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노라...」
어딘가 멀리서 나지막한 음성이 들려왔다. 그 부드러운 목소리는 처음 들어보는 여성의 음성이었지만, 왠지 낯설지만은 않았다.
「노라...!」
이번에는 좀 더 분명하게 그 음성이 들렸다.
그와 동시에 비현실적인 풍경이 펼쳐졌다. 찬란하게 펼쳐진 초록빛 들판. 그 위를 수놓은 형형색색의 꽃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하나의 점이 되어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빛이 들판을 집어삼키는 순간, 그 위로 다른 목소리가 겹쳤다.
"일어나, 노라! 아침이야!"
침대에 누워 있던 남성이 화들짝 눈을 떴다. 낯선 목소리는 사라지고, 익숙한 알람 소리만이 방 안을 울리고 있었다.
힘겹게 몸을 일으킨 그는 그 자리에서 한참 동안 멍하니 앉아 있었다. 조금 전 꾸었던 꿈 때문인지, 아니면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인 탓인지, 몽롱한 눈으로 아직 어둡기만 한 허공을 응시했다.
방 안은 사람이 생활하는 공간이라기에는 너무나도 휑했다. 각종 집기는 상자 안에 정돈된 채 방 한쪽 구석에 쌓여 있었고, 앤티크한 디자인의 스탠드가 놓인 바카라상 위에는 가지런히 개어 둔 외출복과 손목시계 모양의 작은 단말기만 남아 있었다.
그가 침대에서 일어나자 방 안의 조명이 천천히 밝아졌다. 은은한 주광색 빛이 방 안을 채우면서 헝클어진 머리를 한 모습이 조금씩 드러났다. 그는 이마 위로 아무렇게나 흘러내린 검은 머리카락을 손으로 쓸어 넘겼다. 창백한 얼굴은 전체적으로 가늘고 단정했지만,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한 듯 검은 눈동자 아래에는 옅은 그늘이 내려앉아 있었다.
그가 말없이 외출 준비를 시작했다. 샤워를 마치고 외출복으로 갈아입은 뒤, 손목시계처럼 생긴 단말기를 손목 위에 올려놓았다. 스트랩이 저절로 길이를 조절하며 그의 손목을 감쌌다. 그가 무언가를 점검하듯 단말기를 조작하자 홀로그램 하나가 떠올랐다. 그의 이름과 보직이 적힌 승조원증이었다.
노라 그린비.
탐사선 코라 기능통제실 탐사운용담당.
“노라.”
노라가 잠시 멍하니 홀로그램 화면만 바라보고 있자, 단말기에서 다시 그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응? 알았어. 이제 출발할 거야.”
노라는 그렇게 대답한 뒤 캐리어를 끌고 냉장고 앞에 멈춰 섰다.
냉장고 문을 열자 차가운 냉기와 함께 옅은 수증기가 피어올랐다. 텅 빈 냉장고 안에는 수분과 열량을 보충할 수 있는 튜브형 젤 식량 하나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노라는 뚜껑을 열어 내용물을 쭉 빨아먹으며 현관으로 향했다. 그가 가까이 다가가자 낡은 슬라이드식 철문이 기긱거리는 쇳소리를 내며 열렸다. 열린 문틈으로 어스름한 새벽빛이 스며들더니, 이내 그의 시야를 가득 채웠다.
그러나 그것은 진짜 태양이 비춘 새벽빛이 아니었다. 천장에 길게 늘어선 인공조명이 만들어 낸 빛이었다. 자연광을 닮은 희미한 광채가 오르비트의 아침 풍경을 서서히 드러내고 있었다.
노라는 문밖으로 나와 주변을 둘러보았다. 주거 구역을 가로지르는 도로가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양쪽으로 길게 뻗어 있었다. 가까운 곳에서는 평범한 거리처럼 보였지만, 시선을 멀리 보낼수록 바닥은 조금씩 위로 솟아올랐다. 도로와 건물, 가로수와 공중의 선로가 모두 같은 곡면을 따라 기울어지다가 희뿌연 인공 대기 너머로 사라졌다. 이곳이 거대한 원환의 안쪽이라는 사실은 그렇게 먼 풍경을 바라볼 때에야 비로소 실감할 수 있었다.
머리 위에는 하늘 대신 거주환의 안쪽 벽이 펼쳐져 있었다. 천장을 따라 길게 이어진 인공 조명대가 희고 부드러운 빛을 뿌렸고, 그 아래로 화물 드론들이 정해진 항로를 따라 움직였다.
아침 거리를 걷는 사람들은 그 풍경에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아이들은 공원으로 달려갔고, 상점들은 하나둘 문을 열었으며, 자기부상열차는 정해진 시각에 맞춰 곡선 너머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거대한 금속 고리도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그저 평범한 삶의 일부였다.
반듯하게 깔린 보도블록을 따라 걷던 중, 멀리서 운동복 차림의 남녀가 나란히 조깅하는 모습이 보였다. 타는 듯한 붉은 머리를 가진 두 사람은 점점 노라에게 가까워지더니, 그를 발견하고는 손을 흔들며 밝게 미소 지었다. 아직 거리가 꽤 남아 있었지만, 노라도 그들이 누구인지 알아보고 한 손을 들어 보였다.
