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지키지 않는 비밀

죽어가는 영화들

by다소느림

톰 홀랜드가 관객들에게 부탁한 것


톰 홀랜드가 카메라 앞에서 말했다.

"스포일러 빌런은 되지 마세요."

제이콥 배덜런과 존 번탈도

옆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국내 100만 관객 돌파를 기념한 특별 영상이었다.

캐주얼한 옷차림, 웃는 얼굴, 가벼운 말투.

그런데 내용은 가볍지 않다.


배우가 직접 나서서 관객에게

스포일러 자제를 부탁하는 장면.

낯설지 않지만,

여전히 이상하다.


생각해보면 이상한 부탁이다.

영화를 만든 건 감독과 제작사고,

홍보를 하는 것도 배급사인데

정작 "제발 참아달라"는 부탁은 배우가,

그것도 직접 얼굴을 비추며 해야 한다.


회사의 시스템이 못 막은 걸,

개인의 호소로 메우는 셈이다.

이 장면 하나가 이미

스포일러 문제의 본질을 보여준다.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없고,

부탁할 수 있는 사람만 있다는 것.


답은 간단하다.

막을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7월 31일 오전 6시 5분.

'스파이더맨: 브랜드 뉴 데이'의

고화질 불법 복제본이 X(트위터)에 올라왔다.


삭제되기까지 걸린 시간은 아홉 시간 남짓.

그사이 노출 수 590만 회.

좋아요 14만 3000개.

재게시 1만 건 이상.


숫자를 다시 읽어보자.

한국 성인 인구의 10분의 1이 넘는 규모가,

단 아홉 시간 만에 한 편의 영화를

공짜로 스쳐 지나갔다.


삭제된 뒤에도 다른 계정에서

복제본이 계속 재업로드됐다.


버라이어티는 이걸

"완전히 막지는 못했다"고 전했다.


완전히, 라는 표현이 눈에 걸린다.

디즈니와 소니, 세계 최대 콘텐츠 기업 두 곳이

힘을 합쳐도 완전히는 안 된다는 뜻이다.


같은 주,

크리스토퍼 놀런의 신작

'오디세이'도 같은 일을 당했다.


할리우드 대작이 개봉과 동시에 통째로 털리는 일.

이제는 예외가 아니라 패턴이다.


한 편이 아니라 두 편.

같은 주에.


서로 다른 배급사,

다른 감독,

다른 장르인데도

결과는 같았다.


이건 특정 영화의 보안 실패가 아니라

구조의 문제라는 뜻이다.


마블이 숨기는 방식


마블 스튜디오는 원래 비밀이 많은 회사다.

배우에게 전체 각본을 주지 않는다.

자기 파트 대사만 준다.

때로는 가짜 각본을 건넨다.


톰 홀랜드는 자신이 스크린에서

누구와 싸우는지도 모른 채

연기한 적이 있다고 했다.


CG로 나중에 채워 넣을 상대역을,

촬영 당시엔 아무도 몰랐다는 뜻이다.

녹색 스크린 앞에서 허공에 주먹을 휘두르며,

편집실에서야 완성될 장면을 상상만으로 연기하는 배우.


전체 각본을 손에 쥔 사람은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 한 명뿐이었다는 얘기도 있다.

심지어 리뷰어들에게도 엠바고를 걸었다.


정해진 날짜,

정해진 시간 전까지는

단 한 줄도 쓸 수 없게.


제임스 건 감독조차 예전에

"스포일러"와 "아빠"라는 단어를 트위터에 올려

스스로 스포일러를 자처한 적이 있을 정도로,

마블 팬덤 내부에서도 정보 통제는 게임처럼 다뤄진다.

그렇게까지 지켰는데도 뚫렸다.


590만 회.

숫자가 말해준다.


비밀주의로 버틸 수 있는 시대는 지났다.

각본을 아무리 쪼개고,

가짜 대본을 아무리 뿌려도,

결국 완성된 필름 파일 자체가

어딘가의 서버에서 새어나가는 걸

막을 수는 없다.


비밀주의는 촬영장의 배우와

스태프를 통제할 수는 있어도,

개봉 이후 디지털 파일을 손에 쥔

익명의 누군가까지 통제하지는 못한다.


넷플릭스는 다른 길을 택했다.


'기묘한 이야기' 마지막 시즌 피날레는

스트리밍 공개와 동시에

북미 350개 극장에서

팬 이벤트로 상영됐다.


반응이 좋자 상영관을 620개 이상으로 늘렸다.


3500회차 전석 매진.

