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완성 설계도

장밋빛 뒤에 감춰진 청구서

by다소느림

곡창지대라는 말의 두 얼굴


호남을 부르는 가장 오래된 수식어는 '곡창지대'다.

조선 후기 이앙법이 확산되고

농업 기술이 발달하면서,

호남의 쌀 생산량은 크게 늘었다.


그 풍부한 생산량은

단순한 지역 자급을 넘어

국가 전체의 식량 기반을 떠받쳤다.


조선은 전국에서 거둔 세곡 가운데

상당 부분을 호남에서 충당했다.

호남 곡창지대는 조선 왕조 재정의 핵심 기반이자,

국가 운영 전체를 지탱하는 뿌리였다.


그런데 이 별명은 축복이 아니라 굴레였다.

호남의 풍부한 생산량은 국가에 집중적으로 징수됐고,

그 부담은 고스란히 지역민에게 돌아왔다.


조운선을 통해 세곡을 실어 나르는 체계는

한양 경제의 혈맥이었지만,

정작 생산지인 호남 주민에게는

착취 구조로 작동했다.


세금과 수탈에 시달린 농민들은 끊임없이 저항했다.

임꺽정의 난, 동학농민운동 같은

굵직한 사건들이 다른 곳도 아닌

호남에서 터져 나온 이유다.


호남은 곡창지대이면서

동시에 민란의 진원지였다.


이 대목에서 이미 하나의 패턴이 보인다.

경제적으로 국가를 떠받치는 지역일수록,

그 기여에 상응하는 몫을 돌려받지 못하고

정치·슬롯적으로는 오히려 차별받는 구조.


한 역사 칼럼은 이를 이렇게 정리한다.

"호남은 국가 경제를 지탱했지만,

정치·슬롯적으로는 차별받았다.

조선 후기와 일제강점기,

그리고 현대에 이르기까지

호남 소외 문제는 역사적 뿌리를 가진

구조적 불평등이었다."


이 구조는 조선 후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훨씬 노골적인 형태로 반복된다.


목포, 수탈의 관문이 되다


1897년 개항한 항구도시 목포는

일제강점기 내내 호남 곡창지대 수탈의 통로였다.


쌀과 소금, 면화가

이 항구를 거쳐 일본으로 빠져나갔다.

지금도 목포 원도심 약 2km 구간에는

당시 지어진 일본식 건물이 300여 채 남아 있다.


가장 규모가 큰 건물은 일본영사관과

동양척식주식회사 건물로,

지금은 근대역사관으로 쓰이며

그 시절의 아픔을 증언하고 있다.


수탈의 방식은 체계적이었다.

1907년경 전남 나주에서

일본식 '가마니'가 처음 만들어진 뒤,

조선총독부는 이를 농가 부업으로 장려하며

전국에 가마니 짜기 교습소를 세우고

가마니 짜기 대회까지 열며 대대적으로 보급했다.


'가마니'라는 말 자체가 순우리말이 아니라

일본어 '카마스(叺)'에서 온 외래어다.


원래 조선에는 곡식을 담는 '섬'이라는

자체 포대가 있었는데,

가마니는 부피가 작아

한 사람이 운반하기 좋고

두껍고 촘촘해 곡물이 새지 않았다.


1920년대에는 1차대전 이후

일본 내 쌀 부족과 '쌀 폭동'을 해결하기 위해

산미증식계획까지 실시됐다.


마르크스 경제학 바깥의 시각에서도,

이 시기의 쌀 반출은 식민 자본주의의

구조적 수탈 혹은 착취로 해석되는 경우가 많다.


토지 소유 구조를 보면

이 수탈의 규모가 더 선명해진다.


1920년 목포농담회에 소속된 회사는

동양척식주식회사(동척) 목포지점을 비롯해

조선실업, 가마타산업, 조선흥업, 쿠니타케농장,

후쿠다양행, 목포식산, 도쿠다양행까지 모두 8개였다.


이들 8개 회사가 소유한 토지는

모두 2만 정보(1정보는 3000평)에 달하는

방대한 양이었다.


가장 많은 토지를 가진 곳은 동척이었고,

다음이 조선실업·조선흥업·도쿠다양행·가마타산업 순이었다.


1933년 조선농회가 발간한 '조선농업발달사'에 따르면,

300정보 이상을 소유한 대지주는

조선인이 43명이었던 데 비해

일본인은 192명으로 압도적인 우위를 보였다.


