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여름
그해 우리나라 대한민국은 여느 해 여름보다 더 뜨거웠다.
지구 온난화라는 구체적인 말들이 복중(腹中)의 태아로 태명(胎名)조차 없이 있었지만 그해에도 여름은 뜨거웠다.
더군다나 대구의 여름은 덥다는 표현보다 뜨겁다는 수식어가 더 어울렸다.
날씨만큼 축구의 열기도 뜨거웠다.
2002 한일 월드컵이 우리나라 곳곳에서 열리고 있었다.
사람들은 어디를 가나 빨간색 티셔츠를 입고 어디를 가나 같은 소리로 하나가 되었다.
-대~~한민국.
한국축구가 16강을 넘어 8강으로 진입하였다.
한국축구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나라전체가 축구 신드롬으로 난리였다.
그때 나는 대구에 있는 **은행 ***지점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온라인 담당 팀장이 내가 맡은 직(職)이었다.
지점으로 들어오시는 고객님들 중 상당수 남녀노소가 붉은색 티셔츠를 입고 있었고 젊고 발랄한 어리고 젊은 세대들은 귀여운 붉은 악마뿔을 머리에 얹고 있기도 하였다.
당시 우리 지점에서도 프로모션 중인 중점판매 예금 상품에 붉은 악마 티셔츠를 걸었었다.
가히 대한민국은 축구열풍으로 들끓고 있었다.
그날도 대구의 날씨는 폭염을 지나 가마솥과도 같았다.
대구의 더위는 타 지역 사람들이 붙여준 대프리카의 위력을 온도계에서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아침 최저 27도, 낮최고 37도
그날
시간은 더위의 절정이 시작되는 오전 11시를 막 넘어가고 있었다.
은행 창구는 비교적 한산하였다.
날씨 탓인지, 축구 탓인지 은행을 찾는 사람들이 그리 많지 않았다.
그저 객장의자에 앉으신 어르신 몇 분만이 더위를 피해 시원한 은행 에어컨에 몸을 맡기고 계셨다.
-팀장님!
온라인 창구 여직원 구**계장이 자신의 의자를 돌려 나를 보며 말했다.
구계장 맞은편 창구 밖에는 머리를 짧게 자른 40대 중반으로 보이는 남자고객 한 분이 서 계셨다.
그 분과 내 눈이 마주쳤다.
나를 보는 그분의 눈빛은 몹시 다급하고 애처롭게까지 보였다.
-구계장
무슨 일이야?
내 물음에 구**계장이 손에 든 예금청구서를 내게 보여주며 지금의 상황을 설명하였다.
구 계장이 내게 건넨 청구서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계좌번호 : 1234-56-789-0
금액 : 오천구백만 원정 (₩59,000,000원)
일자 : 2002년 7월 7일
성명 : 김**, 정**
지급방법은 1천만 원 수표 5매와 1백만 원 수표 9매로 지급해 달라고 청구서에 쓰여있었다.
그런데 통상 은행 예금의 예금주는 한 사람인데 구계장이 보여준 청구서에는 김**, 정**이라 두 사람의 예금주가 적혀 있었다.
공동명의예금 이었다.
공동명의예금!
대부분 사람들에게는 다소 생소한 예금일 것인데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두 사람이 각각 1억 원을 내고 2억으로 2개월 후에 부동산을 매입하자는 약속을 하였을 하고 2개월 동안 현금을 보관할 예금을 개설하게 되는데 이때 둘의 신뢰관계가 약할 때 적금(예금)의 예금주를 각각 두 사람 명의로 한다.
이 경우 예금명의도 두 사람이고 신고된 인감도 당연히 두 사람의 인감이 신고될 것이다.
이 예금을 지급할 때 은행은 상당히 주의를 기울어서 해야 한다.
지급청구서에 두 사람 이름이 적혀 있는지, 신고된 인감이 정확히 날인되어 있는지를 잘 살펴야 한다.
그런데 구계장이 내게 건넨 청구서는 얼핏 보아도 이상하였다.
다른 것들은 전부 정확히 기록되어 있었는데 오천구백만 원이라 적힌 청구금액의 기재가 정상적이지 않았다.
당초 두 사람이 작성한 청구서의 금액은 구백만 원이었는데 그 금액 앞에 '오천'이라는 첨기(添記)되어 있었고 문제는 누가 보아도 첨가된 오천이라는 필체가 처음 글씨와 완전히 달라 보였다.