새해 전야 단 하루,

극장 상영만으로

2000만~2500만 달러를 벌었다.


넷플릭스 자체 기록이다.


숨기는 대신,

전 세계를 동시에 터뜨려버리는 전략.

정보 시차 자체를 없애면

스포일러도 설 자리가 없다.


더퍼 형제는 인터뷰에서 마지막 장면이

이미 6~7년 전에 정해져 있었다고 밝혔다.


결말을 그렇게 오래전부터 확정해두고도,

정작 공개 전략은 "숨기기"가 아니라

"동시에 다 같이 보기"를 택한 셈이다.


비밀주의와 동시공개.

방향은 정반대지만 목적은 같다.

누군가 먼저 보고 떠벌리기 전에,

판을 통제하겠다는 것.


마블은 정보를 좁혀서 지키려 했고,

넷플릭스는 정보를 넓혀서

무의미하게 만들었다.


결과만 놓고 보면

후자가 조금 더 똑똑했는지도 모른다.


'호프'는 정말 스포일러 때문에 흥행이 꺾였나


국내에서도 최근 비슷한 소란이 있었다.


나홍진 감독의 '호프'.

개봉 12일 만에 관객 340만.

올해 개봉작 중 가장 빠른 흥행 속도였다.

제작비 500억 원을 넘긴 역사적인 대작.


칸 영화제 필름마켓에서

해외 선판매로만 200억 원대 중반을 계약해,

한국 영화 사전 판매 금액 신기록까지 세운 작품이다.

업계의 기대를 한 몸에 받은 영화였다는 뜻이다.


그런데 기사들은 하나같이

"기대에는 못 미쳤다"고 썼다.


이유로 지목된 게 스포일러 논란이었다.

결말과 반전을 미리 공개하는 게시물들이

SNS와 커뮤니티에 돌았다.


심지어 감독 본인도 예고편에

핵심 내용이 담긴 걸 두고,

개봉 후 인터뷰에서 그게

자신의 의도가 아니었다는 뉘앙스를 내비쳤다.


마케팅팀이 만든 예고편이 오히려

감독의 이야기를 미리 까발린 셈이다.


이 지점이 흥미롭다.

스포일러의 진원지가 항상

악의적인 유출자만은 아니라는 것.


때로는 영화를 팔아야 하는 사람들 자신이

그 영화의 가장 큰 스포일러 유포자가 된다.

여기서 멈추고 물어야 한다.


정말 스포일러 때문이었나?


기사를 다시 읽어보면

"호평도 공존한다",

"극단적으로 엇갈리는 평가만큼

흥행 흐름 역시 아주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중간 수준을 유지"라는 표현이 나온다.


스포일러 논란보다 작품 자체에 대한

호불호가 갈렸다는 쪽에 가깝다.


340만이라는 숫자 자체는 사실 나쁘지 않다.

올해 개봉작 중 가장 빠른 흥행 속도였다는 걸

다시 떠올려보자.


그런데도 언론은

"기대에는 못 미쳤다"는 프레임을 씌웠다.


제작비 500억 원을 넘긴 대작이 기대만큼 못한 이유를

스토리텔링의 개연성 문제로 설명하는 것과,

외부의 스포일러 유포자 탓으로 돌리는 것.


어느 쪽이 제작사와 언론 모두에게

더 편한 서사인지는 뻔하다.

전자는 감독과 제작진의 실패를 인정하는 일이고,

후자는 익명의 누군가를 악당으로 세우는 일이다.


스포일러는 때로 콘텐츠 실패에 대한

편리한 면죄부로 소비된다.

인과관계가 검증되지 않은 채로.


누구도 "스포일러 때문에 몇 명이 관람을 포기했는가"를

숫자로 보여준 적이 없다.


상관관계와 인과관계를 구분하지 않은 채,

서사만 먼저 퍼진다.


법은 촬영만 본다


국내법이 실제로 처벌하는 건

'촬영'과 '유포'다.


극장에서 몰래 찍으면

1년 이하 징역 또는 1000만 원 이하 벌금.

저작권자 고소 없이도 수사와 기소가 가능한 비친고죄다.


촬영을 시도하다가 직원에게 적발돼 영상을 삭제했더라도,

미수범으로 처벌될 수 있다는 점도 눈여겨볼 만하다.


찍은 걸 온라인에 올리면

복제와 공중송신이 동시에 인정돼

처벌 수위가 뛴다.


5년 이하 징역,

5000만 원 이하 벌금.


찍는 것과 올리는 것 사이에

처벌 격차가 다섯 배.

법은 '어디까지 확산됐는가'를

가장 무겁게 본다는 뜻이다.


