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
어둠 속에서 희미한 빛이 떠올랐다. 처음에는 하나의 점에 불과했던 빛이 수평으로 길게 늘어나더니, 곧 여러 개의 화면으로 나뉘었다. 약간의 회색 빛을 내는 화면 위로 초록색의 문자들이 차례대로 떠올랐다.
[기록 체계 분석 완료]
[현지 언어 변환 중……]
[기록망 접속]
[기록 출처 : Global Union 통합 기록보관소]
[대상 항성계 : W-81]
스크린의 조명에 의해 희미하게 손의 실루엣이 보였다. 그리고 그 손은 신중하게 스크린 앞의 다이얼을 돌려 수많은 자료 중 하나를 메인 스크린으로 옮겼다.
《GU 통합 인류사》 제12개정판
제7장. 붕괴 이전의 지구
2055년 지구의 평균기온은 기존 기후 예측에서 제시되었던 주요 임계 수준을 넘어섰다. 이에 따라 극지방의 빙하가 빠르게 감소하고 해수면이 상승하면서 다수의 해안 도시와 저지대가 침수되었다.
이로 인해 자원과 식량, 거주지를 둘러싼 지역 간 갈등이 증가하였으며, 대규모 인구 이동과 무력분쟁도 지속적으로 발생하였다.
한편 같은 시기에는 인공지능과 자동화 기술을 기반으로 우주개발 기술이 비약적으로 발달하면서 지구 밖의 자원을 탐사하고 다른 천체에 장기 체류할 가능성도 확대되었다.
[연결 자료가 존재합니다.]
[기록 유형 : 뉴스 기사]
[발행 일자 : 2057년 6월 18일]
〈남태평양 산호초 생태계 사실상 붕괴……430여 종 절멸 추정〉
세계생태보전기구는 남태평양 주요 산호초 지대에 서식하던 생물 가운데 약 70퍼센트가 지난 20년 사이 사라졌다고 발표했다.
조사에 참여한 연구진은 현재의 추세가 이어질 경우, 남아 있는 산호초 생태계 대부분이 10년 이내에 회복 불가능한 상태에 이를 것이라고 경고했다.
(* 본 기사는 후원사의 광고 영상을 포함합니다.)
기사의 내용이 끝나자 ‘SPONSORED’라는 문구와 함께 갑자기 영상 하나가 떠올랐다. 영상 속에 나타난 한 가족은 환한 미소를 지으며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잠시 후 영상은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아이를 클로즈업했고, 차분한 음성의 내레이션이 이어졌다.
“바깥의 공기가 불안할수록, 당신의 집은 완벽해야 합니다. 아르카디아 독립형 주거 시스템. 외부 대기 차단 기능과 인공지능 온도 조절, 개인용 산소 정화 설비를 하나의 주거 공간에서 만나보십시오. 이번 달 계약 고객에게 생태 정원 모듈을 무상으로 제공합니다. 더 안전하게. 더 쾌적하게. 당신이 누려야 할 삶을 포기하지 마십시오.”
내레이션이 끝나자 영상은 창밖의 푸른 정원으로 앵글을 옮겼다. 그리고 작고 희미한 자막이 하나 떠올랐다.
‘영상 속 자연환경은 가상 이미지입니다.’
영상이 끝나자 뉴스 기사의 헤드라인이 빠르게 지나갔다.
[기록 유형 : 뉴스 기사]
[발행 일자 : 2061년 8월 2일]
〈북반구 초대형 열돔 현상……현재까지 사망자 38만 명〉
[다음 기사]
〈침몰하는 해안선……오세아니아 7개 섬 국가, 국토 포기 선언〉
[다음 기사]
〈곡물 생산량 32퍼센트 감소……식량 수출 제한국 확대〉
수많은 기록이 빠르게 화면을 스쳐 지나갔다. 그러다 하나의 문서에서 다시 화면이 멈추었다.
[문서 식별 번호 : GU-FND-2085-001]
[문서 등급 : 내부 열람]
[제목 : 전 지구 통합정부 설립 기본 헌장]
[작성 일자 : 2085년 1월 1일]
1. 공식 명칭 : Global Union(약칭 GU)
2. 설립 목적
가. 인류 문명의 존속
나. 지구 환경의 회복과 생태계 복원
다. 전 지구적 자원의 통합 관리 및 재분배
라. 모든 인류의 기본적 생존권 보장
마. 국가·민족·계층·종교에 따른 차별의 해소
3. 통치 구조
가. 세계대표의회
나. GU 총리
다. 직속 행정기관
라. 권역정부
4. 설립 이념
가. 질서와 번영
나. 조화와 공존
다. 하나의 인류
[첨부 자료가 존재합니다.]
