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져도 괜찮아, 인생은 수채화
프롤로그와 가난, 빈 도시락의 빛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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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삶이라는 화폭에 저마다의 빛깔을 얹으며
살아오면서 나는
수많은 사물 앞에 오래 머물곤 했습니다.
도마는 칼날이 지나간 자리를 말없이 받아 주었고,
낡은 연필은 짧아진 몸으로 끝내 한 줄의 문장을 남겼습니다.
서로 다른 빛깔이 한데 어우러지는 비빔밥처럼,
저마다의 모습으로 제자리를 지키며 살아가는 것들이
내게 조용히 삶의 이치를 들려주었습니다.
돌이켜보면 내가 지나온 날들 속에도
뜻대로 되지 않아 마음이 까맣게 번지던 날이 있었습니다.
애써 그린 그림이 자꾸만 엉뚱한 빛깔로 번져 나갈 때면
내 계절만 너무 더디 오거나
아예 오지 않는 것은 아닌지 불안해하곤 했습니다.
그러나 그림은 한 번의 붓질로 완성되지 않습니다.
때로는 지우고, 덧칠하고,
때로는 번진 자리를
그대로 두어야 비로소 깊은 빛을 얻기도 합니다.
그러니 그대의 오늘이 조금 흐리고 뜻대로 번진다고 해서
너무 일찍 실망하거나 화폭을 덮지 않았으면 합니다.
조금 번져도 괜찮습니다.
마음 깊은 곳에 작은 온기를 간직한 채
단단히 시린 가슴을 녹이다 보면,
마침내
제 빛깔을 피워 낼 그대의 계절이 찾아올 테니까요.
이 글들은 그렇게 번지며 살아온 서툰 시간에 관한 기록입니다.
어떤 정답을 건네기보다,
먼 길을 걸어온 한 사람의 작은 이야기가
그대 삶의 모퉁이에서
따뜻한 위로로 번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제 다가올 빛깔들을 찾아,
그대와 함께 천천히 걸어가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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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화. 가난, 도시락의 빛깔
그대,
중학교에 다니던 시절,
내게는 점심 도시락을 챙기는 일조차 쉽지 않았습니다.
어쩌다 도시락을 싸 가는 날이면
고아원에서 다니던 친구들과 한 숟갈씩 나누어 먹곤 했지요.
몇 번 숟가락이 오가고 나면 도시락은 금세 바닥을 드러냈습니다.
배가 고프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요.
무기력하여 실속 없이 보내는 시끄러운 고독보다
꿈 짙은 침묵으로 별을 노래하며
하루하루 오늘까지 견뎌냈지요.
하지만 이상하게도 지금 그 시절을 떠올리면
빈 도시락보다 함께 먹던 친구들의 얼굴과,
내일은 다를 수 있으리라는
막연하지만 사라지지 않던 마음이 먼저 생각납니다.
가난은 어린 내게 세상이 녹녹하지 않음을 일찍 가르쳐 주었습니다.
갖고 싶은 것을 마음껏 가질 수 없었고,
무엇을 하든 형편을 먼저 헤아려야 했으니까요.
하지만 가난이 내 마음의 모든 자리를
차지하도록 내버려 두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세월이 흘러 그때의 소년은 어느덧 나이가 들었고,
지금 내 곁에는 수백 권의 바카라이 쌓여 있습니다.
그림을 그리고,
피아노를 치고,
이렇게 글을 쓰기도 합니다.
도시락 하나도 넉넉하지 못했던 소년에게는
참으로 먼 길을 돌아 얻은 풍경입니다.
그때의 가난이 내게서 많은 것을 가져간 것은 사실이지만,
내 삶의 모든 가능성까지 가져가지는 못했습니다.
어쩌면 부족했던 시간 덕분에 바카라 한 권,
그림 한 점, 건반 위의 서툰 음처럼
작은 것들이 지닌 기쁨을 조금 더 오래 들여다보게 되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람의 마음은 가진 것의 많고 적음만으로
다 헤아릴 수 없는 모양입니다.
남보다 더 많이 가져야 안심이 된다면
풍족한 가운데서도 마음은 허기질 테지만,
작은 기쁨을 알아보고
오늘의 삶을 제 손으로 가꾸어 가는 사람에게는,
남이 쉽게 빼앗을 수 없는,
넉넉함이 있을 테니까요.
삶을 힘들게 한 것은
때로 부족한 형편 그 자체보다,
그 형편 속에서 나를
어떻게 바라보느냐 하는 마음의 문제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삶은
내가 가진 것만으로 그려지는 단순한 그림이 아니었습니다.
결핍과 채움,
뜻대로 되지 않은 날과 뜻밖의 기쁨이
한데 어우러져 지금의 나를 만들었지요.
그대도 살아가다 보면
자신의 형편이 초라하게 느껴지는 날이 있겠지요.
그럴 때면 남의 그림을 오래 들여다보느라
그대 자신의 화폭을 잊지는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비어 있는 자리가 많더라도,
그곳에 어떤 빛깔을 얹을지는 여전히 그대에게 남아 있으니까요.
그대,
삶은 때로 우리에게 얼마나 가졌느냐고 묻는 대신,
주어진 하루를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느냐고
조용히 물어오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의 삶을 끝내 이루어 가는 것은
처음부터 넉넉했던 조건이 아니라,
그 조건 속에서도
곧 찾아 올 자기 계절을 잃지 않으려는
마음의 빛깔이라는 것을
이제는 조금 알 것 같습니다.
- 마음돌보기 -
지금 내 삶을 채우고 있는 부족함을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그 부족함에 마음을 빼앗기느라,
이미 내 곁에 소리 없이 와 있는 작은 기쁨들을 놓치고 있지는 않은지.
오늘 내 화폭에 가만히 얹어보고 싶은
작은 기쁨 하나를 생각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