그런데 글로만 결말을 요약해서

올리는 행위는 어떤가.


국내엔 아직 명확한 판례가 없다.


법률 상담에서는 저작권 문제나

위계에 의한 업무방해죄가

성립할 여지가 있다는 정도로만 설명한다.


영화를 보고 후기를 남기는 건 자유지만,

스크린에 휴대전화를 드는 순간부터는

저작권법의 영역이라는 변호사의 설명도 있었다.


사진 한 장이라도 결말이나

반전 같은 핵심 장면이라면,

분량이 적다는 이유만으로

면바카라되기는 어렵다는 것.


여지가 있다는 말은,

확실하지 않다는 뜻이기도 하다.

확실하지 않은 법은 실효성 있는

억지력이 되지는 못한다.


일본은 한 발 더 나갔다.

도쿄지방법원이 올해 4월,

영화 줄거리를 상세히 정리해

올린 사이트 운영자에게 유죄를 선고했다.


'고질라-1.0'과 애니메이션 '오버로드Ⅲ'의

줄거리를 3800자 분량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2022년 광고 수익 약 2억 2300만 원.

2023년 약 3억 3400만 원.

징역 1년 6개월에 집행유예 4년,

벌금 100만 엔.


검찰 구형과 같은 수준이었다.


피고 측은 "글만으로는 영상과 음악,

배우 연기가 만들어내는 영화의

본질을 전달할 수 없다"며 무죄를 주장했다.


재판부는 이걸 받아들이지 않았다.


원작에 근거해 본질적인 특징을

느낄 수 있는 다른 저작물을 창작했다면,

그건 각색이고 저작권 침해라는 논리였다.


저작권자가 정당한 대가를 받을 기회를 잃게 하고,

문화 발전을 파괴할 우려가 있다는

문장까지 판결문에 담겼다.

텍스트 스포일러도 유죄가 될 수 있다는 첫 판단.


소셜미디어를 통해

누구나 콘텐츠를 생산하는 지금 환경에서,

앞으로 규제 범위를 둘러싼 논란이

예상된다는 분석도 나왔다.


한국엔 아직 이런 판례가 없다.

스포일러가 돈이 되는 비즈니스로 자리잡은 동안,

법은 촬영이라는 좁은 문 앞에서만 서 있었다.


카메라를 들이대는 사람만 쫓다가,

정작 가장 큰 규모로 돈을 버는

텍스트 스포일러 시장은

손도 못 대고 있는 셈이다.


결말 포함, 이라는 산업


유튜브에 '결말 포함'을 검색하면

자동완성으로 뜨는 단어가 있다.


'결말포함 영화리뷰 야함'.


조회수 순으로 정렬하면

선정적인 제목의 영상들이

백만 단위 조회수를 찍는다.


'여성과의 동거',

'변태가 초능력자' 같은

자극적인 키워드.


영화에 있지도 않은 자막을 붙여

성희롱, 성폭행, 성상납을 연상시키는

썸네일까지 합쳐진 영상들.


나이대를 가리지 않고

모든 사람에게 퍼지는 SNS 특성상,

이건 단순한 저작권 문제를 넘어선다.


2020년대 들어

'결말 포함'이라는 단어가 정착하면서,

제대로 된 리뷰와 스포일러 장사의 경계가

흐려졌다는 지적이 나온 지 오래다.


장편 영화를 짜깁기해 요약본을 만드는

'패스트 무비' 유튜버들.


저작권 문제가 필연적으로 따라붙는데도,

코로나 이후 영화 시장 침체와 맞물려

오히려 이런 콘텐츠를 찾는 사람이 늘었다.


한 20대 여성은 이렇게 말했다.

"드라마 유입이 어렵다."

"처음에 흥미가 돋지 않으면 보지 않는다."

"드라마 길이가 길다고 느껴질 때도 있어서 집중이 잘 안 된다."

"10분 동영상도 길다고 느낀다."

"빨리 결말을 보고 싶다."


다만 정말 취향에 맞을 땐

유튜브 콘텐츠로 먼저 보고

원작으로 유입되기도 한다고 덧붙였다.


음미보다는 겉핥기식 소비지만,

바쁜 현대 슬롯에서 시간을

효율적으로 쓰고 싶은 욕구가 더 강하다는 것.


평론가는 이걸 이렇게 해석했다.


콘텐츠를 소비하고 싶은 욕망이

우회적으로 발현된 것이라고.

현대인은 근본적으로 소비할 여유가 없다고.

시간적으로도, 심리적으로도.

그래서 감상 대신 정보만 흡수한다고.

