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퍼센트짜리 예보

5배의 오차 그리고 900억

by다소느림

아침부터 비 소식이 있었다.

우산을 챙기고 나섰지만

비는 오지 않았다.

하루가 아니었다.

며칠 사이 같은 일이 반복됐다.


온다던 비가 안 오고,

안 온다던 비는 쏟아졌다.

단순한 체감의 문제가 아니었다.

확인해보니 이건 통계로도 뒷받침되는 사실이었다.


정말 예보가 이렇게까지 안 맞는가.


그런데 데이터를 하나씩 따라가다 보니,

다른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늦은 장마 자체의 문제도 있었고,

예보 체계의 문제도 있었고,

예보 체계와는 무관하게

기후 자체가 바뀌고 있다는 문제도 섞여 있었다.


54년 만에 손에 꼽히는 늦장마


제주는 6월 30일에 장마가 시작됐다.

남부와 중부는 7월 1일이었다.


평년보다 제주는 11일,

남부는 7일,

중부는 6일 늦은 셈이다.


전국 기상관측망이 갖춰진 1973년 이후로 따지면,

제주는 역대 세 번째로 늦은 지각 장마였고,

남부와 중부는 여섯 번째였다.


광주·전남만 따로 떼어보면

다섯 번째로 늦은 장마로 집계됐다.

54년 관측 역사에서 손에 꼽히는

늦장마라는 뜻이다.


기상청은 이 지각 장마를 6월 말부터

이미 예견하고 있었다.


당시 기상청 통보관은

정체전선이 제주 남쪽에 머물러 있고,

북태평양고기압은 일본 남쪽에 위치해

아직 서쪽으로 확장하지 못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리고 나흘 뒤,

정체전선에 동반된 비구름대가

예상보다 더 북상하면서

제주와 남부지방에 장맛비가 시작됐다.


제주 한라산 진달래밭엔 첫날 하루에만 238.5mm,

전남 완도군 보길도에는 110.5mm,

여수 거문도에는 89.5mm,

경남 남해에는 70.0mm가 쏟아졌다.


늦게 시작된 만큼,

첫날부터 이미 많은 비를 몰고 왔다는 뜻이었다.


원인은 하나가 아니다


늦장마의 원인은 복합적이다.

한반도 북쪽 상공에 자리 잡은

영하 15도 안팎의 찬 공기가

정체전선을 일본 남쪽 해상,

북위 30도 부근에 묶어뒀다.


이 찬 공기는 러시아 우랄산맥과

캄차카반도 부근에서 형성된

고기압의 영향으로 남하한 것이었다.


여기에 적도 태평양의 엘니뇨가 겹쳤다.

이화여대 예상욱 교수는 엘니뇨로

수온이 높아진 중태평양에서

활발한 대류 활동이 나타나면

북서태평양에 저기압성

순환이 만들어진다고 설명했다.


여기에 동시베리아 일대 고기압성 순환이 강화되고,

한반도 쪽으로 차고 건조한 공기가 내려오면서

북태평양고기압의 북상을 막는다는 것이다.


기상청 위탁관측기관인 고려대기환경연구소 정용승 박사는

여기에 한 가지를 더 얹었다.


엘니뇨가 전부는 아니라는 것이다.

만성적으로 진행 중인 지구온난화가

장마철 개시 시점의 불확실성을 키우는

주된 요인 중 하나라고 그는 판단했다.


실제로 이 연구소가 최근 2년간

충북 청주지역 1~6월 평균기온을 측정했더니,

2월 이후 다섯 달 연속 전년보다 높았다.


2월은 4.03도,

5월은 2.85도가 오른 채였다.


기후위기가 늦장마의 직접 원인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다만 변동성 자체를 키우는 배경이라는 데는

전문가 다수가 동의한다.


국민일보가 기상학자들에게 물었더니,

열 명 중 아홉 명이 장마가 달라졌다고 답했다.


53년 전에도, 5년 전에도 있었던 일


늦은 장마가 처음은 아니다.

