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져도 괜찮아, 계절이 올 거야.
도마, 상처로 이룬 걸작
- 제8화 -
그대,
오래전, 내가 종종 글을 올리던 카페에서
한 독자분이 박달나무 도마를 선물로 보내왔습니다.
어느 날, 제주 처남이 보내온 도미를 손질하려고
도마 위에 생선을 올리다가 문득 나무에 새겨진 무수한 칼자국을 보았습니다.
깊게 파인 골도 있고,
가느다랗게 스쳐 간 흔적도 있었지요.
말없이 누워 있는 도마 위로 누군가의 오래된 부엌과,
그곳을 거쳐 간 수많은 계절이 아른거렸습니다.
나는 한동안 그 자국들을 가만히 들여다보았습니다.
우리 삶에도 저렇게 결이 패이는 날들이 있지요.
믿었던 사람의 말 한마디에 마음이 깎이고,
까닭 모를 오해에 가슴이 내려앉고,
오래 품었던 꿈이 조용히 시들어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홀로 서성이던 날들 말입니다.
마음에도 나이테처럼 깊은 자국이 남는다는 것을,
우리는 살아가며 조금씩 알게 됩니다.
그럴 때면 나는 다시 도마를 가만히 떠올려 봅니다.
수없이 칼날을 받아 낸 나무는 제 몸에 깊은 흉터를 남겼지만,
그렇다고 제 쓸모를 놓아버리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패인 자리마다 따뜻한 밥상과 식구들의 온기가 깊이 스며 있었겠지요.
문득, 사람의 삶도 그 나무와 참 많이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건축가 안도 다다오의 삶을 떠올려 봅니다.
권투선수로 살다가 정규 건축 교육도 받지 못한 채 스스로 길을 찾아 들어선 사람.
세상의 차가운 눈길 앞에서도 그는 자신의 길을 거두지 않았지요.
부딪치고 번지면서 한 걸음씩 나아간 끝에
마침내 그만의 깊은 건축을 세워 올렸습니다.
매끄럽고 단정한 표면만으로는 결코
다 담아낼 수 없는,
삶의 굴곡이 만든 우묵하고 깊은 공간이었습니다.
그대의 삶도 그렇지 않을까요.
상처 하나 없이 매끄럽기만 한 삶이 어디 있을까요.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게 웃다가도 돌아서는 길에 홀로 마음을 잡는 사람이 있고,
괜찮다는 말 뒤로 차마 꺼내지 못한 이야기를 깊이 접어두는 사람도 있지요.
그렇다고 마음에 자국이 좀 남았다고 해서
스스로를 흠 있는 사람이라 여기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물론 그 아픔들이 당장 다 뜻있는 기회가 되지는 않겠지요.
어떤 기억은 오래도록 마음 한구석에서 쓰라리고,
어떤 상처는 세월이 흐른 뒤에도
비 오는 날의 무릎처럼 문득 저려 오기도 하니까요.
애써 의미를 찾아내려 애쓰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다만, 그 가파른 시간을 지나온 스스로에게
조금은 다정한 눈빛을 보내며,
괜찮다고 가만히 어깨를 토닥여주면 어떨까요.
한때는 견딜 수 없을 것만 같았던 시간이
훗날 다른 사람의 아픔을 알아보는 그윽한 눈빛이 되어주고,
내가 흘린 눈물의 기억이
누군가의 슬픔 곁에 가만히 앉아 주는
작은 의자가 되어주기도 하니까요.
패인 흔적들을 안고 오늘을 살아내는 동안,
우리의 마음자리는 조금씩 넓어지고 깊어지는지도 모릅니다.
도마에 새겨진 칼자국이
오늘 밤에도 따뜻한 한 끼를 위해 제 몸을 조용히 내어주듯,
그대가 지나온 시간도 언젠가
누군가의 마음을 고요히 받쳐주는
따뜻한 나무 한 조각이 될 테지요.
칼날은 무심하게 지나갔어도,
나무는 제 결대로 생을 견디며 받아냈습니다.
지워지지 않는 자국까지 다 품은 채 도마가 제 몫의 하루를 살아내듯,
그대와 나의 삶도 그렇게 흘러가는 것이겠지요.
오늘은 그저,
여기까지 잘 걸어온 스스로를 가만히 건너다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참 잘 견뎌왔다고,
그만하면 정말 애썼다고,
마음속으로 다정한 인사를 건네면서요.
그대의 삶은 아직 다 쓰이지 않았습니다.
아직 하얗게 남은 화폭 위에
어떤 따스한 빛깔이 번져갈지 우리는 아직 알지 못하지요.
그러니 오늘 밤만큼은 스스로에게
조금 더 다정해져도 좋겠습니다.
패인 자국까지도 모두 그대의 귀한 삶이니,
그 흔적을 품은 그대는 이미 그 자체로 하나뿐인 걸작입니다.
그대가 살아온 날들과 다가올 날들을 향해,
나도 멀리서 조용히 응원의 마음을 보냅니다.
혹시 오늘 밤에도 마음이 저려오거든,
더욱더
따뜻한 밥 한 끼 꼭 챙겨 드시기를 바랍니다.
그대의 마음에
따뜻함이 오래 머물기를 바라면서,
오늘 밑반찬으로 시 한 편 선물합니다.
도마 / 정해남
생선을 눕히고
채소를 썰며
아프고 패인 날들을
묵묵히 견뎌 온 그대
스쳐 간 날붙이마다
붉은 생을 받아 적는다
흠이라 여긴 자국 아래
말없이 깊어지는 시간
마침내
상처까지 무늬가 된
한 생의 걸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