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산하지 못한 나라의 성적표
"증조할아버지께서 한양에서 최초로 양의원을 개원하셨고,
고종 황제를 진료하셨다."
배우 하영이 KBS 옥탑방의 문제아들에서 이 말을 꺼냈을 때,
방송 자막은 '고종 황제도 치료'라는 문구를 띄웠다.
그런데 이 이야기가 나온 건
이 방송이 처음이 아니었다.
며칠 앞서 공개된 넷플릭스 코리아 유튜브 채널 영상에서,
MC 유병재가 "집안이 대대로 의사 집안이라고 들었다"고 묻자
하영은 이렇게 답했다.
"맞다. 제가 듣기로는 아버지와 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까지 모두 의사셨다.
언니도 내과 전문의다."
"기억으로는 증조할아버지가
당시 한양에서 서양의학 전문 의원을
가장 먼저 여신 분 중 한분이라고 들었다."
신작 홍보 인터뷰에서도 같은 이야기가 반복됐다.
"언니랑 아버지랑 할아버지랑 증조할아버지부터
의사를 하셨다고 들었어, 나는.
내가 듣기로는 양의학으로 한양에
이제 개업을 아마 처음 하신 의사라고…"
넷플릭스 홍보 예능, 지상파 예능, 그리고 별도 인터뷰까지.
최소 세 곳에서 반복된 서사였다.
한 번의 실언이 아니라,
홍보 시즌 내내 밀어온
셀링 포인트였다는 뜻이다.
안상호,
호는 해관,
본관은 순흥 안씨.
규장각에서 화원으로 일하던
안건영의 아들로 서울에서 태어났다.
1902년 일본 동경자혜의학전문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일본 의사 자격을 취득했다.
1904년 귀국해 지석영이 세운 의학교와
동담한의학교에서 서양의학을 강의했다.
이어 순종의 전의로 임명됐고,
의친왕과도 친분이 두터웠다.
서울 종로 3가에 개인진료소를 차렸는데
환자가 몰려 차례를 정해 진찰할 만큼 성황이었다.
일본인 중심의 경성의슬롯에 맞서
한국인 의사들로 구성된 한성의슬롯 회장도 맡았다.
여기까지만 보면 근대 의학사의 선구자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2007년 한국민족운동사학회 학술지에 실린
이정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연구위원의 논문에 따르면,
안상호는 1916년 11월 29일 조직된
대정실업친목회 평의원을 맡았다.
평의원은 일반 회원과 지위가 다르다.
대정친목회는 조선 민중을 일제 무단통치에
순응시키기 위한 방안을 연구했고,
1924년에는 한민족 독립 의식 말살과
일제 총독 정치의 지지에 힘을 실었던 단체다.
헤럴드경제 보도에 따르면
최초의 친일 행적으로 지목되는 건 이보다도 앞선다.
1909년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뒤,
경성에서 열린 이토 히로부미 추모대회의 추모준비위원회에
안상호의 이름이 올라간 것이다.
1916년 10월 21일자 매일신보는
안상호가 자녀를 일본인 학교에 보내 교육하는 것을
'일선동화'의 성과로 홍보했다.
1918년 12월 10일자 매일신보 인터뷰에서
안상호 본인은 이렇게 말했다.
"조선 사람과 그리 상종하는 일이 없으므로 불편한 것은 없다."
일본인 부인 이소코도 함께 답했다.
"11년 동안 조선에 있었어도 조선말은 한 마디도 못한다."
같은 해 매일신보에는 일본인 여성과 결혼한 안상호의 가정을
'일선동체'의 모범 사례처럼 소개한 기사도 실렸다.
이완용과의 관계도 남아 있다.
1909년 말 혹은 1910년 초부터
안상호와 이완용은 지속적으로 교류가 있었고,
1927년 이완용이 사망하자 안상호는 생전에
그를 각별히 치료해준 것을 기념하는 추모록을 남겼다.
안상호가 사망할 무렵인 1928년에도
매일신보는 그를 기리는 송덕비 관련 기사를 실었다.
그런데도 안상호는 정부가 공식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자 1,006명 명단에도,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약 4,700~4,800명 명단에도 이름이 없다.
친일인명사전 집필 관계자는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친일인명사전은 객관적 1차 사료만으로 등재한다.
안상호는 저희 기준에 약간 미달되지 않았나 싶다."
그러면서도 덧붙였다.
"안상호의 친일 행적은 여전히 팩트다."
역사학자 심용환 소장의 평가는
이 애매함을 정확히 짚는다.
"안상호가 당시 엘리트였고 대정친목회 등
친일 인사들이 많이 참여한 단체에 소속됐으며,
일본의 식민 통치 홍보에 가족이 활용된 점을 들어
만년에 존경받을 인물은 아니다."
동시에 이렇게도 말했다.
"명확한 친일 부역 행위가
밝혀지지 않은 상태에서
단지 특정 단체 가입만으로
친일파로 규정하는 것은 위험하다."
논란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조부의 이력도 함께 소환됐다.
하영의 소속사는
"하영의 조부는 고 안부호 가톨릭대 의과대학
주임교수가 맞다"고 밝혔다.