1973년 전국 관측망이 갖춰진 이후,

역대 가장 늦은 장마는 1982년이었다.


제주 기준 7월 5일,

중부지방 기준으로는

7월 10일에야 시작됐다.


두 번째로 늦었던 해는 2021년,

7월 3일이다.


가장 빨랐던 장마는 정반대편에 있다.

중부지방 기준 1970년 6월 14일,

남부와 제주 기준 2011년 6월 10일이었다.


1970년에는 대만 부근에서 발생한

열대저기압이 북상하면서

사흘 연속 전국 곳곳에

비가 내리며 장마가 시작됐다.


2021년 장마는 짧고 강수량도 적었다.

전국 장마철 강수량은 227.5mm,

강수일수는 9.9일에 그쳤다.


늦게 시작된 만큼 짧고 압축된

강수 패턴이 나타났다는 분석이 뒤따랐다.


하지만 이 경향이

매년 똑같이 반복되는 건 아니다.

2020년은 정반대였다.


전국 장마철 강수량이 696mm로

최근 10년 중 가장 많았고,

강수일수는 28.5일로

1973년 이후 최다였다.


서울 기준으로는 하지인 6월 21일에 시작해

7월 29일까지 39일 가량 이어졌고,

장마철 강수량이 1,068.4mm로

1966년의 1,031.5mm 이후

역대 가장 많았다.


2023년에도 강수량이 660.2mm까지 늘었다.

평년치 356.7mm를 훌쩍 넘는 수치였고,

1973년 이후 3위 기록이었다.


강수일수는 22.1일로

평년 17.3일보다 28% 많았다.


남부지방만 놓고 보면

누적 강수량 712.3mm로 역대 1위였는데,

7월 중순 정체전선이 충청 이남 지역에

장기간 머물며 남부지방에 비가 집중된 결과였다.


반대로 마른 장마의 해도 있다.

2017년은 남부지방이 4년 연속으로

마른 장마를 겪었다.


장마 이전까지 전국 평균 강수량이

고작 186mm에 불과한 역대급 가뭄이었다.


농작물이 바짝 말라가고,

저수지와 강물이 바닥을 드러냈고,

물고기가 집단 폐사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같은 장마라는 이름 아래,

어떤 해는 마르고 어떤 해는 넘쳤다.

연대별 평균 장마 강수량을 봐도

이 널뛰기는 뚜렷하다.


1970년대 313mm,

1980년대 389mm,

1990년대 297mm,

2000년대 408mm,

2010년대 328mm.


오르내림에 규칙이 없다.


비는 줄었는데, 왜 더 위험해지는가


최근 113년간 한반도의 연 강수량은

100에서 160mm 가량 늘었다.


그런데 강수일수는 오히려 정체하거나 줄었다.

비 오는 날 수는 줄었는데 총량은 늘었다는 뜻이고,

한 번 내릴 때 훨씬 강하게 쏟아진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최근 언론은 이런 패턴에

'도깨비 장마'라는 이름을 붙였다.


비가 갑자기 쏟아졌다가 금세 그치고,

다시 맑아지는 날씨가 반복되면서

예측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


한 기상 해설위원은 이 흐름을 이렇게 요약했다.

예전에는 폭염이 오면 폭염만,

장마가 오면 장마만 이어졌는데,

최근에는 폭염 속에 폭우가 쏟아지고

다시 폭염이 오는 형태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실제로 지난해만 해도

시간당 100mm 이상의 극한호우가

13번이나 있었다.


몇백 년에 한 번 나타난다고 해석되던 강도의 비가,

이제는 매해 나타나고 있다는 뜻이다.


2024년에는 시간당 100mm가 넘는

집중호우가 무려 16차례 있었다.

기상청도 이 변화를 인정한다.


2009년 이후,

기상청은 장마의 공식 시작과 종료를

사전에 예보하지 않는다.

대신 정체전선의 형성과 이동을

실시간으로 분석해,

사후에 확정해서

발표하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기후변화로 장마 예측 자체가

어려워졌다는 게 기상청의 설명이다.


