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개, 보랏빛 커튼 너머의 길
- 제14화 -

좀 번져도 괜찮아, 곧 계절이 올 거야.

by정해남




안개, 보랏빛 커튼 너머의 길



그대,

몇 년 전 초여름이었을 거예요.

매물로 나온 집과 땅을 둘러보러

구불구불 가파른 문경새재 고갯길을 오르다가

문득 짙은 안개를 만났지.


온 세상이 희뿌연 물감에 번진 듯 흐릿해지고

앞도 뒤도 아득해져

가던 차를 잠시 세울 수밖에 없었지.


살다 보면 참 그런 날이 있지.

남들의 걸음은 전광판처럼 또렷이 앞서가는데

나 혼자만 길 한가운데 멈춰 선 것 같고,

다시 나아갈 앞날은 안갯속처럼 까마득한 날.

학업도, 일도,

때로는 까닭 없이 흔들리는 삶의 길목도 그렇더군.


무엇이 기다리는지 보이지 않으면

마음 깊은 곳에서 모락모락 두려움이 피어나지.

안개처럼 말이죠.

하지만 안개는 길을 없애는 게 아니라

잠시 보랏빛 커튼을 내려놓았을 뿐,

그러니 너무 멀리 보려 애쓰지 말고

지금 발끝에 닿는 딱 한 걸음에

마음을 가만히 얹으라는 뜻인지도 모르죠.


그 한 걸음을 내디디면

다음 한 걸음이 옅은 윤곽을 드러내고,

그렇게 걸음을 옮기다 보면

어느새 안개는 맑은 햇살이 떠오르면

곧 아침 이슬처럼 흩어질 테니까.


임장을 마치고 들어선 자그마한 식당에서

선홍빛 육회 산채비빔밥을 마주했어요.

취나물과 고사리의 풍성함 아래 얹어진

노란 계란 프라이 빛깔이 어찌나 곱던지,

젓가락을 대기가 아까울 정도였어요.

살얼음 둥둥 뜬 시원한 오이냉채 국물을

한 모금 넘기고 나니

답답하게 막혔던 가슴이 스르르 뚫리더군.


‘아, 이곳이 별천지로구나!’ 하고

진짜 행운의 꿈이 말을 걸어오는 것 같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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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문득 그런 생각이 스쳤지요.

아까 나를 길 위에 묶어두었던 그 짙은 안개도

어쩌면 나를 이 맛깔스러운 상차림 앞으로

데려다 주기 위한 선한 손길이었을지 모르죠.


그대,

이 길을 함께 걸어주어 고마워요.

여기서 우리 함께

시 한 편 감상해 봅시다.

-


커튼 너머의 길

/ 정해남


구불구불

안개 짙은 고갯길 지나며

한 생이 번져 낸 그림자

삶이라는 긴 무대의

막이 내리고


보랏빛 커튼 너머

다시 살랑살랑 봄바람이 불어올 때


걸음 끝에 찍은

깊은 마침표

뜨겁게 남은 내 이름 석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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