식민지 조선에 공장을 세울 만큼

자본주의 체계를 갖추지 못했던 일본이

택할 수 있던 방법은,

토지와 농산물과 어업권을

통째로 가져가는 것뿐이었다.


정리하면 이렇다.

호남은 조선 후기부터 일제강점기까지,

국가와 제국 모두에게

'생산은 하되 몫은 못 받는' 지역으로

반복 소비됐다.


이 패턴은 해방 이후에도 사라지지 않았다.

다만 착취의 주체가 외세에서

국가 스스로의 정바카라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1949년의 숫자, 그리고 갈라지기 전의 모습


해방 직후 통계로 돌아가 보면,

흥미로운 사실이 하나 있다.


1949년 기준 전국 인구 비중은

호남 25%, 영남 31%로 큰 차이가 없었다.

좀 더 좁혀서 보면 호남 약 510만 명,

영남 약 630만 명으로 1대 1.2 수준이었다.

지금 남아 있는 격차에 비하면 미미한 차이다.


조선시대로 더 거슬러 올라가면,

지금 익숙한 영호남 대립 구도 자체가 낯설다.


영남과 호남은 조선시대 남인 세력의 중심지로서

300년 넘게 동지적 관계를 유지했다.

지금 우리가 아는 영호남 지역감정은

1970년대 중반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감정이다.


일부 연구자들은 그 뿌리를

일제강점기까지 끌어올리기도 한다.


일제강점기에 호남이

유독 많은 착취를 당하면서 쟁의가 잦았고,

일제 관리들이 이 지역을

'불령선인들의 중심지'로 낙인찍으며

부정적 이미지를 덧씌웠다는 분석이다.


다만 학계의 다수설은,

지금 형태의 노골적인 지역감정이

정치적으로 본격화된 시점을 1970년대로 본다.


지역감정은 유구한 역사적 앙금이라기보다,

특정 시점에 만들어진 정치적 발명품에 가깝다는 뜻이다.


경제개발 5개년 계획, 균형발전이라는 말과 실제 사이


1962년부터 1981년까지,

한국 정부는 모두 네 차례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추진했다.

이 계획은 전쟁의 폐허 속에서 시작됐다.


1961년 5·16 군사정변 세력은 혁명공약에서

"절망과 기아선상에서 허덕이는 민생고를

시급히 해결하겠다"고 밝혔고,

이후 공장 건설과 일자리 창출,

도로·항만·발전소 건설,

새마을운동을 통한 농촌 자립까지

숨 가쁘게 몰아붙였다.


1971년에는 수출 10억 달러를 달성했다.

그런데 국사편찬위원회의 정리는

이 성과의 이면을 정확히 짚는다.


"1960~70년대 정부 주도 경제개발 계획의 수립과

집행은 단기간 급속한 공업화 및 경제성장의

토대가 된 것이 분명하다"면서도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은 계획상 도농격차 해소,

균형발전을 제시했지만 정부 정바카라자금의

수출 공업으로의 집중은 결과적으로

산업간, 직종간, 지역간 불균형을 심화시켰다"고 평가한다.


말로는 균형발전이었지만,

실제 자금은 특정 지역에 집중됐다는 뜻이다.


심지어 1970년대 들어

1960년대식 성장의 한계를 지적하며

슬롯개발이 강조됐지만,

1·2차 계획부터 이어진

수출·공업 중심의 성장주의 관성은

끝내 바뀌지 않았다.


1970년대 국가의 수출 진흥 정바카라에 따라

전자공업 중심의 구미공업단지가 조성됐고,

이는 대구와 연계되어 영남내륙에

거대한 공업지역을 형성했다.


대구는 당시 한국의 주력 수출품이던

섬유 제품 생산으로 급성장해,

한국 최대의 섬유공업도시이자

세계 최대 직물공업도시로 떠올랐다.


이후 1980년대에는 종업원 수 기준으로도

이 지역 공업의 비중이 계속 커졌다.

울산, 포항, 창원, 구미로 이어지는 이 벨트는

이후 반세기 넘게 한국 중화학공업의 심장부 역할을 하게 된다.


이 격차가 처음 정치적 언어로 터져 나온 게 1967년이다.

제6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굵직한 선거 이슈가 없던 야당은

'호남 푸대접론'을 들고나왔다.