거기에다 구백만 원이라고 쓴 것은 볼펜으로 쓴 것으로 보였는데 오천이라고 쓴 필기구는 굵은 사인펜으로 쓴 것처럼 보였다.
당연히 지급이 안 되는 청구서였다.
-고객님
이 청구서로는 지급이 불가합니다.
라며 내가 구계장 앞에 선 고객분께 말씀드렸다.
-이게 왜 안된다는 것입니까?
내가 알기로 은행의 요구불예금은 고객이 통장을 제시하고 청구서에 날인된 인감이 신고된 인감과 동일하고 비밀번호가 맞으면 은행은 지급해주어야 하는 것이 맞지 않나요?
남자고객은 마치 금융에 대하여 많은 지식을 가진 분처럼 말씀하셨다.
말이 빠르고 거침이 없었다.
-예, 고객님
방금 하신 고객님 말씀은 다 맞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고객님께서 방금 하신 말씀의 지급기준은 예금주가 한 사람 일 때 기준이고요.
공동명의의 예금은 지급기준이 조금 다릅니다.
라고하고 공동명의 예금 지급기준에 대하여 더 자세한 사항을 말씀드렸다.
그랬더니 그분은 이내 내 설명에 수긍을 하고 태도를 달리하셨다.
-팀장님 말씀 잘 알겠습니다.
저희가 사실 **은행에서 당좌거래를 하고 있는데 오늘이 발행한 약속어음 결제일이라 자금이 급합니다.
또 다른 예금주 김**씨는 지금 어음결제 대금을 구하러 대전으로 가셨어요.
그러니 저희 형편을 고려해서 편리 한번 봐주십시오.
만약 오늘 어음결제를 하지 못하면 저희 회사는 부도가 납니다.
그러니ㆍㆍ
그분의 눈빛이 다급하고 내 눈에는 애처롭게까지 비쳤다.
나는 옛날부터 사람을 잘 믿었다.
그것도 너무ㆍㆍ
순간 내 판단의 기준에 혼선이 생겼다.
사람 잘 믿는 내 천성 위에 내가 지금 이분께 편리를 봐드리지 않으면 회사가 부도 날 수도 있다는 현실의 위기감이 내 평정심을 가렸다.
당좌부도가 의미하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던 터이라 더더욱 그랬다.
내 눈 바로 앞에서 애처로운 눈빛으로 서 계시는 남자 고객의 답변이 내 판단에 쐐기를 박았다.
-그럼 고객님
제가 김**고객님과 전화 통화 한번 해보고 결정하겠습니다.
사실 내가 이렇게 말씀드리면 정**고객님의 말이 거짓이면 당황할 것이라 생각하고 말씀드린 것이다.
-예
그러시죠.
통화해 보십시오.
정**고객님은 한치 망설임 없이 나더러 전화를 해보라 하셨고 눈빛도 흔들리지 않았다.
은행전산에 등록된 전화번호로 김**고객님 휴대폰으로 전화를 걸었다.
018 - 123 - 4567
신호가 갔다.
다섯 번, 여섯 번, 일곱 번ㆍㆍ
신호는 계속 갔지만 김**고객님은 전화를 받지 않으셨다.
내 표정이 김**고객님이 지금 전화를 받지 않는다는 것을 눈치챈 정**고객님이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김** 사장은 아마 지금쯤 대전에 있는 상호신용금고에서 대출 신청을 하고 있을 겁니다.
그곳 신용금고 이사장이 그분 가까운 친척이 거던요.
사실 저희 회사 부동산 대부분이 대전에 있어요.
그 부동산을 담보로 대출을ㆍㆍ
순간 내 판단이 흔들렸다.
더 정확히 말하면 지금 내 앞에서 말하고 있는 정**님의 말에 신뢰가 얹혔다.
정**님의 말이 너무나도 구체적이고 흔들림이 없어 적어도 내게 거짓의 말은 하지 않을 거라는 막역한 신뢰였다.
근거 없는 신뢰였다.
-구계장
그 예금 지급해 드리세요.
내가 결재할게.
나는 지급청구서에 결재를 하였고 그 예금은 지급되었다.
물론 나는 지급을 결정하기 전에 정**고객님께 한 가지 약속을 받았다.
일단 오늘 오천구백만 원으로 **은행으로 돌아온 약속어음 결재를 해서 당좌부도를 막고 내일 두 분이 함께 내점 하셔서 정상적으로 예금지급청구서를 다시 작성해 달라는 다짐이었다.
정**님은 흔쾌히 약속을 하고 오천구백만 원을 수표로 들고 돌아가셨다.
