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 번져도 괜찮아, 곧 계절이 올 거야.
안개, 보랏빛 커튼 너머의 길
그대,
몇 년 전 초여름이었을 거예요.
매물로 나온 집과 땅을 둘러보러
구불구불 가파른 문경새재 고갯길을 오르다가
문득 짙은 안개를 만났지.
온 세상이 희뿌연 물감에 번진 듯 흐릿해지고
앞도 뒤도 아득해져
가던 차를 잠시 세울 수밖에 없었지.
살다 보면 참 그런 날이 있지.
남들의 걸음은 전광판처럼 또렷이 앞서가는데
나 혼자만 길 한가운데 멈춰 선 것 같고,
다시 나아갈 앞날은 안갯속처럼 까마득한 날.
학업도, 일도,
때로는 까닭 없이 흔들리는 삶의 길목도 그렇더군.
무엇이 기다리는지 보이지 않으면
마음 깊은 곳에서 모락모락 두려움이 피어나지.
안개처럼 말이죠.
하지만 안개는 길을 없애는 게 아니라
잠시 보랏빛 커튼을 내려놓았을 뿐,
그러니 너무 멀리 보려 애쓰지 말고
지금 발끝에 닿는 딱 한 걸음에
마음을 가만히 얹으라는 뜻인지도 모르죠.
그 한 걸음을 내디디면
다음 한 걸음이 옅은 윤곽을 드러내고,
그렇게 걸음을 옮기다 보면
어느새 안개는 맑은 햇살이 떠오르면
곧 아침 이슬처럼 흩어질 테니까.
임장을 마치고 들어선 자그마한 식당에서
선홍빛 육회 산채비빔밥을 마주했어요.
취나물과 고사리의 풍성함 아래 얹어진
노란 계란 프라이 빛깔이 어찌나 곱던지,
젓가락을 대기가 아까울 정도였어요.
살얼음 둥둥 뜬 시원한 오이냉채 국물을
한 모금 넘기고 나니
답답하게 막혔던 가슴이 스르르 뚫리더군.
‘아, 이곳이 별천지로구나!’ 하고
진짜 행운의 꿈이 말을 걸어오는 것 같았죠.
그때 문득 그런 생각이 스쳤지요.
아까 나를 길 위에 묶어두었던 그 짙은 안개도
어쩌면 나를 이 맛깔스러운 상차림 앞으로
데려다 주기 위한 선한 손길이었을지 모르죠.
그대,
이 길을 함께 걸어주어 고마워요.
여기서 우리 함께
시 한 편 감상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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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튼 너머의 길
/ 정해남
구불구불
안개 짙은 고갯길 지나며
한 생이 번져 낸 그림자
삶이라는 긴 무대의
막이 내리고
보랏빛 커튼 너머
다시 살랑살랑 봄바람이 불어올 때
걸음 끝에 찍은
깊은 마침표
뜨겁게 남은 내 이름 석 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