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3년여 동안 거의 매일 스페인어를 공부해 왔다. 이 기간 동안 영어는 아예 놓아버렸더니, 이젠 영어보다 스페인어로 말하는 게 훨씬 더 편한 상태가 되었다. 물론 대학, 대학원생 때 토익 900점대에 중고등학생들 영어 과외를 오랫동안 해왔고, 대학원 전공 교재들도 대부분 영어 원서였고, 한동안 영어 원서 바카라들 읽기와 영자신문 읽기, 영어 자막으로 미드 보기 정도를 했었으니, 아마 예전에도 영어실력이 중상급은 되었던 것 같다. 하지만 스페인어 공부한 이후로 영어에 완벽히 등을 돌려버렸으니, 영어능력은 급격하게 퇴화되었다. 영어를 공부해 온 기간이 있다 보니 오랫동안 안 했어도 여전히 웬만하면 알아듣긴 하는데 영어로 말이 잘 안 나왔다. 말하려고 하면 영어보다 스페인어 문장이 먼저 떠올랐다.
그동안 투입한 노력과 시간 대비 정직하게 스페인어는 거의 중상급 수준으로 올라왔으나, 영어는 중급 수준으로 퇴화한 것 같았다. 그래서 올해 중순부터는 영어 공부도 조금씩 다시 시작하긴 했다. 영어 팟캐스트 듣기와 영어 원서 읽기로 일단 시작했다. 하지만 여전히 말을 할 때는 영어보다는 스페인어가 더 편했다. 평소 공부 비중은 스페인어 80%, 영어 20% 정도로 했다. 물론 요즘은 워낙 AI로 번역도 잘 돼서 영어 하나도 못해도 충분히 해외여행할 수 있지만, 그래도 직접 소통하는 게 가장 좋으니까, 발리 여행 전에 좀 더 내 영어능력 스위치의 시동을 좀 걸어놓고 싶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행 첫날, 둘째 날까지 내 영어가 버벅 거렸다. 사실상 계속 영어보다 스페인어가 먼저 생각이 나다 보니, 스페인어 문장을 영어로 번역하는 과정을 거쳐서 영어를 말하게 되는 신기한 현상이 일어났다. 또 영어 단어 보다 스페인어 단어가 먼저 떠오르다 보니, 영어 문장에서 스페인어 단어를 섞어서 말하기도 했다. 그리고 첫날 체크인 한 호텔에서 직원이 영어로 설명해 줄 때, 택시 기사의 질문에 대답할 때 'yes' 대신에 자꾸 'sí'가 먼저 내 입에서 나와서 나 혼자 민망하기도 했다. 물론 그들은 별 신경 안 쓰는 것 같았다. 무슨 언어를 하든 의사소통만 되면 되니까.
어쨌든 여행 3일 차쯤 되면서 계속 영어만 쓰니까 또 금세 영어 말하기에 익숙해졌다! 역시 사람의 적응력이란..! 물론 가끔씩 또 스페인어가 조금씩 짬뽕되긴 했지만. 그런데 또 영어로 며칠 동안 계속 듣고, 말하다 보니, 이번엔 또 스페인어가 생각이 안 나는 것이 아닌가..???!!! 별거 아닌 것 같지만 나에겐 스페인어가 생각 안 난다는 게 너무너무 무서웠다. 매일 스페인어 공부하는데 거의 3년 동안 익숙해져 있어서, 여행 기간 내내 스페인어를 못한다는 게 안 그래도 좀 불안했었기 때문이다. 내가 그동안 쌓아온 내 스페인어 실력이 순식간에 날아가 버릴 것 같은 느낌은 불안을 넘어 거의 '공포감'에 가까웠다.
하지만 그렇다고 여행 와서 평소 일상에서 하듯이 스페인어를 공부하고 있을 순 없는 것 아닌가. 그냥 3년간의 내 노력을 믿기로 했다. 한국 돌아가서 다시 열심히 공부하면 되지. 어쨌든, 이렇게 내 머릿속에서 스페인어와 영어가 마구 뒤섞이는 걸 보면서, 여러 외국어를 구사하는 사람들은 정말 대단하다는 걸 또 한 번 느꼈다.
나에겐 매주 주말에 화상 통화로 수다 떠는 스페인 친구가 한 명 있다. 언어 교환 모임을 하다 만난 친구라 스페인어와 한국어를 섞어 쓰면서 대화한다. 다만 내 스페인어 실력이 더 나아서 스페인어 70%, 한국어 30% 정도로 대화하는 것 같다. 나이도 비슷하고 올해 여름에 이 친구가 한국 놀러 왔을 때 같이 여행 다녀서 많이 친해졌다. 요즘엔 그냥 매주 근황 토크 하면서 수다 떤다. 이번 주는 내 여행 기간이라 쉴까 하다가 짱구의 핫한 거리 구경도 시켜줄 겸(여행 자랑도 할 겸) 스페인 친구와 영상 통화를 했다. 얘기하다가 갑자기 쉬운 스페인 단어가 생각이 안 나면서 "나 여기서 영어만 쓰다 보니까, 벌써 스페인어 다 까먹은 거 같아!ㅠㅠ"했더니, '네가 그동안 얼마나 열심히 해왔는데. 한국 돌아가서 또다시 하던 대로 하면 순식간에 다시 다 생각날 거야. 걱정 말고, 지금 여행 즐겨!' 하는 스윗한 내 친구.
매주는 아니지만 거의 격주로 꽤 자주 통화하는 멕시코 친구도 있다. 이 친구도 한국어를 공부하긴 하지만 왕초보 수준이라 이 친구와는 100% 스페인어로만 대화한다. 여행 온 지 며칠 더 지난 시기, 영상통화 초반에만 스페인어 시동 거느라 조금 어어.... 하다가 몇십 분 지나니 또 열정적으로 스페인어로 한 시간 반이나 수다 떨었다. 이 친구한테는 "나 며칠 공부 안 했다고 스페인어 다 까먹은 줄 알았어! 근데 너랑 대화하다 보니 또 스페인어가 술술 나오네? 정말 신기해!!!" 했더니, "네가 몇 년간 해온 게 네 안에 다 쌓여있으니까 그렇지"라고 하는 스윗한 친구!
이 두 친구들의 다정한 말을 믿고, 여행 기간 내내 스페인어 걱정은 놓아두기로 했다. 그렇게 "스페인어를 매일 공부해야 한다."는 강박감을 내려놓고(스페인어 공부 아예 하나도 안 하고) 여행에만 집중해서 놀 수 있었다. 영어도 스페인어도 아닌 이상한 언어를 하고 다니면서도 문제없이 여행을 즐길 수 있었으니 됐지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