그런데 문제는 그다음 날 일어났다.
아침에 셧터문이 올라가자마자 남자 한분이 헐레벌떡 은행 안으로 뛰어 들어오셨다.
그러더니 창구직원에게 통장을 보이면서 어제 지급된 오천구백만 원을 지급한 직원이 누구냐고 물으셨다.
목소리가 갈라지고 탁하였다.
구계장이 나를 보며 SOS의 눈빛을 보냈다.
나는 짧은 순간 어제 지급한 예금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직감하였다.
일단 그분을 안으로 모셨다.
내 예상대로 그분은 어제 지급한 예금의 공동명의자 중 한 분인 김**고객님이셨다.
자초지종을 여쭈었다.
그는 자초지종보다 어제 작성된 예금청구서를 보여 달라고 하셨다.
신분을 확인하고 김**님께 어제의 청구서를 보여 드렸다.
청구서는 한눈에 봐도 이상한 어제의 그 모습 그대로 김**고객님께 보여졌고 그 청구서를 보는 순간 그분의 태도는 급변하셨다.
언성이 올라가고 올라간 언성은 갈라지고 탁했다.
-이 팀장 당신
당신 은행 팀장 맞아요?
은행에 입사할 때 뇌물로 입사한 거 아니야?
김**고객님은 나를 노려보며 앞에 놓인 탁자를 손으로 내리치셨다.
업무 준비를 하던 지점직원들 시선이 일제히 나와 그분 쪽으로 모아졌다.
내가 커피를 태워서 김**님께 드리면서 어제의 일을 설명드리려 하였으나 허사였다.
그분은 내 말을 들을 생각도 않으시고 지점장님을 만나게 해 달라고 하셨다.
마침 지점장님이 방에서 나오셨다.
김**고객님 목소리가 지점장실까지 들리셨나 보다.
나와 김**고객님
지점장실로 들어갔다.
지점장님께서 나더러 일의 자초지종을 설명해 보라 하셨다.
내가 어제의 일을 상세히 지점장님과 김**고객님께 말씀드렸다.
나는 엉성하게 작성된 청구서보다 자칫 회사에 부도가 날 뻔하였다는 것에 더 무게를 두고 어제를 설명하였다.
설명하는 나를 지점장님은 근심의 표정으로 보셨고 김**님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노려 보셨다.
지점장님이 이번에는 고객님께 청구서 작성 경위를 여쭈었다.
김**고객님은 변(辯)은 이랬다.
자신과 정**씨는 약 6개월 전에 서로 만나 아파트 재건축 사업에 투자하기로 하고 서로 얼마씩의 금액을 공동으로 출자하였는데 지금은 투자금액 거의가 해당 투자처에 정당하게 투자되었고 남은 금액 오천구백만 원에 대한 배분과 관련하여 자신(김**)과 정**간의 불협화음이 있었다고 하였다.
그랬다가 구백만 원을 정**님이 갖고 나머지 오천만 원은 자신(김**)이 가져가고 투자와 관련한 서로의 협업은 종결하기로 하고 어제 같이 마주 앉아 우선 정**씨 지분 구백만 원을 청구하는 청구서를 작성하였다고 했다.
그런데 어제 이른 저녁까지 정**씨와 연락이 닿지 않아 노심초사하였다가 저녁 늦게 연락이 되어 다그치니 **은행 ***지점에서 통장잔액 59,000,000원 전액을 인출하였다는 답변을 듣고 은행 오픈시간에 맞추어 지금 급히 왔다고 하였다.
그제 내게 애처로운 눈빛으로 사정을 말씀하시던 정**님과 지금 내 눈앞에서 벌어진 상황을 말씀하시는 김**님의 변은 달라도 너무 달라 있었다.
거기에다 김**님은 정**님이 말하였다는 **은행에서 거래하고 있다는 당좌거래도 전혀 사실무근이라고도 하셨다.
불길한 예감이 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 무언가 잘못되었다.
그것도 크게 잘못되었다.
나와 지점장님은 김**님께 지금의 상황을 알아볼 시간을 좀 달라고 하고 일단 그분을 돌려보냈다.
지점장실을 나서는 김**님의 목소리가 지점 객장 끝까지 들렸다.
-내 일단 오늘은 돌아갑니다.
내일 내가 다시 올 때까지 잘못 지급된 오천만 원을 원상복귀 시켜 놓지 않으면 나도 가만있지는 않을 겁니다.
그리 아세요.
