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기일에

3년을 지내며

by전지은


아직도 ‘엄마’라는 단어만 나오면 가슴이 아리다. 눈물이 고이고 목이 멘다. 오늘은 엄마의 기일. 3년의 시간, 이쯤에서는 편안해질 줄 알았다. 그러나 아직도 힘들다. 심연의 그리움은 아직도 가득하고, 혼자 있는 시간이면, ‘그때 좀 더 잘했더라면’하는 후회가 이어진다. 남들은 호상이라고 했지만, 나의 후회는 갈수록 깊어지는 것 같다. 모시고 살아보지 못했던, 아니, 시도는 해 보았지만 3개월이 고작이었다. 미국 생활은 엄마에게 힘들었고, 딸에게 짐이 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우리의 ‘함께 살기’는 완벽한 실패였다. 남편도 나도 일을 하는 상황이었고, 퇴근 후, 피곤하다는 핑계로 꼼짝을 하지 않았던 시간들. 엄마는 종일 우리 둘을 기다렸다. 기다림에 치쳤고 종일 TV만 보는 일도 무료하기만 했을 것이다. ‘이 정도 해봤으니, 됐다. 난 돌아가련다.’ 짐을 다시 꾸리는 엄마를 말리지 못했다. 돌아가는 길에, 이것이 마지막 미국행이라는 엄마의 모진 말은 오랫동안 가슴에 대 못이 되어 박혀 있었다.


나의 퇴직과 동시에 시작된 한국과 미국을 오갔던 시간. 3개월씩 오고 가며 2년여를 살았다. 동시에 엄마는 점점 쇠약해지셨고, 치매도 시작이 되었다. 요양원에 모셔 놓고 미국 집으로 돌아왔던 때는 내 일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시간이었다. 이어 코로나 사태가 터지고, 하늘길이 막혔던 시간은 그야말로 지옥이 따로 없었다. 가지도 오지도 못하는 상황 속에서, 엄마는 점점 노쇠해졌다. 다행히 요양원이라는 안전한 시설에 모셔 놓기는 했지만. 격리를 마다하지 않고 한국을 오갔던 2년의 시간도 지났고, 엄마는 하늘나라로 가셨다. 천국에서 젊은 시절의 아버지를 다시 만나, 옛이야기 나누고 계실까? 두 분이 함께 계실 것 같고, 더 이상 외롭지 않을 것 같기는 하지만…


봄비가 촉촉이 내렸다. 하늘은 더 맑아지고 길가의 가로수들도 더 푸른빛을 띤다. 앞마당의 라일락이 꽃잎을 열며 향기도 함께 올린다. 짙어가는 계절의 향기 속에서 엄마를 다시 만나러 간다. 엄마의 장례식 때 아버지의 오래된 묘소도 파묘를 했다. 봉분을 없애고 남아 있던 흔적들과 화장한 엄마를 모시고 미국으로 돌아왔다. 수녀원에서 운영하는 납골당 4개를 샀고, 거기에 두 분을 모셨다. 바로 옆에 우리 부부가 갈 장소도 미리 만들어 놓았다.


살아생전, 모시지 못했지만 이젠 바로 이웃에서 두 분이 함께 하신다. 마음이 울적할 때마다 그곳을 찾는다. 벤치에 앉아 엄마의 납골당을 바라본다. 지난 시간들은 추억의 영화처럼 무성영화가 된다. 돌아가는 필름은 직직거리며, 6살 아이였다가, 사춘기였다가, 홍제동의 좁은 골목이었다가, 벚꽃이 흐드러지게 핀 경포 호수였다가, 장대비를 뚫고 날아올랐던 김포 출국장의 비행기 안이였다가, 하늘길을 수도 없이 왔다 갔다 했던 모습들로 이어진다. 삶의 궤적들은 쉬지 않고 돌아가고, 흰 국화 한 다발 묶어, 엄마 앞에 두고 오며, 자꾸만 뒤 돌아본다.


발걸음을 잡는 시선은 향긋한 봄 이야기조차 무겁게 그곳에 남아 있다. 푸른 그림자는 한참 동안 나를, 우리를 따라오는 것 같다. 나도 어느덧 칠십이다. 세월은 또 그렇게 흘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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