[기록 유형 : 영상]
[기록 일자 : 2084년 11월 16일]
[제3차 인류통합회의 공식 기록]
낮은 잡음과 함께 영상이 재생되었다. 영상 속에는 수많은 사람이 거대한 회의장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서로 다른 국기와 상징이 단상 주변에 어지럽게 늘어서 있었고, 각국의 대표들은 통역 장치를 통해 쉴 새 없이 의견을 주고받았다. 고성과 항의가 오가는 가운데 한 사람이 단상 앞으로 걸어 나왔다. 그는 한동안 말없이 회의장을 바라보았다.
“이제 국가라는 이름은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의 목소리가 회의장 전체에 울려 퍼지자 웅성거리던 목소리가 조금씩 잦아들었다.
“진정한 통합을 위해 전 세계인의 뜻을 반영하는 하나의 문명을 만들어야 합니다. 이제 일부 국가의 힘이 아니라, 인류라는 이름의 거대한 문명의 힘으로 이 위기를 헤쳐나가야만 합니다.”
그는 단상 위에 놓인 여러 국가의 깃발을 돌아보았다.
“우리가 끝까지 서로의 국경을 지키려 한다면, 그 국경 안에 지킬 수 있는 땅은 아무것도 남지 않을 것입니다.”
누군가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를 보냈다. 곧 다른 사람들이 뒤따랐다. 박수 소리는 점차 커져 회의장을 가득 채웠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박수를 보낸 것은 아니었다. 일부 대표는 자리를 지켰고, 또 다른 이들은 회의장을 빠져나갔다. 영상은 그들의 뒷모습을 잠시 비추다가 끝났다.
[영상 기록 종료]
[다음 자료를 열람합니다.]
《GU 통합 인류사》 제12개정판
제8장. 하나의 정부, 나뉘어진 인류
2085년 인류 최초의 전 지구 통합정부인 GU(Global Union)가 공식적으로 출범하였다. GU는 기존 국가를 권역정부로 재편하고, 각 지역에 분산되어 있던 자원과 과학기술을 통합적으로 관리하는 정바카라을 추진하였다. 또한 기후 안정화와 생태계 회복을 목표로 산림·해양 복원, 탄소 배출 제한, 재난 지역 재건 등의 사업을 시행하였다.
그러나 일부 권역정부는 자원 관리권과 군사 지휘권을 중앙정부에 이양하는 데 반대하였으며, 기업과 자원 보유 집단도 재산권 침해와 산업 경쟁력 저하를 이유로 자원 재분배와 생태계 회복 정바카라에 반발하였다.
[연결 자료가 존재합니다.]
[기록 유형 : 대국민 연설 영상 기록물]
[기록 일자 : 2107년 3월 12일]
영상 속에는 한 노인이 앉아 있었다. GU의 문장이 새겨진 짙은 푸른색 깃발이 그의 뒤로 늘어져 있었다.
“친애하는 인류 시민 여러분.”
한동안 카메라를 응시하던 노인이 입을 열었다.
“오늘 저는 GU 총리로서, 그리고 지구에서 태어나 살아온 한 사람으로서 여러분께 무거운 소식을 전하려 합니다. 지난 22년 동안 우리는 지구를 되살리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그러나 환경복원위원회의 최종 조사 결과, 지구의 생태계는 이미 인간의 힘으로 회복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선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오늘부로 GU는 지구의 자정 실패를 공식적으로 선언합니다.”
노인은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가 다시 말했다.
“하지만 이것은 인류의 종말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의 뒤편 화면에 붉은 행성의 영상이 나타났다.
“GU는 오늘, 화성으로의 전 인류적 이주 계획을 승인했습니다. 이 계획의 이름은 ‘적색 이전’입니다. 우리는 지구를 떠날 것입니다. 그러나 인류의 역사까지 이곳에 남겨두지는 않을 것입니다. 마지막 한 사람까지…… [노이즈] ……우리는 함께 살아남을 것…… [노이즈]”
영상은 노이즈와 함께 도중에 종료되었다.
[영상 기록 종료]
[다음 자료를 열람합니다.]
《GU 통합 인류사》 제12개정판
제9장. 적색 이전
2115년 화성으로의 대규모 이주 사업인 ‘적색 이전(Red Exodus)’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사업 초기에는 화성 정착지와 생태돔을 건설·유지하는 데 필요한 과학자와 기술자, 의료인, 농업 전문가 등이 우선적인 이주 대상으로 선정되었다. 이후 화성의 거주 기반이 확장되면서 일반 시민에게도 이주 자격이 부여되었다.