공화당 정부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성과를 내고는 있었지만

기간산업이 영남에 편중됐고,

농업정바카라의 실패로 호남 농민들이

최대 피해자가 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동아일보(1967년 3월 27일)는 이렇게 썼다.

"경부선은 주로 외국제 객차를 운행하는데

호남선 객차는 유독 낡은 국산을 배치하고 있다.


(…)


울산공업지구 등 영남 일대를 구경하고 돌아오니

마치 외국 시찰을 다녀온 느낌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의 대응은 정면 반박이었다.

경향신문(1967년 4월 27일) 보도에 따르면,

그는 "호남 푸대접론은 정부와 국민을 이간시키는 행위"라 일갈하며

"이 나라가 잘되려면 여당도 정신 차려야 하지만

우리나라 야당이 그들의 머리를

근대화해야 한다"고 맹렬하게 반박했다.


야당의 문제 제기를

"몸은 20세기에 살고

머리는 19세기에 사는"

구닥다리 정치 공세로 몰아붙인 것이다.


문제 제기 자체를 지역 이간질로 규정하는 이 화법은,

이후로도 오랫동안 반복되는 방어 논리의 원형이 된다.


지역감정이 시작된 순간: 1971년


선거는 박정희의 무난한 승리로 끝났다.

그런데 득표 양상을 뜯어보면,

이미 균열의 조짐이 보인다.


직전 선거였던 제5대 대선에서

박정희 당선에 가장 크게 기여한 건

영호남 농민들의 몰표였다.


오히려 충청 이북은

야당 윤보선 후보를 더 지지했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1971년 선거를 앞두고

여촌야도(농촌은 여당, 도시는 야당) 구도가 뚜렷해지면서,

박정희 정권은 위기감을 느꼈다.

이대로 가면 재집권이 어려울 수 있다는 계산이었다.


그래서 선택한 카드가 지역감정이었다.

영남이 호남보다 인구수가 훨씬 많았기 때문에,

영남을 정치적으로 결속시키는 쪽이

집권에 유리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 결과 6대 대선에서는

이전과 전혀 다른 득표 양상이 나타났다.


대개 지역에서 박빙이거나

55대 45 정도로 한쪽에 근소하게 승리를 안겼는데,

유독 영남 지역에서는 65대 35에 가까운

'몰표' 현상이 나타났다.


박정희 후보는 전국적으로

110만 표 차이로 이겼는데,

영남에서만 130만 표로 격차를 벌렸다.


이 국면에서 최초로 전 국민이 목격한 노골적 지역감정 발언은,

여권 쪽 이효상 국회의장에게서 나왔다는 게

다수 기록이 짚는 지점이다.


그는 신라 왕조를 언급하며

특정 지역 출신 대통령이 나와야 한다고 주장했고,

"경상도 대통령을 뽑지 않으면

영남인은 개밥에 도토리 신세가 된다"는 발언까지 했다.


다만 여기서 짚어야 할 게 있다.

1971년 선거는 어느 한쪽만 자극하고

다른 쪽은 가만히 있었던 싸움이 아니었다.


실제로는 양쪽 모두 지역감정을 격하게 주고받은,

그야말로 "피 터지는 설전"이었다.


야당 쪽에서도 "야당 후보가 이번 선거를

백제와 신라의 싸움이라고 해도

전라도 사람들이 똘똘 뭉쳤으니

우리도 똘똘 뭉치자,

그러면 124만 표 이긴다"

(중앙일보 1971.4.1)


"호남 사람이 받은 푸대접은

1200년 전부터다"

(조선일보 1971.4.1)


"경상도 정권하에 전라도는

푸대접 받을 수밖에 없다"

(동아일보 1971.4.30) 같은

발언이 잇따랐다.


최초 발화점은 여권으로 보는 시각이 다수설이지만,

이후의 격화 과정에는 양쪽의 응수가 함께 작용했다는 뜻이다.


장신기 연세대 김대중도서관 연구원은

이 시기의 구조를 이렇게 분석한다.

"보수 세력이 동원한 반호남 지역주의가

위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박 정권의) 산업화 과정에서 나타난

호남 배제와 호남 소외라는 슬롯적 현상이 있다"며,

박정희가 경제적·정치적 두 갈래로

호남을 고립시켰다고 주장한다.


즉 지역감정을 최초로 정치 자원화한 쪽은 집권 세력이었고,

경제적 배제라는 실체가 먼저 있었기에

그 언어가 위력을 가질 수 있었다는 분석이다.