예보가 못 미더워진 게 아니라,

기상청 스스로 예보를 포기하고

사후 확정으로 물러선 것이다.


오보의 역사는 길다


예보가 틀린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1987년 7월,

태풍 셀마가 한반도를 지나갔을 때

기상당국은 태풍의 경로를 조작해 발표했다.


태풍이 한국에 상륙하지 않고

대한해협을 통해 빠져나갔다고 발표했지만,

실제 피해는 참담했다.


2010년 9월 21일에는 서울을 포함한 수도권에

30mm 수준의 비를 예보했지

실제로는 일 강수량 260mm 수준의 비가 쏟아지며

역대 최악의 오보로 기록됐다.


이날은 추석 전날이었다.

명절 음식을 준비하던 가정들이

삽시간에 아수라장이 됐다.


2023년 7월에는 열흘 내내

폭우가 온다는 공포성 예보를 냈지만,

중부 지방은 오전에 비 온 뒤

오후엔 햇빛만 쨍쨍했다.


2024년에도 한 주 내내 비 소식을 걸어뒀다가,

당일 실시간으로 맑음으로 수정하는 일이 반복됐다.


오보의 방향은 늘 한쪽만이 아니었다.

많다고 해서 늘 많았던 것도,

적다고 해서 늘 적었던 것도 아니다.


지각 장마 기간에도 비슷한 사례가 있었다.

태풍의 간접 영향으로 집중호우가 예보됐지만,

실제로는 일강수량 20mm에 그친 날도 있었다.


1년 전 오늘, 광주가 잠겼다


그날은 인공지능사관학교를 다니던 시기였다.

아직 차가 없어서 지하철로 통학하던 때다.

화정역에서 내려야 했지만 열차는 결국 한 정거장 전인

농성역에서 내려야 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화정역은

열차가 무정차로 통과한 10개 역 중 하나였다.


상무역 역사 내부가

그날 오후 5시 10분쯤

집중호우로 침수됐기 때문이다.


2호선 공사 현장에서 흘러나온 빗물이

역사로 흘러든 게 원인이었다.

이 침수로 농성역부터 광주송정역까지

구간 운행이 전면 중단됐다.


2025년 7월 17일.

정확히 1년 전 오늘,

광주에는 예보의 5배가 넘는 비가 쏟아졌다.


광주지방기상청은 전날 오전 4시 50분,

그날 하루 예상 강수량을 20에서 80mm로 예보했다.


오전 8시 10분,

호우경보로 격상된

오전 10시 20분 발표에서도

예상 강수량 수치는 그대로였다.


그런데 실제로는 400mm가 넘는 물폭탄이

광주 도심에 떨어졌다.


하루 최고 강수량은 311mm에서 최대 400mm 이상.

1939년 기상관측 이래 역대 최고 일강수량이었다.

종전 기록이었던 1989년 7월 25일의 335.6mm보다도

90.8mm 많은 수치였다.


7월 평년 강수량이 294.2mm였으니,

하루 만에 한 달치보다 많은 비가 쏟아진 셈이다.


당일 오후 1시 기준 시간당 강수량은

전남 나주 86mm,

광주 남구 80mm,

곡성 옥과 70.5mm,

화순 백아 54.5mm였다.


누적 강수량은 광주 서구 풍암 지역이

155mm로 가장 많았고,

광주 북구 운암동 147.2mm,

전남 담양 131mm가 뒤를 이었다.


사흘간 500mm 안팎의 비가 쏟아지면서

1명이 숨지고 2명이 실종됐다.


북구 신안동,

중흥동,

두암동,

양산동,

문흥동,

일곡동 일대가

물에 잠겼다.


복개천이 범람하고 하수구가 역류하면서

지하주택과 노후주택 피해가 집중됐다.


주택 66동,

상가 22곳이 침수됐고,

차량 106대가 물에 잠기거나 파손됐다.


소방 당국에 접수된 피해 신고만 766건,

건물이나 주택에 고립됐던

시민 145명이 무사히 구조됐다.


광주 지역 피해액만 570억원,

전남까지 합치면 900억대로 추산됐다.