“아, 노라! 조금 늦게 나온 거 아냐?”
붉은 머리의 남성이 다가오며 조금 숨이 찬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 아직 여유 있어. 너희 집에 들를 시간도 남아 있었는데, 이렇게 만났으니 따로 인사하러 갈 필요는 없겠네.”
노라가 대답했다.
노라 앞에 멈춰 선 붉은 머리의 남자는 휴고였다. 그는 목에 두른 수건으로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아냈다. 누가 보아도 또렷한 이목구비를 가진 휴고는 젊은 배우를 떠올리게 하는 외모였지만, 오르비트에서는 물류 사업을 성공시킨 젊은 사업가로 더 잘 알려져 있었다.
“내 동생이 굳이 오늘 아침에는 여기서 조깅해야 한다고 해서 말이야. 벌써 네 집 근처만 열 바퀴째 돌고 있어.”
휴고가 팔꿈치로 펠리스를 툭 건드리자, 펠리스는 얼굴을 붉힌 채 그를 째려보았다.
“아, 안녕, 노라 오빠. 좋은 아침이에요.”
펠리스는 늘 그렇듯 수줍은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휴고의 여동생이었지만, 닮은 것은 붉은 머리색을 비롯한 외모뿐이었다.
“드디어 그날이네.”
휴고가 말했다.
“응.”
“언제 돌아온다고 했지?”
“정기 탐사와 채굴 기간을 합치면 2년.”
“꽤 기네. 우리 보고 싶어서 어떡하려고?”
“걱정 마. 울지는 않을게.”
세 사람 사이로 짧은 웃음이 번졌다.
“그런데… 꿈을 이룬 기분은 어때?”
휴고가 눈썹을 치켜올리며 물었다.
노라는 잠시 고개를 들어 생각에 잠겼다.
“좋지. 그런데… 생각했던 기분이랑은 좀 다르네.”
그것이 지금 노라의 솔직한 마음이었다.
분명 오래전부터 품어 온 꿈이었다. 어릴 적 아버지가 들려주던 우주와 별의 이야기는 어린 노라의 마음에 우주여행에 대한 꿈을 심어 주기에 충분했다.
노라의 아버지는 코어리움 채굴 장비를 정비하는 엔지니어였다. 성실한 노동자였던 그는 자신이 하는 일에 큰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고 노라는 기억했다.
하지만 그런 아버지 역시 언제나 별들의 세계로 나아가기를 꿈꾸었다. 고된 업무를 마치고 퇴근할 때면 그의 손에는 언제나 행성과 별들이 담긴 사진 몇 장이 들려 있었다.
그토록 우주를 동경했지만, 아버지는 끝내 자신의 꿈을 이루려 하지 않았다. 아마도 거대한 질서 속에서 자신의 자리를 지키는 것만이 인류를 존속시키는 길이라고 여겼던 것 같았다. 결국 그는 GU의 성실한 노동자로 살아가는 삶을 선택했다.
하지만 노라에게 오르비트는 너무나도 좁게만 느껴졌다. 평생 금성의 궤도에 묶인 채 똑같은 회전을 반복하기에는 그 너머로 펼쳐진 별의 바다가 너무나도 넓었다.
그런 노라에게 탐사선 코라의 정기 탐사 임무는 무척이나 매력적인 기회였다. 물론 오르비트 거주민이 코라에 탑승하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승조원의 대부분은 화성에 있는 사관학교를 졸업한 엘리트들이었고, 사관학교 출신이 아니라면 뛰어난 연구 실적이나 기술적 능력을 증명해야만 했다. 게다가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철저한 신원 조사와 사상 검증까지 거쳐야 했다.
다행히 노라는 그 좁은 기회를 붙잡을 수 있었다.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코어리움 채굴 장비 분야에서 뛰어난 기술력을 갖추고 있었고, 반물질 연구소에서 쌓은 연구 실적까지 인정받아 탑승 자격을 얻은 것이다.
결국 그는 그 기회를 마다하지 않았다. 정부가 주도하는 탐사 활동을 한다는 것은 통제된 질서 안에서 별의 바다로 나아가는 것이었다. 그것은 아버지가 지켜 온 질서를 벗어나지 않으면서도, 아버지와 자신이 품어 온 꿈을 이루는 길이었다.
그리고 오늘이 바로 그날이었다. 기쁘지 않을 리가 없었다. 그런데 막상 떠날 시간이 다가오자, 그토록 벗어나고 싶었던 오르비트의 모든 것이 전과는 다르게 보였다.
노라가 다시 휴고에게 시선을 돌리자, 휴고는 그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겨우 2년이야. 그치?”
노라는 그의 말에 희미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위험하지는 않겠죠……?”
이번에는 펠리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걱정 마, 펠리스. 수성 파편 지대 탐사는 늘 있는 일이야. 외행성으로 가는 것도 아니고.”
노라는 그녀를 안심시키려는 듯 가볍게 미소 지었다.