안부호 교수는 경성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한 후
1949년부터 1953~54년까지
국립소록도병원에서 한센병을 연구했다.
이후 전남의대 교수를 거쳐
가톨릭의대 여의도성모병원 임상병리과
초대 과장이자 주임교수를 지냈다.
하영의 아버지는 조부의 소록도 재직 시절 태어났고,
이후 서울대 의대를 나와 정형외과 전문의가 됐다.
하영의 친언니 역시
현재 서울의 한 병원에서
내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문제는 소록도 그 자체다.
조선총독부는 1916년 전국의 한센인을
격리할 장소로 소록도를 선정하고,
그해 5월 한센병 전문병원 자혜의원을 세웠다.
일본은 전염병 예방과 우생학적 이유로
단종수술 정바카라을 시행했고,
1935년 여수애양원에서
국내 최초로 단종수술이 실시됐다.
소록도병원은 1936년 부부 동거를 조건으로
단종수술을 공식 도입했다.
해방이 됐다고 사정이 달라지지는 않았다.
치료제가 1940년대 이미 개발됐음에도,
강제 격리와 시신 해부,
낙태와 단종 수술은
수십 년간 이어졌다.
단종수술은 1992년까지 계속됐다.
2005년 국가인권위원회 실태조사에 따르면,
소록도병원은 김상태 원장 재임 기간(1948~1954년)을 포함해
1949년부터 1958년까지 한센인 1,191명에게 정관수술을 시행했다.
결혼이나 시설 내 생활의 대가로
남성 환자들에게 이를 강요했다.
1949년 당시 소록도 수용 환자는
약 6,100명이었지만,
그해 태어난 신생아는 45명에 불과했다.
김상태 원장은 사망자들의 시신을
유족 동의 없이 연구·실습 자재로 강제 동원해 해부했고,
치료·연구 성과를 낸다는 명목으로
환자의 가슴뼈에 거대한 주삿바늘을 꽂아
골수를 강제 채취하는 실험을 자행했다.
이 실험의 후유증으로 많은 환자가 숨졌다.
한센인들은 가만히 있지 않았다.
1953년 김상태의 학대를 고발하는 진정서를 작성해
정부에 제출하며 해임 요구 투쟁을 벌였다.
1954년에는 소록도 4·6 사건이 벌어졌다.
자유와 인권을 보장하라는 성명서를 발표하며
병원 측 통제에 조직적으로 정면 충돌한 사건으로,
당시 진정서와 성명서는 국가등록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환자 사체는 유족 동의 없이
1960년대까지 해부됐고,
강제 격리는 1970년대까지,
낙태와 단종 수술은 1980년대까지 이어졌다.
일본은 자국 한센병 피해자에게 사과했지만,
한국 정부의 배상 바카라임을 대법원이 인정한 건 2013년이었다.
다만 안부호 교수 본인이
이 인권침해에 가담했는지 여부는 확인되지 않는다.
그의 구체적 업무 내용이나
인권침해와의 연관성을 뒷받침할 자료도
현재까지 나온 게 없다.
이 사건에서 가장 이상한 대목은 따로 있다.
경기 안양시 공식 블로그에는 2020년,
광복 75주년을 기념해 시민기자단이 쓴 글이 하나 있었다.
제목은 '안양시의 독립운동가를 찾아서'.
그 글은 안상호를
안양의 독립운동가로 소개하며 이렇게 적었다.
"독립운동이라 하는 것은 앞장서서
일본 지도자를 대항해 행동으로 보여주는 인물들도 있지만,
꼭 그것만이 아닌 자신의 영역에서도
독립운동을 펼칠 수 있다는 것도 느끼게 해준 인물."
나무위키에 남은 기록을 보면,
이 서사가 왜 만들어졌는지 짐작이 간다.
안상호는 안양에 있는 보육시설에
1만 5천여 평을 희사했고,
6·25전쟁이 끝난 뒤 비산대교에서
한국제지에 이르는 안양천 제방을
사비로 축조하는 등 지역 발전에 기여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는
"저 안씨네는 안양의 왕이거든.
저 집안이 땅 줘서 만든 학교가
한둘이 아니다"라는 반응도 나왔다.
지역 유지로서의 자선 활동과,
총독부 기관지의 내선일체 모범 사례라는 두 이력이
한 인물 안에 공존했다는 뜻이다.
시민기자는 앞의 것만 보고
뒤의 것은 보지 못했다.
논란이 불거지자 안양시는
지난 11일 이 게시물을 조용히 비공개로 돌렸다.
시 관계자는 말했다.
"해당 글을 게시할 당시
안상호의 친일 행적을 파악하지 못한 것으로 안다."
6년 동안,
지자체 공식 채널에서,
친일 협력 기록이 남아 있는 인물이
독립운동가로 소개되고 있었다.
아무도 확인하지 않았다.
검증 없이 올라간 미담은
검증 없이 6년을 버텼다.
드라마 스토브리그에는 이런 대사가 나온다.
3루에서 태어난 사람이 있다.