그런데 지역구도가 지금까지 이어지는 데는,

이후 세대 정치인들의 바카라임도 함께 얹혀 있다.


1987년 대선에서 김영삼과 김대중의

후보 단일화가 끝내 무산되면서,

영호남 지역감정은 완전히 고착화됐다는 평가가

학계에서 상당히 널리 받아들여진다.


여기에 1990년 3당 합당까지 겹치며

양김의 지지 기반은 더 뚜렷하게 갈라섰다.


2001년 시사저널 여론조사에서

지역감정 조장 바카라임이 있는 정치인으로

꼽힌 순위는 박정희(20.4%),

김영삼(17.4%),

전두환(14.8%),

김대중(12.1%) 순이었다.


김대중에게 전통적으로 우호적이던

수도권 응답자 중에서도 11.2%가 그를 지목했다.


정리하면,

지역감정을 처음 정치적 도구로 꺼낸 쪽은

집권 세력이었다는 분석이 우세하지만,

그 구도를 이후 수십 년간 고착시키고

재생산한 데는 3김을 포함한

여야 정치인 모두의 바카라임이

겹겹이 쌓여 있다는 게 더 정확한 그림이다.


반세기 동안 쌓인 숫자들


이후의 흐름은 이 구도가

그대로 제도화되는 과정이었다.


1970년대에는 호남 약 650만 명 대 영남 약 1000만 명으로,

1대 1.6까지 인구 격차가 벌어졌다.

1949년 1대 1.2였던 격차가,

산업화 한 세대 만에 1.6배로 확대된 것이다.


그 결과가 지금 통계로 남아 있다.

현재 수도권과 영남권이 전국 경제력(GRDP)의

75%(수도권 53%, 영남권 22%)를 차지하는 동안,

호남권은 9%에 머물고 있다.


전국 제조업 출하액에서 호남권이 차지하는 비중은 11%로,

영남권 34%의 3분의 1 수준이다.

인구 비중 역시 호남 10%,

영남 25%로 절반에도 못 미친다.


지난 50년간 호남에서 타지로 순유출된 인구는

350만 명 이상으로 추정된다.


교통 인프라의 격차는 더 극명하게 시간으로 남아 있다.

경부고속도로는 1970년에 개통했다.

호남고속철도 1단계는 2015년에야 개통했다.

두 노선 사이에는 45년의 시차가 있다.


국토연구원의 빅데이터 분석은

이 격차를 공간적으로도 보여준다.


경부KTX 개통으로 압축적 이용이 가능해진

국토면적은 전체의 16.3퍼센트(1만6000㎢)인데,

호남KTX는 6.1퍼센트(6000㎢)에 그친다.

파급 효과 자체가 경부선의 3분의 1 수준이었다는 뜻이다.


다만 개통 이후 억눌려 있던 수요는 뚜렷했다.

일반선을 이용하던 시절에 비해 KTX 호남선 이용객은 28%,

KTX 전라선 이용객은 44.5% 늘었다.

그만큼 그 이전까지 쌓여 있던

수요가 있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1980년, 그리고 낙인의 시대


여기에 또 하나의 사건이 겹친다.


1980년 5월,

광주에서 일어난 일이다.


이후 수십 년간 호남,

특히 광주는 정치적으로

위험한 지역이라는 낙인 속에 놓였다.


이 낙인은 추상적인 감정에 그치지 않았다.

정치권력을 쥔 쪽이 인사권과 예산권을

함께 쥐고 있던 시대였다.


통신과 촬영, 녹음 기술이

지금처럼 발달하지 않아

증거를 남기거나 묻기가

지금보다 훨씬 쉬웠던 시절이기도 했다.


그런 구조에서 정치적으로

비우호적이라 낙인찍힌 지역은,

국가 주도 투자 배분에서도

자연스럽게 밀려나는 결과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는 지적이 꾸준히 나온다.


지역 주민들조차 이 인사권과 예산권의 향방에 따라

유불리를 겪을 수 있었던 시대였다.


3김 시대, 굳어진 균열


1987년 민주화 이후에도

이 구도는 풀리지 않았다.


오히려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이라는

세 명의 정치 거물이

각자의 지역 기반 위에서 경쟁하는

'3김 정치' 시대가 열리면서,

지역구도는 정치 지형 자체로 제도화됐다.