이에 따라 이주 대상자의 선정 기준을 둘러싼 슬롯적 논쟁이 발생하였다. 일부에서는 인류 문명의 존속에 필요한 능력을 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한 반면, 다른 한편에서는 추첨을 통해 모든 시민에게 동등한 기회를 보장해야 한다는 의견이 제기되었다. 또한 경제력과 슬롯적 지위가 실제 이주 순서에 영향을 미쳤다는 의혹도 지속되었다.
(중략)
화성으로의 이주 인구가 급격히 증가하면서 시설의 수용 능력은 한계에 도달하였다. 새로운 생태돔과 거주 구역이 계속 건설되었으나, 산소와 식량, 물, 에너지의 공급은 인구 증가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였다.
당시 인류는 화성 정착지를 장기간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데 필요한 에너지 생산 능력을 충분히 갖추지 못한 상태였다.
[다음 자료를 열람합니다.]
[기록 유형 : 과학 조사 보고서]
[문서 식별 번호 : MER-QM-2120-17]
[작성 기관 : GU 과학기술부 수성탐사연구단]
[작성 일자 : 2120년 9월 28일]
1. 발견 개요
수성 북반구 제4 탐사 지역의 지각 표본에서 기존 물질 분류 체계에 포함되지 않는 결정성 물질을 확인하였다.
해당 물질은 극도로 높은 에너지 밀도를 가지고 있으며, 외부에서 특정한 양자 자극을 가할 경우 구성 상태가 급격하게 변화하는 특성을 보였다.
2. 명칭
코어리움(Coreium).
* 명칭은 수성 지각 깊은 곳에서 발견된 물질이라는 점과, 향후 인류 에너지 체계의 중심이 될 가능성을 고려하여 연구단 내부 합의를 통해 결정하였다.
3. 주요 특성
가. 상온 상태에서 결정 구조 유지
나. 질량 대비 극도로 높은 에너지 방출
다. 양자장 간섭에 따른 물질 상태 변화
라. 제한적인 반물질 전환 가능성
마. 특정 주파수의 공명에 대한 높은 민감성
4. 기원에 관한 가설
코어리움은 태양계 형성 초기, 태양에서 방출된 고에너지 입자와 행성 내부의 금속성 물질이 결합하면서 생성된 에너지 잔류체로 추정된다.
현재까지 수성과 금성의 지질 환경에서만 결정 상태로 존재할 가능성이 확인되었다.
5. 활용 가능성
가. 고밀도 발전 시설
나. 화성 생태돔의 대기 및 온도 유지
다. 장거리 우주선의 동력원
라. 인공중력 발생 장치
마. 반물질 생산 및 저장 기술
6. 종합 의견
코어리움의 안정적인 제어에 성공할 경우, 현재 인류가 직면한 에너지 부족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한다.
단, 공명 반응의 확산 범위와 장기적인 지질 영향은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
(충분한 추가 연구가 이루어지기 전까지 대규모 채굴과 상업적 활용을 제한할 것을 권고한다.)
해당 보고서의 마지막 문장에는 붉은 취소선이 그어져 있었다.
다이얼을 돌리던 손이 오랫동안 멈춰 있었다. 화면 속 보고서를 유심히 살펴보는 듯했다. 그러다 다이얼에 올려져 있던 손가락이 허공을 두드리자 스크린에 문자들이 나타났다.
[현지 명칭 : COREIUM]
[물질 정보 대조 중……]
[대조 완료]
[물질 구조 일치]
[대상 문명의 활용 단계 : 불안정]
[위험 등급 평가 필요]
문구가 사라지자 손은 다시 다이얼을 돌렸다. 화면이 또 바뀌었다.
[기록 유형 : 뉴스 기사]
[발행 일자 : 2126년 2월 4일]
〈화성 생태돔 에너지 공급률 98퍼센트 달성……정착 사업 새로운 전환점〉
[연결 기사]
〈GU, 수성 코어리움 대규모 채굴 사업 승인〉
GU 자원개발부는 화성의 증가하는 에너지 수요를 충족하기 위해 수성 내 18개 구역에 대한 대규모 채굴 사업을 승인했다.
이번 사업에는 총 42개의 민간 기업과 11개 권역정부가 참여하며, 향후 10년간 화성 문명 전체가 사용할 수 있는 코어리움을 확보할 수 있을 것으로 전망된다.