그는 자신이 3루타를 친 줄 안다.
물려받은 것을 자랑하는 일 자체는 죄가 아니다.
문제는 그 3루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확인하지 않은 채,
방송 카메라 앞에서 여러 차례 반복해서 꺼냈다는 데 있다.
연예인이 조상의 친일 행적으로
도마에 오른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뮤지션 전범선의 5대조는
신소설 《혈의 누》를 쓴 이인직이다.
이인직은 일제강점기 이전부터
일본에 협력한 행적을 남긴 인물이다.
전범선은 이 가족사를 스스로 먼저 공개했다.
어머니를 통해 알게 된 뒤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고 밝히며,
숨기지 않고 이야기를 꺼냈다.
강동원은 친일파로 알려진
이종만의 외증손자다.
논란 이후 그는 직접 사과했다.
"어린 시절부터 외증조부의 미담을 들으며 자라왔다.
부끄러운 역사와 진실에 대해서 반성하고 공부하겠다."
이지아의 친조부 김순흥은
국방헌금과 군용기 헌납금을 낸 행적이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돼 있다.
이지아는 18세 이후 독립해
부모와 10년 넘게 왕래하지 않았다며
재산·상속 분쟁과의 무관함을 밝히면서도,
조부의 친일 행적에 대해서는 명확한 입장을 냈다.
"2011년 기사를 통해 처음 접한 후
민족문제연구소를 여러 차례 방문해
관련 기록을 확인했다."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고려하더라도
정당화할 수 없는 행위라고 했고,
논란이 된 안양 소재 토지가
일제강점기 취득 재산으로 확인될 경우
국가에 환수돼야 한다는 입장도 스스로 밝혔다.
"부끄러운 과거의 기록으로
심려를 끼쳐 죄송하다"며
후손으로서 사죄의 뜻도 전했다.
세 사람의 공통점은 뚜렷하다.
전범선은 스스로 먼저 공개했다.
강동원과 이지아는 논란이 불거지자 본인이 직접,
구체적인 사실관계를 확인한 뒤 사과했다.
하영은 달랐다.
소속사가 처음엔
"사실무근"이라고 부인했다가
하루 만에 번복했다.
"증조부 안상호 선생이
1916년 대정친목회의 평의원 명단에
이름이 올라있는 기록이
실제로 존재함을 확인했다"며 입장을 바꿨다.
본인 명의의 자필 사과문이 뒤늦게 나오긴 했지만,
회피하듯 소속사를 통해 두루뭉술한 입장을 먼저 내고
간접 인정에 그쳤다는 평가를 피하지 못했다.
같은 논란,
다른 태도.
대중이 정말로 화를 낸 지점은
어쩌면 친일 그 자체보다,
이 온도 차였을지 모른다.
여기 두 개의 통계가 있다.
독립운동가 후손 절반은
월 소득 200만 원을 넘기지 못한다.
정인열 광복회 대구시지부 사무국장은 이렇게 설명한다.
"친일파 후손들이 막대한 재산과 권력을 물려받은 것과 달리,
독립운동가 후손들은 선대가 모든 것을 내놓은 탓에
가난을 대물림해 왔다.
재산이 없으니 교육받기 어려웠고
안정적인 일자리도 구하기 힘들었다."
반면 뉴스타파가 지난 2015년 8개월에 걸쳐,
친일파 후손 202명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소송자료와 판결문,
친일재산조사위가 국가귀속한 친일 재산의 지번을
하나하나 대조해 확인한 친일 후손 거주지는 475곳이었다.
지역별로 보면 서울과 경기도가 각각 300곳, 100곳.
전체의 84%가 수도권에 몰려 있었다.
서울 거주지 300곳만 놓고 보면
강남구, 서초구, 송파구 이른바 강남 3구의 비율이
130건, 43.3%에 달했다.
절반 가까이가 강남 3구에
집을 갖고 있었다는 뜻이다.
주거 형태로 보면 단독주택은
한남동, 이촌동, 성북동, 평창동 같은
전통 부촌에 많이 몰렸고,
강남 3구와 분당 지역에
아파트를 보유한 사람은
144명으로 집계됐다.
친일재산 환수는
이 격차를 얼마나 좁혔을까?
2006년 대통령 직속으로 설치된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조사위원회는
이완용, 송병준 등 168명을 조사해
여의도 면적의 1.3배,
1,113만 9,645㎡를 환수했다.
숫자만 보면 상당한 성과다.
하지만 추정되는 전체 친일재산 4억 3천만㎡ 가운데
실제 국가에 귀속된 건 여전히 3%,
1,300만㎡뿐이다.
독립운동가 후손을 위해 매각된 땅은
그중에서도 135만㎡,
전체의 0.3%에 그쳤다.
가장 상징적인 사건이 있다.
친일파 이해승의 후손을 상대로 한
재산 환수 소송은 2007년부터
무려 16년을 끌었다.
후손 측은 "작위는 한일 합병 공로가 아니라
황실 종친 신분 때문"이라며 맞섰고,
대법원에서 최종 승소해
일부 토지를 되찾기도 했다.
