 안에 우주의 탄생과 수십억 년의 세월을 함께 담아낸 듯한 회화였다.


노라는 그림을 잠시 바라보았다.
“……빅뱅을 형상화한 작품 같군요."


“그렇네.”
로쉬가 조용히 대답했다.
“사람들은 저 그림을 보며 폭발을 떠올리곤 하지. 모든 것이 한순간에 흩어지고, 이전에 존재하던 질서가 무너져 내리는 광경 말일세.”
그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그림 앞으로 걸어갔다.
“하지만 빅뱅은 단순한 파괴가 아니야. 그 순간부터 새로운 공간과 시간이 펼쳐졌고, 수많은 별과 은하가 태어났지. 우리가 살아가는 이 우주 역시 그 시작으로부터 비롯되었어.”
로쉬는 한동안 말없이 그림을 올려다보았다.

“어쩌면 새로운 질서의 탄생에는, 우리가 미처 이해하지 못하는 변화가 필요한 것일지도 모르지.”
그의 목소리는 낮고 평온했다.

노라는 그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인류 문명의 미래를 이야기하다가 갑자기 우주의 탄생을 꺼낸 이유도 알 수 없었다.
그저 자신이 제기했던 질문에 대한 명확한 대답을 피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 뿐이었다.

로쉬는 더 이상 설명하지 않았다.
“시간이 꽤 지났군.”
그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얼굴에는 언제 그랬냐는 듯 온화한 미소가 돌아와 있었다.
“이만 돌아가 보게. 자네와의 대화는 꽤 흥미로웠어.”

“……알겠습니다, 함장님.”
노라는 자리에서 일어나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오늘은 제 언행이 지나쳤습니다. 죄송합니다.”

“괜찮네.”
로쉬가 짧게 웃었다.
“학문적인 토론에서 서로 다른 의견을 갖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야. 오히려 자네가 어떤 생각을 품고 있는지 조금은 알게 된 것 같아.”
그는 출입문 쪽으로 손짓했다.
“앞으로도 계속 지켜보도록 하지.”

노라는 다시 한번 인사한 뒤 출입문으로 걸어갔다.
문이 열리려던 순간 로쉬는 낮은 목소리로 나지막이 말했다.

“소년이여, 꿈을 꾸게. 절망의 소용돌이 안에서 하얀빛의 꿈을 꾸는 그대는,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이상에서 죽은 듯한 안식을 누리게 될 걸세.”

노라는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 말이 자신을 향한 충고인지, 조롱인지, 아니면 어떤 오래된 시구를 읊은 것인지조차 분명하지 않았다.
한동안 머뭇거리던 노라는 결국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숙였다. 그렇게 함장실의 문이 닫혔다.




숙소로 돌아온 노라는 그대로 침대 위에 몸을 던졌다. 희미한 천장 조명이 눈앞에 들어왔다. 익숙한 환기장치의 구동음과 멀리서 들려오는 선체의 진동이 방 안의 고요를 채우고 있었다.
긴장이 풀리자 육체의 피로보다 정신적인 혼란이 먼저 밀려왔다. 로쉬와 나누었던 대화가 머릿속에서 좀처럼 떠나지 않았다. 과학의 진보와 문명의 존속, 인간의 본성과 감정, 그리고 그것들이 만들어내는 끝없는 갈등.
로쉬의 주장이 전부 틀렸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가 제시했던 몇 가지 논리에는 충분히 동의할 수 있었다. 인간이 언제나 합리적으로 판단하지는 않으며, 감정 때문에 돌이킬 수 없는 잘못을 저지른다는 사실도 부정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어딘가 불편했다. 그는 마치 인간의 불완전함을 하나의 결함으로 규정하고, 그것을 제거하는 것만이 진보의 유일한 방향이라고 믿는 사람 같았다.

노라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렇다면 인간은 무엇을 위해 진보하는 것일까. 더 오래 살아남기 위해서일까. 더 많은 것을 소유하고, 더 거대한 문명을 이루고, 언젠가는 우주의 끝까지 도달하기 위해서일까. 그러한 성취가 인간 개개인의 삶과 무관하다면, 그 진보에는 도대체 어떤 의미가 남는 것일까.

노라는 어린 시절 아버지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과학은 인간을 구원할 수 있다고 했다. 인간이 스스로의 한계를 넘어설 수 있도록 도와주고, 이전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새로운 세계를 열어준다고 했다.
그리고 어머니는 늘 다른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세상이 아무리 변하더라도 사람은 서로를 사랑하며 살아가야 한다고. 자신보다 약한 사람에게 손을 내밀 줄 알아야 하고, 누군가의 고통 앞에서 함부로 눈을 돌려서는 안 된다고.
노라는 두 사람의 가르침이 서로 모순된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오히려 그 두 가지가 함께 존재할 때 비로소 인간은 더 나은 미래로 나아갈 수 있다고 믿어왔다.

노라는 옆으로 몸을 돌렸다. 함장실에서 보았던 그림이 떠올랐다.
눈부시게 폭발하던 순백의 빛. 그 주변으로 흩어지던 수많은 입자들. 모든 것이 무너지는 듯한 혼돈 속에서 새롭게 태어나던 별과 은하의 모습.
그리고 그 앞에서 로쉬가 했던 말.

'새로운 질서의 탄생에는, 우리가 미처 이해하지 못하는 변화가 필요한 것일지도 모르지.'

그것이 그의 대답이었을까. 노라는 아무리 생각해도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없었다.
다만 마지막에 들었던 말만큼은 이상하리만치 선명하게 기억에 남아 있었다.

'소년이여, 꿈을 꾸게. 절망의 소용돌이 안에서 하얀빛의 꿈을 꾸는 그대는,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이상에서 죽은 듯한 안식을 누리게 될 걸세.'

노라는 저주 같지도, 그렇다고 따뜻한 위로나 격려의 말도 아닌 것 같은 그 말을 떠올리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