뉴스 기사에 이어 수많은 사진이 화면을 훑고 지나갔다. 수성의 지각을 파고드는 거대한 장비들. 쉬지 않고 움직이는 채굴 로봇들. 우주로 운반되는 푸른빛 결정체. 그리고 그 에너지로 하나둘 밝혀지는 화성의 도시들.
[관련 기밀문서가 감지되었습니다.]
[접근 중……]
[보안 체계 우회]
[문서 등급 : GU 내부 1급]
[문서 제목 : 수성 양자 공명 붕괴 사건 합동 감식 결과]
[작성 일자 : 2138년 1월 19일]
1. 개요
2137년 8월 3일 발생한 대규모 양자 공명 현상에 의한 수성 지각 전역의 동시다발적인 붕괴에 대한 합동 감식 결과임.
2. 원인
제9 채굴 구역에서 사용된 고출력 심층 굴착 장비의 진동 주파수가 지하 코어리움 결정층의 고유 공명 주파수와 일치한 것으로 판단됨.
이로 인해 발생한 에너지 방출이 인접 결정층으로 전달되면서 연쇄적인 양자 공명 붕괴가 발생함.
3. 사전 징후
사고 발생 18개월 전부터 제7·제9·제11 채굴 구역에서 기준치를 초과하는 공명파가 반복적으로 관측됨.
현장 연구진은 총 세 차례에 걸쳐 해당 구역의 채굴 중단과 정밀 조사를 요청함. [붙임 1. 제9 채굴 구역 작업 중단 요청서]
해당 요청은 최종 심의 결과 기각됨.
4. 대응 실패 원인
당시 화성 생태돔의 코어리움 비축량은 권장 기준 이하로 감소한 상태였으며, 자원개발부는 채굴 중단 시 화성 주요 거주 구역의 에너지 공급에 심각한 차질이 발생할 수 있다고 판단함. 이에 따라 현장 연구진의 요청을 기각하고 채굴량을 기존 수준으로 유지함.
5. 결과
2137년 8월 4일, 수성은 천체로서의 구조를 상실함.
[연관된 기록물을 발견하였습니다. 열람하시겠습니까?]
다이얼을 돌리자 화면에는 곧바로 다른 자료가 이어졌다.
[기록 유형 : 대국민 발표문]
[발표 일자 : 2138년 2월 1일]
GU 사고조사위원회는 수성 붕괴가 당시 기술로는 완전히 예측하기 어려웠던 코어리움의 불규칙한 양자 반응에서 비롯된 것으로 최종 결론 내렸습니다.
이번 사고로 희생된 모든 이들에게 깊은 애도를 표하는 바이며, GU는 같은 사고가 반복되지 않도록 코어리움 채굴과 활용에 관한 안전 기준을 전면적으로 재검토할 것입니다. 태양계에서 수성이라는 천체가 사라진 사실은 실로 안타까운 현실이나, 다행스럽게도 인류에게는 아직 코어리움의 채굴을 계속할 수 있는 행성이 남아 있다는 점을...
[작성 후 삭제된 기록. 원본 기록물 손상으로 인한 열람 불가]
[다음 자료를 열람합니다.]
[기록 유형 : 뉴스 기사]
[발행 일자 : 2186년 5월 20일]
〈금성 궤도 과학도시 ‘오르비트’ 건설 시작〉
GU는 금성의 코어리움 자원을 안전하게 연구하기 위한 대규모 궤도 기지 건설 사업을 공식적으로 시작했다.
오르비트는 관측 기지의 역할뿐 아니라 고위험 실험과 정밀 분석, 원격 채굴 장비의 개발이 하나의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인류 최대 규모의 궤도 과학기지가 될 것으로 전망된다.
[첨부 자료가 존재합니다.]
[기록 유형 : 현장 인터뷰]
[인터뷰 대상 : 베할라 로쉬]
[직바카라 : 오르비트 구조 설계 연구원]
화면 속에는 젊은 남성이 서 있었다. 그는 창문 너머에서 조립 중인 거대한 원형 구조물을 바라보고 있었다.
기자가 물었다.
“수성의 붕괴를 경험한 뒤에도 다시 코어리움 개발을 시작하는 것이 위험하다는 의견이 있습니다.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화면 속 젊은 남성은 잠시도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수성에서 실패했다고 해서 진보를 멈출 수는 없습니다. 수성의 문제는 인류가 너무 멀리 나아갔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나아갔다는 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인류에게 필요한 것은 막연한 두려움이 아닙니다. 정확한 계산과 통제입니다. 모든 변수를 이해하고, 모든 위험을 예측할 수 있다면 수성과 같은 비극은 다시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기자가 건설 중인 구조물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당신에게 오르비트는 어떤 곳입니까?”