유튜브에 올라온 요약본은 대부분 무료라,

정식 콘텐츠 입장에서는

명백한 손해라는 지적도 있었다.


일본에서는 이런 '10분 요약' 영상을 만든 유튜버가

저작권법 위반으로 첫 징역형을 받았다.


한국은 아직이다.

매주 수백만 조회수가 쌓이는 동안,

법은 여전히 뒤에서 걸어오고 있다.


결말 포함 콘텐츠가 산업이 됐다는 건,

스포일러를 원하는 수요가

그만큼 크다는 뜻이기도 하다.


아무도 스포일러를 원하지 않는다면,

이 산업 자체가 애초에 성립할 수 없었을 것이다.


우리는 스포일러를 정말 싫어하는가?


여기서 모순이 하나 있다.


사람들은 스포일러를 당하면 화를 낸다.

동시에 스스로 스포일러를 검색하기도 한다.

'스포 당하면 재미없다'는 말과

'어차피 검색할 거 미리 본다'는 태도가

한 사람 안에 공존한다.


UC 샌디에이고의

니컬러스 크리스틴펠드 박사팀이 2011년 실험했다.


반전이 있는 단편소설을 참가자들에게 읽혔다.

일부에게는 미리 결말을 알려줬다.

결과는 예상과 달랐다.


결말을 미리 알아도

재미가 반드시 줄어들지는 않았다.


심리학은 이걸 몇 가지로 설명한다.


하나는 무드 매니지먼트.

스포일러가 일종의 비인지적 둔감화 전략이자

인지적 대처 전략으로 기능한다는 것.


불안한 전개를 앞두고 있을 때,

결말을 미리 알아두면 오히려

안심하고 감상할 수 있다는 논리다.


스릴러나 공포 장르에서,

결말을 알고도 다시 보는 사람들이

많은 이유이기도 하다.


다른 하나는 슬롯적 위치의 문제.

스포일러를 피하는 태도는

'경험의 순수성'을 지키려는 시도.


스포일러를 퍼뜨리는 행위는

'정보 권력'을 과시하는 방식.


결국 스포일러는 줄거리를

아느냐 모르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집단 속에서 내가 어디에 서 있는지를

드러내는 심리적 행위에 가깝다.


누가 먼저 봤고,

누가 아직 못 봤는지.


그 순서 자체가 슬롯적 서열처럼 작동한다.


'노스포'라는 규범이 지금처럼 강하게 자리잡은 것도,

그래서일 것이다.


정보를 아는 사람이 모르는 사람을 배려하는 태도로,

이 규범은 일종의 문화적 예절로 소비된다.

그런데 정작 이 예절을 어기는 사람들의 심리도

한번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스포일러를 던지는 사람들 중 상당수는,

그 작품이 얼마나 훌륭한지를 알기 때문에

그런다는 분석도 있다.


재미없는 이야기는 아무리 반전을 거듭해도

사람들이 굳이 스포일러까지 하며 화제 삼지 않는다.

스포일러가 문제가 되는 작품일수록,

역설적으로 그 작품이 잘 만들어졌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레딧은 밴을 때렸다


2015년 '스타워즈: 깨어난 포스' 개봉 당시.

레딧 모더레이터들은 스포일러를 올린 유저를 곧바로 밴했다.


"지금까지 수십 명을 밴했다"고 한 모더레이터가 밝혔다.

"우리 모두 이제쯤이면 스포일러를 당했을 것 같다"는

자조적인 코멘트까지 남기면서.


서브레딧 단위로 스포일러 태그와

블러 처리가 규칙으로 못박혀 있고,

어기면 실제로 계정이 날아간다.


자율규제가 아니라 강제규제에 가깝다.


룰을 어긴 사람에게 두 번째 기회를 줄지 말지조차,

명확한 규정으로 정해져 있지 않을 만큼 단호하다.


한국 커뮤니티는 다르다.


디시인사이드도, 에펨코리아도

갤러리와 게시판마다 제각각이다.


통일된 규칙이 없다.

스포일러를 올릴지 말지는

결국 개인의 매너에 맡겨진다.


왓챠피디아 정도가 예외적으로,

이미 평가를 매긴 영화에 한해

스포일러가 포함된 평을

자동으로 가려주는 기능을 운영한다.


하지만 이건 자신이 이미 본 영화에만

적용되는 제한적 장치일 뿐,

아직 보지 않은 영화의 스포일러를

원천 차단하지는 못한다.


매너에 기대는 시스템은,

매너 없는 한 사람 앞에서 무력하다.