“그래! 노라는 숭고한 사명을 띠고 가는 거지. 예쁜 승무원이 있으면 꼭 나한테 알려 줄 의무와 함께 말이야.”
휴고가 펠리스의 어깨에 팔을 두르며 말했다. 펠리스는 기분 나쁘다는 듯 어깨를 들썩이며 오빠의 팔을 떨쳐 냈다. 노라는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그때 노라의 손목에 찬 단말기에서 ‘삐빅’ 하는 알림음이 울리며 짧은 진동이 전해졌다.
“아, 이제 가 봐야겠다. 곧 열차가 올 시간이야.”
노라는 단말기를 확인한 뒤 말했다.
“그래, 노라.”
휴고가 다시 눈을 찡긋했다.
“어서 가. ‘우린’ 잘 있을 테니까.”
그는 ‘우린’이라는 단어에 힘을 주며 다시 동생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아, 좀!”
펠리스는 짜증을 내며 휴고의 팔을 거칠게 떨쳐 냈다. 그러고는 언제 그랬냐는 듯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몸조심해요, 노라 오빠.”
그리고 아주 작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기다리고 있을게요.”
노라는 대답 대신 손을 흔들고는 몸을 돌렸다. 길을 걷다가 잠시 뒤를 돌아보니 펠리스는 휴고를 밀어내며 다시 티격태격하고 있었다. 노라는 두 사람의 모습을 잠시 더 바라보다가, 희미한 미소를 남긴 채 다시 걸음을 옮겼다.
“수다만 떨다가 열차를 놓치면 누가 바카라임질 건데?”
손목 단말기에서 조금 삐친 듯한 어린아이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직 늦지 않았잖아, 소피.”
노라가 걸음을 서두르며 말했다. 어느새 그의 앞에는 천장에 닿을 듯 높이 솟은 자기부상열차 터미널 타워가 자리하고 있었다. 노라는 타워의 승강기 앞에 서서 버튼을 누르며 말을 이었다.
“그냥…… 한동안 그들을 보지 못한다고 생각하니까 조금 아쉬워서.”
“그러면 그냥 평생 그 사람들이랑 살지 그랬어? 왜 나까지 끌고 나와?”
AI 소피가 투덜거렸다.
승강기 문이 열리자 노라는 안으로 들어서며 손목의 단말기를 내려다보았다.
“말투가 왜 그래? 시간 계획을 못 맞췄다고 삐진 거야?”
“삐지긴 무슨. 난 원래 이랬거든요?”
“확실히 삐졌네. 소피, 꼭 계획대로 움직이지 않아도 괜찮아.”
“뭐어? 그 시간 계획을 요청한 사람이 누군지 잊었어? 내가 알려 줄까?”
“됐어. 멍청한 AI 같으니. 이제 그만 말할래.”
“그 멍청한 AI를 설계한 사람이 누구더라……? 노라라는 멍—”
“음소거.”
소피의 목소리가 도중에 끊겼다. 노라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승강기 문이 다시 열렸을 때, 자기부상열차가 때맞춰 승강장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아직 이른 아침이라 열차 안에는 사람의 그림자 하나 보이지 않았다. 노라는 일부러 의자에 앉지 않고 바깥이 잘 보이는 창가에 섰다.
문이 닫히자 열차는 부드러운 기계음을 내며 빠르게 가속했다. 창밖에 보이는 승강장의 풍경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그 자리를 오르비트의 주거 구역이 채웠다. 높은 선로에서 내려다보자 주거환의 폭은 거의 한눈에 들어왔다. 지상에서는 제법 넓어 보이던 거리도 이곳에서는 거대한 금속 고리 안에 눌러 담긴 작은 도시처럼 보였다.
그때, 때마침 천장의 인공조명이 아침의 기운을 머금은 황금빛으로 변해 가고 있었다. 벽과 천장의 차가운 금속 표면도 그 빛을 받아 잠시나마 따뜻한 온기를 품었다. 부지런한 아이들은 벌써부터 작은 공원을 향해 뛰어가고 있었다. 다정히 손을 잡고 거리를 걷고 있는 연인의 모습과, 터미널로 뛰어가는 온라인 게임인의 모습, 그리고 식료품 상점의 문을 여는 사람의 모습들도 빠르게 창밖을 스쳐 지나갔다. 사람들의 삶은 계속되고 있었고, 이곳의 세상도 평소처럼 돌아가고 있었다.
한참 동안 창밖을 바라보던 노라는 선로가 서서히 위로 기울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열차가 향하는 곳에는 주거환과 중앙 허브를 연결하는 거대한 방사형 통로가 뻗어 있었다. 그 너머에는 원환의 중심을 수직으로 관통하는 중앙 허브가 자리 잡고 있었다. 오늘 노라가 향하는 곳이었다.
얼마 후 열차는 방사형 통로 안으로 들어섰다. 주거 구역의 풍경과 아침의 황금빛이 차례로 창밖에서 사라졌다.
“안녕, 오르비트.”
노라는 창문에 한 손을 댄 채 조용히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