남성은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새로운 가능성을 증명하는 곳입니다. 인간의 감정이나 정치적 이해관계와 상관없이, 정확한 질서에 따라 움직이는 공간. 충분한 에너지와 안정된 질서가 있다면 사람들은 더 이상 자원을 차지하기 위해 싸울 필요가 없습니다.”
그는 아주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저는 오르비트가 더 나은 인류를 위한 첫 번째 설계도가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영상 기록 종료]
[다음 자료를 열람합니다.]
《GU 통합 인류사》 제12개정판
제10장. 금성 궤도의 새로운 도시
수성 붕괴 이후 새로운 코어리움 공급원의 확보가 중요해지면서 오르비트의 기능과 규모도 확대되었다. 기존 관측 시설에 연구실과 원격 채굴 장비 개발 시설이 추가되었으며, 새로운 실험·거주 모듈이 지속적으로 건설되었다. 이에 따라 화성에서 파견되는 과학자와 기술자, 시설 관리 인력의 수도 증가하였다.
초기 파견 인력은 일정한 임무 기간을 마친 뒤 화성으로 귀환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다. 그러나 화성과 금성 사이의 장거리 이동에 필요한 시간과 비용, 화성 내 거주 공간의 부족 등으로 일부 인력의 귀환이 연기되거나 취소되었다. 장기 체류자가 증가하면서 가족 단위의 이주가 이루어졌고, 오르비트에서 태어나 성장하는 세대도 나타났다.
(중략)
GU는 오르비트의 행정 수요가 증가하자 제한적인 자치권을 부여하였다. 이에 따라 오르비트 자치정부는 교육과 의료, 주거, 지역 치안 등의 생활 행정을 독자적으로 담당하게 되었다.
현재 오르비트에는 약 5만 명의 시민이 거주하고 있다. 오르비트는 독자적인 생활·행정 체계를 갖춘 자치도시인 동시에, 금성의 코어리움을 연구하고 화성에 필요한 에너지 자원을 확보하는 과학·자원 개발 거점으로 기능하고 있다.
[기록물 열람을 중단합니다.]
[기획득 내부 정보 확인 중.]
[문명 현황 불러오는 중.]
1. 화성
인류 문명의 정치·경제·과학 중심지. 적색 이전 이후 건설된 수많은 생태돔과 거주 구역에 인류 인구의 대부분이 거주.
2. 수성
파편 지대. 양자 공명 붕괴로 형성된 고위험 지역. 일부 파편에서 제한적인 코어리움 회수 작업이 진행 중.
3. 금성 궤도
오르비트 자치구. 금성 코어리움 연구 및 원격 채굴 기술 개발 담당. 상주 인구 약 5만 명.
4. 지구
생태적 복구 불능 지역. 민간인의 접근이 제한된 행성.
5. 달(지구의 위성)
루나포트. 과학 연구 단지 밀집 및 지구 감시 시설.
[관련 기록물이 존재합니다.]
[기록물 출처 : GU 시민정보망]
<지구 접근 및 통신 제한 안내문>
1. 지구는 잔존 재난과 생물학적 오염의 위험이 존재하는 통제구역입니다.
2. 민간인의 지구 궤도 및 지표면 접근은 전면 금지되어 있습니다.
3. 지구와 연결되는 모든 우주항로는 루나포트 통제국의 사전 승인을 받아야 합니다.
4. 지구와 관련된 미확인 통신을 수신한 시민은 해당 신호를 저장하거나 재전송하지 말고 즉시 루나포트 통제국에 신고해야 합니다.
* 허가받지 않은 접근과 통신 시도는 GU 통합보안법에 따라 처벌될 수 있습니다.
시민 여러분의 안전과 인류 문명의 보호를 위한 조치이오니 적극적으로 협조해 주시기 바랍니다.
마지막 기록이 사라졌다. 새까만 화면 위에는 영롱한 푸른빛을 뿜어내는 지구의 모습만이 남았다.
[해당 천체는 인류의 고향인 동시에 생명체의 존속이 불가능한 폐허로 분류되어 있습니다.]
짧은 문구가 지나간 후 화면은 캄캄하게 암전되었다. 희미하게 보이던 기록을 열람하던 존재의 손도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대신 어둠 속에서 낮은 대화 소리가 흘러나올 뿐이었다.
“이 정도면 충분합니다.”
“그래. 출발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