자치구별로는 북구가 140억원으로 가장 컸고,

광산구 130억여원,

서구·동구·남구가 각각 100억여원이었다.


광주시는 결국 정부에 특별재난구역 선포를 건의했다.

이 폭우는 곧바로 기상청의 예보 정확도 논쟁으로 번졌다.


다섯 번 중 세 번은 틀린다는 숫자


기상청이 발표하는 예보 정확도에는

여러 지표가 있다.


강수정확도(ACC)는 비가 온다,

안 온다는 예보가 실제와 맞아떨어진 비율을

전체적으로 계산한 지표다.


그런데 이 지표는 착시를 일으킨다.

한국처럼 비가 안 오는 날이 많은 기후에서는,

매일 "비가 안 온다"고만 예보해도

정확도가 약 70%가 나온다.


지난해 가장 강수일수가 적었던

북부산 기준으로는 74%까지 나온다.

감사원은 2017년 기상청 감사에서

이 착시를 지적하며 다른 지표를 요구했다.


강수유무적중률, 이른바 CSI다.

비가 온다고 예보했고

실제로 비가 온 경우만

따지는 지표다.


이 기준으로 계산하면

한국 기상청의 임계성공지수는 40% 미만이다.

강수 예보 다섯 번 중

세 번은 틀린 셈이라는 비판이 나온 이유다.


탐지확률(POD)이라는 지표도 있다.

실제로 비가 내렸을 때

예보가 있었는지를 계산하는 지표로,

2018년 환경일보 분석 기준 0.78 수준이었다.


강수맞힘률은 비가 온다고 예보했을 때

실제로 비가 내린 경우의 비율을 뜻하는데,

2025년 4분기 0.68이었던 것이

다음 분기 0.71로 소폭 상승했다.

여전히 강수정확도보다는 낮은 수준이다.


수치예보모델 자체의 성능 격차도 드러난 적이 있다.

2022년 국정감사 자료에 따르면,

한국 기상청이 쓰는 KIM모델과 UM모델을

세계 최고 수준으로 꼽히는

유럽중기예보센터(ECMWF) 모델과 비교했다.


강수유무적중률 평균은

KIM모델 0.41,

UM모델 0.44,

ECMWF 0.46이었다.


북반구 500hPa 지위고도 120시간 예측오차는

KIM모델이 2020년 43.4m에서

2022년 44.7m로 오히려 증가했고,

UM모델도 40.3m에서 43.5m로 늘었다.


반면 ECMWF는 2020년 34.6m에서

2022년 34.9m로,

3년 내내 35m 이하를 유지했다.


세계 최고 수준의 슈퍼컴퓨터를 갖고도,

오차는 ECMWF보다 10m 가까이 컸다.


그런데도 기상청이 지난 1월 발표한 국민만족도 조사에서,

기상서비스 신뢰도는 전년 대비

0.4점 상승한 72.8점으로 나타났다.


정확도 지표로는 다섯 번 중 세 번이 틀리는데,

체감 신뢰도는 72.8점이라는

이 간극은 무엇을 말해주는가.


기상청은 이런 논쟁에 대해,

강수예보가 얼마나 정확한지를

하나의 평가지수로만 설명하기에는 한계가 있으며,

숫자의 크기가 만들어낸 불필요한 논쟁보다는

강수 시스템의 시간적 공간적 범위 예측의 일치성을

종합적으로 분석해야 한다고 설명한다.


아홉 시간 동안 바뀌지 않은 숫자


2025년 광주 폭우 당시,

가장 뼈아팠던 지점은

강수량의 절대치가 아니라 시간이었다.


광주지방기상청이 20에서 80mm를 예보한 시각은

오전 4시 50분이었다.


그로부터 아홉 시간이 흐른 오후 1시 10분,

기상정보가 다시 발표됐다.

그 시점에 이미 일부 지역의 누적강수량은

100mm를 넘어선 상태였다.


그런데도 발표된 예상 강수량은 바뀌지 않았다.