선거 때마다 영호남의 표심은

예측 가능한 방식으로 갈렸고,

그 예측 가능성은 다시 정치인들이

지역감정을 동원하는 유인이 됐다.


지역주의는 이제 누군가 조장하지 않아도

스스로 재생산되는 정치 시스템의 일부가 되어 있었다.

세월이 흐르며 노골적인 지역감정 조장을

자제하자는 슬롯적 공감대는 분명히 형성되어 왔다.


그런데 그 공감대가 곧바로

경제적 격차 해소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지역감정이라는 정서적 갈등은 완화되어도,

그 갈등이 만들어놓은 투자와 인프라의 물리적 격차는

그대로 남았기 때문이다.


정서는 누그러뜨릴 수 있어도,

이미 깔린 도로와 이미 지어진 공장은 재배치되지 않는다.


21세기, 격차의 성격이 바뀌다


2000년대 이후로는

상황이 조금 다른 결로 접어든다.


수도권 집중이 워낙 심해지면서,

영남과 호남을 막론하고

지방 경제 전반이 침체되고

하향평준화되는 양상이 뚜렷해졌다.

그러면서 과거의 영호남 대결 구도는

다소 완화되어 왔다는 평가가 나온다.


이제는 "영남이 이겼다"보다

"지방 전체가 수도권에 밀렸다"는 프레임이

더 크게 느껴지는 시대다.


다만 수출 경제 구조에서 유리한 입지 조건과

이미 쌓여 있는 압도적 인구 규모 차이 때문에,

영남과 호남의 격차를 좁히는 건

여전히 쉽지 않은 과제로 남아 있다.


최근 부동산 시장에서도

이 격차는 다시 확인된다.


이재명 정부 출범 후

1년간 서울 아파트 매매가격이

11.69% 오르는 동안,

지방 5대 광역시는 오히려 0.41% 떨어졌다.


전국 미분양 물량의 73%가 비수도권에 쌓여 있고,

이 가운데서도 '악성 미분양'으로 분류되는

준공 후 미분양은 85.3%가 지방에 몰려 있다.


한 기고는 이 구조를 이렇게 진단했다.

"전국을 하나의 시장으로 보고 동일한 규제를 적용한 결과,

지방은 정바카라의 수혜자가 아니라 부작용의 부담자가 됐다."


다주택자 규제가 강화되던 시기

수도권 집값은 오히려 오르고

비수도권은 내린 현상이,

2025년 한 경제학 연구에서도 확인된다.


투기를 잡겠다던 정바카라이 지방의 자본을

서울의 '똘똘한 한 채'로 밀어 올린 셈이고,

그 결과 지방 부동산은 투자 대상에서

배제되고 실수요마저 움츠러들었다.


그 역사가 만든 습관: 반기기 전에 의심부터 하는가


여기까지가 '왜 뭘 안 해줬는가'의 역사다.

그런데 이 역사에는 반대편의 이야기도 있다.


오랜 배제를 겪은 지역은,

새로운 개발이 왔을 때

그것을 곧바로 반기기보다

먼저 의심하고 조건을 따지는

습관을 함께 갖게 된다.


이 습관이 가장 선명하게 드러난 사례가

코스트코와 복합쇼핑몰이다.


2023년 기준,

한국에 코스트코·트레이더스·스타필드·이케아 같은

대형 유통시설이 생긴 지 30년 가까이 됐다.


그런데 인구 140만 대도시인 광주에는

그 흔한 복합쇼핑몰 하나가 오랫동안 없었다.


코스트코 역시 광주에는 매장을 내지 않았다.

광주신세계 복합쇼핑몰은 특혜제공 의혹과 상인 반발,

골목상권 이슈로 과거 여러 차례 무산됐다.


2022년 대선 국면에서는 이 문제가

여야 정쟁거리로도 소비됐다.


윤석열 당시 국민의힘 대선 후보가

광주 송정매일시장을 찾아

복합쇼핑몰 유치를 공약으로 내걸었고,

이용섭 당시 광주시장은 이를

"지역 비하"라고 비판했다가 시민 반발에 직면해

"쇼핑몰 유치에 반대한 적은 없다"고 말을 바꿨다.


이준석 당시 국민의힘 대표는

"5일장과 복합쇼핑몰이 어떻게 대체재가 되냐"고 맞받았다.


정작 협상의 실체보다

정치적 프레임이 앞선 시기였다.