2011년 국회가 친일재산귀속법을 개정해
문제가 된 조항을 삭제했지만,
재소송에서도 법원은
1차 소송에 포함되지 않았던 단 1필지,
4㎡만 반환 의무가 있다고 판단했다.
환수하려던 땅 190만㎡ 가운데 되찾은 건 4㎡,
비율로 따지면 0.0002%였다.
법무부는 이 사건을 승소 사례로 분류했다.
16년간의 지루한 싸움을 방청석에서 지켜본
다른 독립유공자 후손은 이렇게 말했다.
"얼마나 허탈하겠습니까?
16년간의 지루한 싸움을
그때 그렇게 해서 끝냈습니다."
법무부는 이후에도
이해승 후손을 상대로
소송을 이어가고 있다.
2020년 13필지 환수 소송에서 승소했고,
지난해 10월에는 토지 매각 대금 78억 원에 대한
부당이득반환 청구 소송을 새로 제기했다.
법정 공방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이 모든 격차의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두 개의 숫자가 겹치는 지점이 나온다.
하나는 얼마나 많은 사람이
나라를 되찾겠다고 나섰는가,
다른 하나는 그 나라를 팔아넘긴 사람들을
얼마나 처벌했는가.
먼저 첫 번째 숫자다.
독립운동 측 집계에 따르면
3·1운동 이후 3개월간
202만 3,089명이 시위에 참가했다.
시위 횟수 1,542회,
사망자 7,509명,
부상자 15,961명,
피체포자 46,948명.
불에 타고 헐린 민가가 715호,
교회가 47개소,
학교가 2개교였다.
조선총독부의 공식 집계는
이보다 훨씬 축소돼 있다.
106만 명 참가,
진압 과정 사망 553명,
체포 12,000명.
두 통계는 집계 기간과 집계 주체의 입장이 달라
단순 비교는 어렵지만,
어느 쪽을 보더라도 일제강점기 전체를 통틀어
유례없는 규모의 독립운동이었다는 데는 이견이 없다.
10년 뒤,
광주에서 또 하나의 물결이 일었다.
1929년 11월 3일 나주역 사건을 계기로
광주에서 시작된 학생운동은 전국 194개교,
학생 5만 4천여 명을 움직였다.
퇴학 처분자 582명,
무기정학 2,330명,
피검자 1,642명.
3·1운동 이후 최대의
대일민족항쟁이라는 평가를 받는 이유다.
당시 조선총독부의 최초 기록은
참가 학교를 194개로 잡았지만,
이후 광주광역시교육청이
2006년 재조사를 통해
320개교를 새로 찾아냈고,
학생독립운동기초자료발굴팀 등의
추가 발굴로는 350여 개의
조선인 관련 학교가 참여한 것으로 확인됐다.
100년 가까이 지나도록,
규모는 여전히 갱신되고 있다.
이 두 번의 물결이 만들어낸
독립운동의 유산이 지금 어디까지 왔는가?
2026년 3월 현재 정부가 공식 인정한
독립유공자는 18,763명이다.
그리고 이 숫자는 지금도 늘어나는 중이다.
제주에서는 2024년 7월 마무리된
'제주 독립운동가 발굴·선양 용역'을 통해
서훈을 받지 못한 340명이 새로 확인됐다.
아직 이름조차 국가에 등록되지 못한 사람들이 있다는 뜻이다.
이제 두 번째 숫자로 넘어갈 차례다.
이 나라를 팔아넘긴 사람들을,
우리는 얼마나 처벌했는가?
해방 후 국회는
반민족행위처벌법을 만들고
반민특위를 출범시켰다.
목표는 명확했다.
친일반민족행위자 약 7천여 명을 조사하는 것.
1949년 1월 8일,
화신백화점 사장 박흥식의 검거를 시작으로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갔다.
반민특위 산하 특별경찰대는
일본군 입대를 선전한 최남선,
이광수 같은 인물들도 검거해 재판에 회부했다.
결과는 참담했다.
실제 취급한 사건은 682건.
전체 조사 대상 7천여 건의
10%도 되지 않았다.
영장 발부 408건,
체포 305명,
미체포 173명,
자수 61명.
검찰 송치 559건,
기소 221건.
재판까지 종결된 건 38건.
체형 12건,
이 가운데 무기징역 1건과
사형 1건이 포함됐다.
공민권 정지 18건,
무죄 6건,
형 면제 2건.
최고형인 사형을 선고받은
일제 고등경찰 출신 김덕기조차
6·25 전쟁 직전 감형으로 풀려났다.
체형을 받은 12인 전원이
보석이나 형집행정지로 1950년
6·25 전쟁이 터지기 전에 모두 석방됐다.
결국 반민법으로
끝까지 처벌받은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왜 이렇게 됐는가?
한반도를 분할 점령한 미군정은
행정 공백을 메우기 위해
친일 관료들을 그대로
자문과 행정 인력으로 재채용했다.
국내 정치 기반이 약했던 이승만은
부족한 기반을 메우려 친일 경력자들과 손을 잡았다.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을 둘러싸고
정치세력이 좌우로 나뉘자,
친일파들은 즉시 독립과 신탁통치 반대를 주장한
자신들이 애국자라고 선전하기 시작했다.