실시간으로 쌓이는 관측값과,

여전히 아침에 멈춰 있는 예보값 사이의 간극이

아홉 시간 동안 그대로 방치된 셈이다.


이런 지연은 우연이 아니라 구조에 가깝다.

예보관 입장에서는 이미 발표한 수치를

급격히 상향 조정했다가 실제로 그만큼 오지 않으면,

그것대로 또 다른 오보로 비판받는다.


반대로 조정하지 않고 있다가 폭우가 쏟아지면

지금처럼 비판받는다.

어느 쪽이든 비판을 피할 수 없는 이 딜레마가,

결과적으로 시민들이 대비할 수 있는 시간을 갉아먹는다.


광주 시민들이 SNS에 남긴 반응들 중에는,

오전에 예보를 믿고 우산 하나만 챙겨 나섰다가

정오 무렵 온몸이 젖은 채 발이 묶였다는 목격담이 여럿 있었다.


안 오면 덥고, 와도 습하다


비가 오지 않는 여름이

반드시 쾌적한 여름은 아니다.

오히려 정반대였다.


6월 기후 분석을 보면

강수량과 강수일수는 평년보다 적었는데,

우리나라 주변 해역의 평균 해수면 온도는

최근 10년 중 두 번째로 높았다.


비는 줄었지만 열과 수증기는 그대로,

혹은 더 많이 쌓여 있었다는 뜻이다.

광주·전남은 강수 확률이 0%인 채로

폭염이 절정에 이른 날들이 있었다.


아침 최저기온이 25도 안팎을 유지하며 열대야가 이어졌고,

낮 최고기온은 36도까지 치솟았다.


구름 한 점 없는 날일수록 태양복사가

그대로 지표에 내리꽂혀 기온이 더 오르고,

동시에 해수면에서 증발한 수증기는

비로 떨어지지 못한 채 대기 중에 쌓인다.


체감온도가 실제 기온보다 최고

35도 이상까지 올라간 날도 있었다.

그렇게 쌓인 열과 수분이 정체전선을 만나는 순간,

국지성 폭우로 한꺼번에 터진다.


비가 없어서 덥다는 말은 절반만 맞는 셈이다.

정확히는 비로 방출되지 못한 에너지가

계속 쌓이고 있다는 뜻에 가깝다.


오늘 밤도 다르지 않다.

광주·전남에는 30에서 80mm의 비가 예보돼 있고,

곳에 따라 돌풍과 천둥·번개를 동반한

강한 비도 있을 전망이다.


많은 이들이 이 비가 그간의 더위를 씻어내주길 바란다.

그런데 비가 내리는 동안에는 오히려

습도가 급격히 오르면서

후텁지근함이 한층 심해질 가능성이 크다.


진짜 더위가 가시는 체감은,

비가 그치고 대기가 한 차례 정리된 다음에야 찾아온다.

더위를 씻어내는 건 비 그 자체가 아니라,

비가 지나간 자리다.


태풍은 늘어나는데, 한반도는 비껴간다


장마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태풍도 비슷한 역설을 보인다.

기후변화로 극지방과 적도의 온도 차가 줄면

무역풍과 계절풍이 약해지고,

상승 기류를 방해하는 요인이 사라지면서

열대저기압의 발생 빈도는 오히려 늘고

강도도 세지는 추세다.


연구에 따르면 북서태평양에서 발생한 태풍이

풍속 1m/s 강해지는 데 걸리는 시간이

1981년 평균 2.1시간에서

2018년 평균 1.6시간으로 줄었다.


처음 발생한 태풍이 풍속 67m/s의

슈퍼 태풍으로 발달하는 시간도

1981년 평균 106시간에서

2018년 평균 82시간으로 줄었다.


더 빠르게,

더 강하게 발달한다는 뜻이다.

올해는 1월부터 태풍이 발생한

이례적인 해였다.


1월 노카엔,

2월 페냐,

3월엔 8년 만의 3월 태풍

누리까지 나왔다.


발생 빈도로는 평년보다 훨씬 잦다.