나는 급히 어제 예금을 찾아가신 정**님께 전화를 해보았다.
받지 않으셨다.
시간을 두고 대여섯 번을 더 해보았지만 마찬가지였다.
불길한 내 예감이 확실에 가까워져 갔다.
그러다가 오후 늦게 정**님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나는 다급히 오늘 오전 일을 말씀드리고 어떻게 던 해결을 해주십사 말씀드렸다.
그러나 결자해지는 틀린 말이었다.
정**님은 분명 이 일의 결자(結者) 셨지만 해지(解之)의 뜻은 전혀 없으셨다.
-저는 사실 이팀장님께 한번 부탁드려 보고 안되면 그냥 돌아 가려하였습니다.
그리고 당연히 안된다고 하실 줄 알았어요.
그런데 의외로 쉽게ㆍㆍ
팀장님
보기보다 순진하시데요.
덕분에 오천만 원은 제 생각대로 잘 썼습니다.
고맙게 생각합니다.
그럼 바빠서 이만ㆍㆍ
전화가 끊어졌다.
20층 빌딩에서 떨어지면 이런 느낌이구나 싶어 나는 전화기를 손에 들고 한참을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상대의 딱한 사정을 살펴드린 선의가 이런 모습으로도 되돌아오는구나 싶은 마음에 숨이 막혔다.
속절없는 시간만 흘러갔다.
당연히 김**님은 다음 날 은행문이 열리기도 전에 후문으로 은행에 오셨고 그분이 말씀하신 오천만 원은 원상 복귀되지 않았다.
그 시간 이후 나의 은행생활은 지옥 그 자체였다.
5년간 그랬다.
김**님은 우선 내가 몸담은 은행 민원실에 민원을 넣고 금융감독원에도 민원서를 제출하였다.
-존경하는 금융감독원 선생님!
ㆍㆍㆍㆍㆍㆍ -> 발생한 실제 이야기
제 생각에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은 **은행 이종열팀장이 저의 동업자 정**씨에게 일정금액의 대가를 받고 처리해 준 불법의 업무처리이며ㆍㆍ
라며 나에게 대가성 돈을 받고 일을 처리해 주었다고 민원서에 썼다.
그리고 민원과 동시에 관할 경찰서에 나에게 금품수수와 배임죄 혐의를 씌워 고소까지 하였다.
나는 그때 난생처음 경찰서에 출두까지 하였다.
피고소인 신분이었다.
눈물이 났다.
지금껏 경찰서라고는 경찰공무원들을 상대로 신용카드 권유와 신용대출 권유로 몇 번 가 본 적은 있었지만 내가 조사 당사자가 되어서 갈 줄은 꿈에도 몰랐었다.
-이종열 씨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 잘 들으세요.
경찰서에서는 고소사건이 접수되면 피고소인 조사에 앞서 고소인 조사를 먼저 합니다.
그런데 팀장님을 고소한 김**씨를 조사해 본 결과 이 양반 지금 다른 사람을 고소한 것만 3건이고 자신이 고소당한 것만 5건입니다.
사기 전과도 있고요.
그러니 너무 겁먹지 말고 제가 묻는 말에 그때 상황을 사실 그대로만 진술하면 됩니다.
저는 이런 일에 닳고 닳은 사기 전과자와 순진한 은행원을 같이 조사합니다.
그러니ㆍㆍ
눈물을 글썽이는 내가 가여웠는지 그 경찰분이 사비로 자판기 음료수를 빼서 내게 주면서 말씀하셨다.
그때 그 경찰분의 고마움은 24년이 흘렀지만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얼마 후
검찰청에서 등기우편물이 집으로 배달되어 왔다.
<금품수수, 배임에 관한 건
혐의 없음>
이라 쓰여 있었다.
이 사건(?)이 검찰로까지 간 모양이었다.
얼마 후
내게 민원서를 접수받은 금융감독원 검사역한테서 전화가 왔다.
-이건은 아무리 검토를 해봐도 이팀장이 잘못 지급한 것 같으니 민원인에게 그 금액을 변상해 주고 민원을 마무리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검사역은 내가 개인돈으로 오천만 원을 김**님에게 변상을 해주고 심려를 끼친 것에 대한 사과를 하면 민원이 취소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은행 (내가 근무하고 있는 은행)도 평안해질 것이라고 하였다.
그때 시중은행은 고객이 금융감독원에 민원을 제기하고 그 민원이 타당성이 있으면 그 은행 평점에 마이너스 요인이 되는 항목이 있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