친일파 청산은 새 국가 수립에 앞서
먼저 해결해야 할 과제에서 밀려났다.
1949년 5월 말,
이승만은 직접
김상덕 반민특위 위원장의 집을 찾아갔다.
보통 위원장을 불러내던 입장이었던 그가
은밀히 찾아가 건넨 카드는
감투를 이용한 흥정이었다.
친일 피의자들을 대충 조사해서 내보낸 뒤
정부로 들어오면 장관을 시켜주겠다는 제안이었다.
독립운동가들을 잔혹하게 고문해 죽이던
친일 경찰들을 기억하던 김 위원장은 분노하며 거절했다.
회유가 실패하자
'6월 공세'가 시작됐다.
1949년 6월 2일,
친일 세력의 사주를 받은 관제 시위 군중들이
국회 앞에서 반민특위 요원을 비방하며
체포된 반민족행위자들의 석방을 요구했다.
다음날에는 반민특위 사무실을 습격하려다
특경대가 공포탄을 쏘며 해산시켰다.
특경대는 주동자가 서울시경 사찰과장
최운하라는 사실을 밝혀내
그와 선동자 20여 명을 연행했다.
그러자 서울 시내 각 경찰서의
사찰 경찰 150여 명이
특경대 해산을 요구하며
집단 사표를 제출,
반민특위에 정면으로 대항했다.
6월 6일,
특별경찰대는 강제 해산당했다.
반민특위는 사실상 기능을 상실했다.
곧 국회는 반민법의 공소시효를
1950년 6월에서 1949년 8월로
앞당기는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같은 해 9월,
특별조사위원회와 특별재판부,
특별검찰부는 완전히 해체돼
대법원과 대검찰청으로 업무가 이관됐다.
방해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당시 대법원장 김병로,
검찰총장 권승렬,
국회의장 신익희를 포함한
요인 15명을 암살하려는 모의까지 있었다.
실행을 맡았던 백민태가
자수하면서 다행히 좌절됐다.
7천 명을 조사하겠다던 위원회는,
활동을 시작한 지 1년도 채 되지 않은
1949년 8월 31일 공식 해체됐다.
결국 아무도 처벌하지 못한 채였다.
같은 시기,
다른 나라는 어땠을까?
프랑스는 나치 부역자 처리에서
9만 8천 명에게 유죄를 선고하고
1,500명을 실제로 처형했다.
다른 집계로는 부역자 처리 대상이
30만 명에 이르렀고,
사형선고 6,700여 명 중
실제 사형이 집행된 건 791명이었다.
나치협력 외교관에 대한 처벌은 속전속결이었다.
1945년 1월 기준 대사급의 75%,
공사급의 40%,
참사관급의 25%가 처벌받았다.
교육성도 6천여 건의 부역 혐의를 심사해
고위공직자 357명이 직위 박탈 등
중징계를 받았다.
부역죄가 확정되면 선거권과 피선거권,
공직 진출권이 자동으로 박탈됐다.
공무원, 군, 변호사, 회계사, 교원, 노동조합, 언론과
모든 통신·정보업무에서 추방됐고,
개인기업의 대표이사는 물론
이사로도 참여할 수 없었다.
1964년에는 반인도적 범죄의 공소시효를 아예 없애,
해외 도피나 증거 불충분으로 숙청을 피했던 부역자들까지
다시 추적해 단죄했다.
물론 프랑스의 청산도 완벽하지 않았다.
초창기에는 재판도 거치지 않고 즉결 처벌하거나,
독일 남성과 사귄 여성들을 거리로 끌고 나와
조리돌림하는 집단적 광기도 있었다.
비시 정부 수반이었던 페탱은
사형선고를 받았지만 종신형으로 감형됐다.
1951년 사면법 통과와
1951~1953년 대사면으로 상당수가 감형됐고,
1964년에는 부역죄로 수감된 사람이
단 한 명도 남지 않았다.
1953년 이후에는 500여 건의 재심 청구가
모두 받아들여져 원상회복 조치가 이뤄지기도 했다.
그래도 규모의 차이는 분명하다.
프랑스 인구는 당시 약 4천만 명,
유죄 판결 9만 8천 명은 인구의
약 0.25%에 해당한다.
한국이 실제로 조사한 반민족행위자는 682건.
전체 조사 대상 7천여 건조차
프랑스가 처벌한 규모의 극히 일부였고,
그중에서도 재판에 회부된 건 79명,
유죄판결은 30명,
실형은 7명뿐이었다.
그 7명마저 재심 등을 거쳐
1950년 봄 이전에 모두 풀려났다.
나치에 부역한 언론인에 대한 처벌은 특히 엄격했다.
유력 일간지 발행인과 편집인 등에게
사형과 징역형이 선고됐고,
뚜렷한 부역 혐의가 없어도
이 시기 활동한 언론인은
다시는 언론에 종사할 수 없도록
공민권이 박탈됐다.
독일도 뉘른베르크 재판과 탈나치화 작업을 통해
최소한의 처벌 절차는 밟았다.