그런데 한반도에 실제로 영향을 준 태풍은

별개의 문제다.


최근 몇 년간

한반도 상공의 열돔이 강하게 자리 잡으면서,

태풍이 한국 쪽으로 오다가 난세이 제도 부근에서 정체하거나

중국, 일본 쪽으로 꺾이는 경우가 늘고 있다.


2016년,

2018년,

2024년,

2025년이 대표적이다.


직전 해였던 2025년은 관측 이래

16년 만에 한국에 영향을 준

태풍이 단 한 건도 없었던 해였다.


반대로 2018년과 2019년은

1년 안에 태풍 7개의 영향을 받은

역대 최다 기록의 해였다.


2년 새 우리나라가 받은 태풍의 직간접 영향은

무려 14개였다.


태풍은 더 잘 만들어지는데,

한반도 상공의 대기 구조가

그걸 막아서는 해가 있고,

몰아서 때리는 해가 있다는 뜻이다.


같은 동아시아 몬순 시스템 안에서도

일본은 사정이 달랐다.


일본 기상청 공식 발표를 보면

2026년 일본 장마는 규슈·시코쿠가

평년보다 빠르거나 비슷하게,

도쿄·오사카·나고야는 6월 중순 평년과

거의 동일한 일정으로 흘러갔다.


한국만 열흘 넘게 늦어진 사이,

일본은 평년대로였다. 동아시아

전역이 아니라 한반도 상공의 특수한

대기 조건이 원인이었다는 뜻이다.


저수지 바닥부터 드러난 부담


늦은 장마의 여파는 통계 밖에서도 감지됐다.

전남은 벼농사와 밭작물 비중이 높은

농업 구조를 갖고 있다.


장마가 늦어지면 봄 가뭄이 길어지고,

모내기 시기와 겹치면서 논농사에 직접 타격을 준다.


이 구조는 옛 기록에서도 반복된다.

장마가 시작되기 전인 5월 중순부터는

'장마 전 건기'라 불릴 정도로

봄 가뭄이 이어지는 시기이고,

하필 모내기를 해야 하는 시기와 겹치기 때문에

장마가 늦어질수록 논농사의 타격은 더 커진다.


올해도 예외가 아니었다.

6월 29일 기준 저수율은 52.0%였다.

평년치 59.0%의 88% 수준에 그친 수치다.


농촌진흥청은 이 시기 주간농사정보를 통해

집중호우에 대비해 논과 밭두렁, 제방, 배수로를

사전에 점검하고 정비할 것을 당부했다.


늦게 시작된 장마가,

물이 필요한 시기에

정확히 물 부족을 만들어내고,

뒤이어 쏟아질 폭우에 대한

대비까지 동시에 요구한 셈이다.

가뭄과 홍수 사이의 완충 지대가,

매년 점점 좁아지고 있다.


그래서, 다음 여름은 다를까


지난해 광주는 물에 잠겼다.

올해 광주는 비를 기다렸다.

같은 지역에서,

1년 사이,

정반대의 재난이 반복된 셈이다.


기상청장은 지난해는

폭염과 열대야가 이르게 시작되고

장마도 빨랐지만,

올해는 정반대라고 말했다.


최근 기후변동성이 커지면서

매년 다른 양상의 기후 특성이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예측 불가능성이 예외가 아니라

기본값이 되어가고 있다는 뜻이다.


기상청은 2009년,

장마의 시작과 끝을 미리 예보하는 일을 그만뒀다.

예측할 수 없다는 걸 인정한 셈이었다.


그로부터 17년이 지났다.

슈퍼컴퓨터는 세계 최고 수준이 됐고,

인공지능 돌봄로봇이 폭염 영향예보를

전하는 시대가 됐다.


그런데도 강수 예보 다섯 번 중 세 번은 여전히 틀린다.

비가 안 온다던 날엔 아무 일도 없었고,

비가 온다던 날엔 도시가 잠겼다.


우리는 예보를 신뢰해야 할까,

아니면 예보가 신뢰할 수 없다는 사실 자체를

이제는 예보로 받아들여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