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멩이, 발등에도 눈
- 제12화 -

번져도 괜찮아, 계절이 올 거야.

by정해남



돌멩이, 발등에도 눈

- 제12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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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샛강 언덕길을 걷다가 돌에 걸려 넘어진 친구가 있었습니다.

이름 모를 풀꽃들이

지천으로 피어 물결마저 간지럽게 흐르던 강가였지요.


손목에서 피가 흐르는데도 친구는

돌을 걷어차기는커녕 허허 웃으며 한마디 하더군요.

“내 발등에도 눈이 있었으면 좋았을걸.”

함께 웃었지만

그 말은 청량한 물소리처럼 오랫동안 마음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누군가를 탓하기 전에 자신의 발밑부터 가만히 살피는 마음.

그날 이후 길가에 무심하게 굴러다니는 돌멩이들이

예전과는 조금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한때는 송곳처럼 날카로운 바위였을 저 돌이

얼마나 많은 밤과 계절의 물살을 견뎌야 저토록 순하고 둥글어졌을까.

그러다 문득 흐르는 물빛에 비친 나 자신이 궁금해졌습니다.

오랫동안 부동산 중개업을 하며 참 많은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말 한마디에도 입에 가시가 돋친 사람,

속내를 감춘 채 달콤한 말로 다가오는 사람,

자신의 이익 앞에서는 체면도 염치도 없는 사람,

기쁨과 고통이 뒤섞여 자기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면서도 미소를 짓고 있는 사람.

진심의 내면이 뭔가 뭔지도 모를 그들과 부딪힐 때마다

나 역시 차갑게 날을 세우곤 했습니다.

내가 옳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었고,

상대의 잘못을 끝내 인정받아야 직성이 풀렸습니다.

억울한 일을 당하고도 웃어 넘기기에는 내 자존심이 허락지 않았던 탓입니다.


지금 돌아보면 상대의 모난 말만 보았지,

내 말에 돋아난 날카로운 가시는 보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나는 옳음을 지키려 했지만,

때로는 그 옳음의 날 끝으로

누군가의 마음을 깊이 찌르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물론 부당한 일을 무조건 참아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다만 이제는 압니다.

옳다는 것과

그 옳음을 끝까지 증명해 내는 것은 다른 일이라는 것을.

모든 다툼에서 이겨야만 내 존재가 지켜지는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돌아보면 나는 사람들과 부딪히면서도

내 모서리만큼은 기어이 지키려 애쓰며 살아왔습니다.

그것을 소신이라 불렀고,

물러서지 않는 것을 자존심이라 여겼습니다.


하지만 세월이 번개처럼 흘러버린 지금,

햇살 고운 봄볕 아래

내가 끝까지 지키려 했던 그 욕심 많은 모서리들이

정말 나를 지켜주었는지 가만히 물어보게 됩니다.


오늘은 문득

길가에 굴러다니는 돌 하나를 주워

조심스럽게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돌멩이 / 정해남


돌은 물에 닳고

나는 사람에게 닳았다.


모난 말을 소신이라 믿었고

꺾이지 않는 것을 자존심이라 여기고


이끼 낀 세월을 흘러 보내고서야

비로소 눈망울 큰 순한 사슴이 되어


불끈 쥔 주먹을 펴자

그제야 붉은 내 손금이 보였다.



시를 가만히 읊조려 보니

비로소 오래 전의 내가 조금씩 보이기 시작합니다.


나는 세상이 나를 무자비하게 깎아낸다고만 생각했는데,

어쩌면 세월은 내게 스스로의 모서리를 돌아보고

어루만질 시간을 선물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살다 보면 누구나

뜻밖의 돌에 걸려 비틀거리는 날이 있습니다.


예전의 나는

나를 넘어뜨린 돌을 원망하느라

그 자리에 오래 앉아 바닥을 쏘아보곤 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잠시 멈춰 서서

내가 지나온 발자국을 가만히 내려다봅니다.

억울함에 붉어졌던 마음이 진정되고 나면,

내가 놓치고 지나온 조그만 꽃송이들이

흙먼지 사이로 하나둘 보이기 시작하니까요.

나 역시 아직 온전히 둥글어지지 못했습니다.

어쩌면 살아 있는 동안

내 안의 모서리들을 다 깎아내지는 못할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이제는 내가

옳다는 것을 증명하느라 애쓰기보다,

종달새 지저귀고 아지랑이 아롱대는

4월의 싱그러운 보리밭 물결처럼,

부드럽고 따뜻한 온도를 가진 사람으로 남기를 더 생각하려 합니다.


모난 데가 있다는 것은

아직 다듬어갈 아름다운 시간이 남아 있다는 뜻이겠지요.


인생이라는 그림에는 처음부터 완벽한 선이 없습니다.

잘못 그은 선도 있고,

지우지 못한 흔적도 있으며,

마음대로 어우러져 번져버린 자리도 있게 마련입니다.


나 역시 그런 흔적들을

가만히 안은 채 여기까지 걸어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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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쳇지티피

오늘 길가에서 무심코 주워 든 돌멩이 하나.

매끄럽게 길들여진 표면을 만지작거리며,

나도 참 먼 길을 걸어왔구나 하고 나직이 중얼거려 봅니다.


돌멩이 하나에도 긴 세월의 물살이 새겨져 있듯,

달빛 가까운 초가지붕 위에서도

아직 미처 피지 못한 달맞이꽃처럼

우리의 오늘에도 얼룩으로 번져 다 피지 못한

저마다의 숨은 이야기가 있을 것입니다.


좀 번져도 괜찮습니다.


괜찮다고

스스로의 모서리를 어루만지며

굳세게 걸어가는 그대에게

곧 따뜻한 계절이 올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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