1945년 연합국은 독일 점령 후
정치, 경제, 교육 전 분야에서
탈나치화를 실시했다.
1946년에는 뮌헨에서
'나치와 군사주의로부터 해방을 위한 법'이 제정돼
연합국 점령지역 내 나치 관련자들을 재판에 회부했다.
물론 나치 부역자 규모가 워낙 컸고,
전후 독일이 즉각 이들을 대체할
인적 자원을 확보하기 어려웠던 현실적 제약도 있었다.
연합국조차 유능한 군인과 천재 과학자는
대충 처벌하거나 아예 처벌하지 않고
등용한 경우가 있었다.
그래도 최소한 국가 차원의 재판과 기록,
처벌의 절차는 남았다.
한국에는 그 절차 자체가,
시작한 지 1년도 안 돼 무너졌다.
청산 실패의 흔적은 과거형이 아니다.
지금도 진행 중이다.
2020년 6월 이전 기준,
정부가 공식 인정한 친일반민족행위자 가운데
국립현충원에 안장된 이는 총 11명이다.
국립서울현충원에 7명.
김백일, 김홍준, 신응균, 신태영, 이응준, 이종찬, 백낙준.
국립대전현충원에 4명.
김석범, 백홍석, 송석하, 신현준.
2020년 7월 백선엽 장군이 사망하며
서울현충원은 5명으로 늘었다.
민족문제연구소 친일인명사전 기준으로
범위를 넓히면 이 숫자는 최소 68명,
넓게는 78명까지 늘어난다.
여수순천사건을 진압한 김백일과 김창룡,
연세대 초대 총장 백낙준,
인혁당 사건의 상고를 기각하고
사형을 확정한 최장수 대법원장 민복기,
한국자유총연맹 초대 총재 정일권,
노태우 정권 국무총리 김정렬까지
이름을 올리고 있다.
서울현충원의 물리적 구조는 더 아이러니하다.
친일파가 묻힌 장군 제2 묘역 바로 아래에,
애국지사 묘역이 조성돼 있다.
1955년 흑석동에 국군묘지가 조성될 당시,
이곳에는 장군으로 예편한 일제강점기 일본군
또는 만주국 간도특설대 출신자들이 다수 묻혔다.
독립운동가들의 유해가 이곳에 안장되기 시작한 건
그보다 한참 뒤인 1964년부터였다.
이 법에 따라 1963년 독립장을 받은 김재근이
다음 해 사망하며 최초로 국군묘지에 안장됐다.
친일파들이 먼저 묻힌 곳에,
독립운동가들이 뒤늦게 합류한 셈이다.
강제 이장은 지금도 불가능하다.
현행 국립묘지법상 6·25전쟁 등에 기여했다는 이유로
안장 자격이 취소되지 않는 한,
유족이 스스로 이장하지 않는 이상
강제로 손댈 수 없다.
2016년부터 이들을 국립묘지에서
퇴출하기 위한 법안이 발의됐지만,
20대 국회에서도 상임위원회 문턱을 넘지 못했다.
광복회와 민족문제연구소, 군인권센터 등
시민단체는 일제강점기를 미화하는 자를
형사처벌할 수 있는 친일찬양금지법 제정과,
국립묘지에 안장된 친일·반민족 인사의 묘지에
친일행적비를 설치할 수 있도록 하는
국립묘지법 개정을 계속 추진하고 있다.
물론 이 문제가
단순하지만은 않다는 지적도 있다.
김백일은 간도특설대 복무 이력으로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분류돼 있지만,
6·25 전쟁 중 한국군 제1군단장으로
흥남 철수작전 당시 미군 제10군단장
에드워드 알몬드를 끈질기게 설득해
피난민들을 수송선에 태우도록 만든 인물이기도 하다.
위험을 무릅쓰고 10만 명에 이르는
피난민을 구한 공적이 있다.
일제강점기의 과오와
대한민국에서 세운 공로를
어떻게 저울질할 것인가는,
안장 자격만으로 단칼에 결정하기
쉽지 않은 질문이라는 반론이다.
그렇더라도 하나는 분명하다.
안상호는 친일인명사전에도,
정부 공식 명단에도 없는 인물이다.
그런데도 그의 증손녀는
광고 계약이 끊기고 인터뷰가 취소됐다.
정부가 공식적으로
친일반민족행위자라고 못 박은 최소 11명,
넓게 잡으면 68~78명은
지금도 국립묘지에서 매년
현충일 예우를 받는다.
이 비대칭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친일 자본은 해방 이후에도 사라지지 않았다.
화신그룹 박흥식은
화신연쇄점 사업을 확장하며
조선식산은행에서 3천만 원을 대출받았다.
한반도 경제침략의 본거지였던 식산은행에서
거금을 빌렸다는 것 자체가,
일제 침략행위에 적극 동참한다는 의미였다.
해방 후에도 그의 기업 활동은
변함없이 이어졌다.
조선비행기공업을 조선기계공업으로 바꿔
쌍용그룹 계열사에 매각했고,
화신무역주식회사를 세워
홍콩 등지에 해산물과 인삼을 수출했다.