플랫폼이 나서지 않으면,

결국 개인 대 개인의 신뢰 싸움으로 남는다.


오징어 게임이 보여준 다른 그림


시즌2 공개를 앞둔 어느 날,

배우 박규영이 자신의 SNS에 촬영장 사진을 올렸다.


스포일러라는 논란이 붙었다.

논란이 커지자 바로 삭제했다.

외부의 악의적 유출이 아니었다.

내부자의 사소한 부주의였다.


스포일러는 이렇게도 터진다.

완벽하게 통제된 것처럼 보이는 초대형 프로젝트조차,

결국 사람이 하는 일이라 빈틈이 생긴다.


오징어 게임은 애초에 전 세계 동시 공개다.

브랜드 뉴 데이 같은 극장 개봉작과는

구조 자체가 다르다.


국가별 시차가 없으면,

"내가 남들보다 먼저 봤다"는 정보 우위도 사라진다.

정보 우위가 없으면,

퍼뜨리고 싶은 욕구도 줄어든다.


극장 개봉의 시차가 스포일러를 낳고,

동시 공개가 스포일러를 줄인다면

결국 문제는 관객의 매너가 아니라

유통 구조일지도 모른다.


극장 개봉은 나라마다,

심지어 같은 나라 안에서도 상영관마다

조조와 심야로 시간대가 갈린다.


그 틈에서 누군가는 먼저 보고,

누군가는 기다린다.

기다리는 사람이 있는 한,

먼저 본 사람의 입은 항상 위협이 된다.


침체된 극장가에서, 유출은 더 아프다


올해 상반기 국내 극장 매출은 5790억 원.

전년 대비 41.9% 늘었다.

관객 수는 5705만 명,

34.2% 증가.


한국영화가 이 회복을 이끌었다.

매출 3702억 원,

81.7% 증가.

관객 수 3737만 명,

74.9% 증가.


팬데믹 이후 상반기 최고치.

매출 점유율은 63.9%,

관객 점유율은 65.5%까지 확대됐다.


매출 규모는 팬데믹 이전인

2017~2019년 상반기 평균의

94.2% 수준까지 회복했다.


반면 외국영화는 관객 수가 6.9% 줄었다.

매출은 '프로젝트 헤일메리',

'아바타: 불과 재' 같은

특수상영 비중이 높은 작품 덕에

겨우 2.3% 늘었을 뿐이다.


숫자를 나란히 놓고 보면 그림이 선명하다.


한국영화는 관객도 늘고 매출도 늘었는데,

외국영화는 관객이 줄고 매출만

특수상영관 프리미엄으로 겨우 버텼다.


극장에 가는 사람 자체는 늘었는데,

그 발걸음이 외화보다 한국영화로

더 많이 향했다는 뜻이다.


외화가 관객 수로는 밀리는 이 시기에,

브랜드 뉴 데이 같은 흔치 않은 외화 흥행작이

유출로 흔들렸다.


590만 회 노출이 실제 관람객 이탈로

얼마나 이어졌는지는 아무도 정확히 모른다.


다만 확실한 건 하나다.

외화가 힘을 못 쓰는 시장에서,

유출 한 번의 체감 타격은

훨씬 크게 느껴진다는 것.


한국영화가 흥행을 주도하는 지금 같은 시기에,

외화마저 유출로 발목을 잡힌다면

그 격차는 더 벌어질 수밖에 없다.


스포일러를 악당으로 만들면 편하다


정리하면 이렇다.


제작사는 비밀주의나

동시공개로 스포일러를 막으려 한다.

법은 촬영이라는 좁은 영역만 처벌하고,

텍스트 유포는 여전히 회색지대다.


유튜브에는 스포일러를 팔아

돈을 버는 산업이 자라났다.


관객은 스포일러를 싫어한다면서도 스스로 찾아본다.


플랫폼은 각자도생이고,

통일된 규칙은 없다.


그리고 언론은 종종,

흥행 부진의 바카라임을

스포일러라는 손쉬운 악당에게 떠넘긴다.


이 모든 층위를 겹쳐보면

한 가지가 보인다.


스포일러는 단일한 현상이 아니라는 것.


누군가에게는 산업의 위협이고,

누군가에게는 돈벌이 수단이고,

누군가에게는 심리적 방어기제고,

누군가에게는 편리한 알리바이다.


같은 단어를 쓰면서도,

저마다 다른 것을 지키거나 얻으려 한다.


스포일러 담론이 진짜로 향해야 할 질문은

따로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정말 이야기를 지키고 싶은 걸까,

아니면 누군가를 탓할 대상이 필요한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