재단법인 흥한재단도 세웠다.
경성방직 김연수의 이력은 더 상세하다.
해방 이후의 한 조사에 따르면
김연수 본인과 경성방직
또는 방계회사 명의로 낸
헌금 총액은 80만 원을 넘었다.
이는 1941년 경성방직의
한 해 순이익에 맞먹는 금액이었다.
그는 관직을 통해서도 협력했다.
1933년 경기도 관선의원,
1939년 만주국 명예총영사,
1942년 조선총독부 자문기관인
중추원 참의를 지냈다.
해방 후 그는
전국경제인연합회 초대 회장이 됐다.
당시 국방헌금 수십만 원을 내며
"일억일심으로 황국 목적 달성에 매진하겠다"고 했던 인물이,
대한민국 재계를 대표하는 단체의 첫 수장이 된 것이다.
가족 기업 삼양에서는
그의 후손 12명이 대표나 임원을 지냈다.
동아일보가 여전히 조중동으로 불리며
건재를 과시하는 사실,
한민당이 민주당의 모체가 돼
영향력을 유지한 사실은,
동아일보와 한민당을 배경에 둔
김연수가 오랫동안 재벌의 위상을
유지할 수 있었던 비결을 짐작하게 한다.
정부가 발표한 친일파 1,006명의 가계도를
뉴스타파가 분석한 결과는 더 촘촘하다.
무려 35개 가문이 혼맥으로 얽혀 있었다.
친일파 김성수의 손자 김재열(동아일보 김병관 회장 차남)과
친일파 김신석의 외증손녀 이서현(삼성그룹)이 결혼했다.
친일파 현준호는 아들 현영원을
당시 재계 실력자였던 김용주의 딸
김문희와 결혼시켰다.
김문희는 김무성 전 새누리당 대표의 누나다.
현영원과 김문희의 딸 현정은은
다시 현대가 5남
고 정몽헌 회장과 결혼했다.
친일 집안이 아니더라도
대기업 재벌가와 혼맥을 통해
권세를 굳힌 사례도 있다는 뜻이다.
이렇게 이어진 인맥은
정부의 최고위직으로까지 뻗어갔다.
친일 후손 1,177명 가운데
정치인 31명,
법조인 30명,
장·차관 및 1급 이상
고위공직자 42명이 나왔다.
4대 대통령 윤보선은
친일파 윤치소의 아들로,
본인 역시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를 지냈고
'황국신민의 십자군'을 기치로 내건
조선기독교연합회 평의원이었으며
국방헌금을 헌납한 이력이 있다.
호남 출신 최초의 국무총리였던
전두환 정권의 김상협은
친일파 김연수의 아들로,
조선총독부 조선산업경제조슬롯 위원과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이사를 지내며
거액의 국방헌금을 헌납했다.
노태우 정권의 국무총리 이현재는
친일파 김서규의 손녀사위였다.
금융계에도 구용서 초대 한국은행 총재를 비롯해
62명이 이름을 올렸다.
청산하지 못한 자본은,
청산하지 못한 채로
다음 세대의 권력이 됐다.
이 모든 흐름 속에서,
하나의 변화가 예고돼 있다.
정부는 최근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의
국가귀속 등에 관한 특별법을 공포했다.
시행일은 오는 12월 3일이다.
2010년 활동을 끝낸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원회를 다시 구성하고,
친일재산 자체뿐 아니라 이미 처분한 경우
그 대가까지 추적해 환수할 수 있도록 하는 게 골자다.
법무부는 지난 6월 22일
조사위 설립준비단을 출범시켰다.
새 법이 정한 친일재산의 정의는 명확하다.
러일전쟁 개전이 시작된
1904년 2월 8일부터 1945년 8월 15일까지,
친일반민족행위자가 일제에 협력한 대가로 취득하거나 상속받은 재산,
또는 친일재산임을 알면서 유증·증여받은 재산이다.
이 기간 취득한 재산은
친일행위의 대가로 취득한 것으로
추정한다는 조항까지 명시돼 있다.
기존 법 아래에서도
친일 후손들의 재산환수 불복 소송은
대부분 국가가 이겼다.
법무부에 따르면 관련 소송 97건 중 93건이 종결됐고,
91건에서 국가가 승소했다.
승소율 97.8%다.
2008년 친일반민족행위자 후손들이
헌법소원을 제기했지만,
이후 대법원은 친일재산 국가귀속의
공익적 필요성을 근거로
후손들의 소멸시효 주장을
권리남용으로 판단하면서
환수 소송의 법적 환경이 크게 바뀌었다.
지난 4월 22일 법무부가
임선준 후손을 상대로 한 소송에서
전부 승소한 게,
이 새 판례 확립 이후
첫 성과였다.
임선준은 고종의 강제 퇴위와
정미7조약 체결에 협력해
일본으로부터 자작 작위를 받고
한국병합기념장을 서훈받은 인물이다.
그의 후손은 여주시 소재 토지를 상속받아
1993년부터 2000년 사이 매각했고,
법무부는 매각대금 약 5,300만 원에 대한
반환청구 소송을 제기해
서울서부지법에서 승소했다.
문제는 이겨도 실제로 돌려받는 재산이
미미하다는 현실적 격차였다.
그래서 이번에 시행되는 새 법은,
재산을 이미 팔아버린 경우에도
그 처분 대가까지 추적해
환수할 수 있도록 범위를 넓혔다.
안상호의 경우
이 법률상 환수 대상자로 인정되고,
그가 일제강점기에 취득한 특정 재산이 확인되며,
그 재산이 후손에게 어떻게 이어졌는지 추적된다면
환수 대상이 될 수 있다.
12월부터 부활하는 조사위가
안상호를 새 조사 대상으로 삼을지,
그의 1904년 이후 재산 형성 과정까지
들여다볼지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공교롭게도 그 답을 지켜보는 시점이,
이번 논란이 터진 바로 지금이다.
여기서 짚어야 할 게 하나 있다.
헌법 13조 3항은 분명히 말한다.
모든 국민은 자기의 행위가 아닌
친족의 행위로 인하여 불이익한 처우를 받지 아니한다.
이 조항이 헌법에 자리 잡기까지도
길고 굴곡진 역사가 있었다.
연좌제는 사실 1894년 갑오개혁 때
"죄인 본인 외 연좌 형률 일체 금지"로
이미 한 번 명문상 폐지됐다.
박정희 정권도
두 차례나 폐지를 선언했다.
1963년 민정 이양 대선 공약으로,
1971년 대선 직전에는 아예
"완전 폐지"를 발표했다.
그런데도 실제로는
월북자, 부역자, 좌익사범의 '친족'이라는 이유만으로
취업과 여권 발급이 제한된 국민이 약 75만 명에 달했다.
법적 폐지 선언과
실제 행정 관행 사이의 괴리가
오래 지속됐다는 뜻이다.
공식적으로 완전히 폐지된 건
1980년 8월 22일,
실제 시행은 1981년 3월 25일부터였다.
시행 첫날 내무부는
8·15 직후 혼란과
6·25 등 특수 정치상황에서 발생한
'신원특이자' 기록을 일제 정리하고,
'정리·말소해야 할 전과자' 기록도
모두 삭제했다고 발표했다.
대상은 약 67만 명이었다.
후손은 조상을 선택해서 태어나지 않는다.
그 자체가 원죄가 될 수는 없다.
하지만 이번 논란에서 대중이 반응한 지점은,
안상호가 하영의 증조부라는 사실 자체가 아니었다.
검증되지 않은 서사를 여러 방송에서
반복해서 자랑거리로 꺼내 든 태도였다.
그리고 그 서사가 무너지자
소속사 뒤에 숨어 두루뭉술한 입장만
내놓은 대응이었다.
친일재산 환수도
마찬가지 원리로 작동한다.
이 법의 목적은 후손을 처벌하는 게 아니다.
친일의 대가로 취득한 재산을
원래 자리로 되돌리는 일이다.
법원이 소멸시효 항변을 권리남용으로 판단하며
국가 승소를 이어가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연좌제를 금지하는 헌법 정신과,
부당하게 취득한 재산을 환수하는 특별법은
서로 충돌하지 않는다.
전자는 사람에 대한 바카라임을 묻지 않겠다는 원칙이고,
후자는 재산에 대한 원상회복을 요구하는 원칙이다.
올해는 제81주년 광복절이다.
1919년 3월,
독립운동 측 집계로
최대 202만 명이 거리로 나섰다.
사망자만 7,509명이었다.
1929년 11월,
광주에서 시작된 학생운동은
전국 194개교,
최소 5만 4천여 명의 학생을 움직였다.
이후 재조사로 확인된 참여 학교는 320개교,
넓게는 350여 개교까지 늘어났다.
그리고 2026년 8월,
정부가 새로 확정한 독립유공자는 18,763명이다.
지금도 제주에서만
미서훈 독립운동가 340명이
새로 발굴되고 있다.
아직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은 사람들이 있다는 뜻이다.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정부가 공식 인정한 숫자는 1,006명.
민간 친일인명사전에는 최대 4,800명 가까이 등재돼 있다.
이 가운데 국립묘지에서
지금도 예우받는 사람이
최소 11명, 넓게 잡으면 78명이다.
숫자로만 보면 답은 이미 나와 있다.
7천 명을 조사하겠다던 위원회가 남긴 건
실형 12명, 최종 처벌 0명이었다.
그 빈자리를 채운 건 재벌이 되고
대통령이 되고
국립묘지에 묻힌 이름들이었다.
독립운동가 후손의 절반이
월 200만 원도 벌지 못하는 사이,
친일 후손의 43%는
강남 3구에 집을 두고 있었다.
그리고 그 빈자리 옆에서,
이번 광복절에도 누군가는 조상의 이름을
자랑스럽게 방송에서 꺼냈다가 사과문을 썼다.
정작 국립묘지에 묻힌 이름들은,
올해도 아무 말이 없다.
우리는 언제쯤 그 이름들에게
같은 질문을 던지게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