그런데 실제 여론은 조금 결이 다르다.


2024년 광주시의회 여론조사에서,

소상공인 중 복합쇼핑몰 유치 자체에

찬성한 비율은 75.7%였다.

반대는 24.3%에 불과했다.


다만 당시 추진 중이던 더현대 광주,

신세계 아트앤컬처파크,

그랜드 스타필드를 한꺼번에

세 개 다 유치하는 건

과도하다는 응답이 65%였다.


"복합쇼핑몰 자체를 반대"한 게 아니라

"너무 몰아주면 골목상권이 다 죽는다"는

협상 전략에 가까웠던 거다.


시사IN의 취재는 이 갈등의 구도를 이렇게 짚었다.

"통상 대형 유통업체가 들어올 때

지역 상인들이 반대하는 모습은 흔한 풍경이다.


그러나 반대하면 반대했지,

한 개는 되고 두 개 이상은 안 된다고

시위하는 모습은 어딘가 낯설지 않다"며,

광주에서는 이 갈등이 상인단체와

유통업체 사이가 아니라

상인단체와 지자체 간

대립 양상으로 치달았다고 지적했다.


문제는 이 협상이 수년씩 끌었다는 점이다.

광주는 자영업자·소상공인 비율이

2018년 기준 대구와 나란히 전국 1·2위였다.


그만큼 이해관계 조정이 복잡했던 건 사실이지만,

그 복잡함의 결과는 "옆 도시엔 있는데

광주엔 없다"는 현실로 돌아왔다.


같은 시기,

광주는 인구가 줄고 있었다.


2014년 147만 명으로 정점을 찍은 뒤 계속 감소해,

2025년 5월에 140만 명대가 무너졌다.

지난해에만 청년층 9017명이 순유출됐고

2026년 4월 기준으로는 138만6567명까지 내려갔다.


강기정 광주시장은 취임 2주년 기자회견에서

"청년들이 광주를 떠나는 이유는 질 좋은 일자리가 없고,

문화적으로 누릴 공간이 부족하기 때문"이라며 절박감을 드러냈다.


지금은 상황이 조금 풀리는 중이다.

광주신세계는 4조 원대 규모로

사전협상까지 마무리하고 착공 단계에 들어갔다.


광주시와 광주신세계는 토지가치 상승분

3302억 원의 45.34%에 해당하는

1497억 원 규모의 공공기여에 합의하며

사전협상을 마무리했다.


다만 그 착공까지 걸린 시간이,

결국 지역 발전의 타이밍을

얼마나 늦췄는지는 따로 셈해볼 문제다.


이 사례가 중요한 이유는,

지금 벌어지고 있는 반도체 클러스터 논란과

정확히 같은 구조를 미리 보여주기 때문이다.


"필요하다는 건 알지만,

우리 몫이 제대로 돌아올지 믿을 수 없다"는 방어적 태도.


반세기 넘게 배제당한 지역이 갖게 되는

자연스러운 습관이지만,

동시에 그 습관 때문에

발전이 한 박자씩 늦어지는 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지금, 반도체가 온다


800조 원.

어떤 매체는 896조 원,

어떤 매체는 1000조 원이라 쓴다.


숫자가 매체마다 다르다는 것부터가,

이 사업이 아직 확정된 설계도가 아니라

발표문 위에서 움직이고 있다는 증거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호남에 짓겠다는

반도체 클러스터의 투자 규모다.

두 회사의 전국 합산 투자 계획은

앞으로 10년간 2000조 원에 달한다는 관측도 나온다.


정부는 이를 '대한민국 대도약 3대 메가프로젝트'라 부르며,

청와대 국민보고회에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과

최태원 SK그룹 회장을 나란히 세웠다.


정부가 밝힌 이유는 이렇다.


이재명 대통령은

"서남해안은 발전에서 장기 소외된 탓에

역설적으로 반도체와 같은 첨단 공장을 지을 수 있는

광활하고 안정된 가용 토지가 있다"며

"용수는 물론 풍부한 재생에너지 잠재력까지 갖춰

반도체와 AI 데이터센터 등 전기를 대량 소비하는

최첨단 미래산업의 세계적 최적지"라고 설명했다.


"장기 소외에 따른 고통과 설움을 겪은 호남에는

지금까지의 이중 차별이 예상 못 한

큰 기회의 원천이 되는 것"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앞서 다룬 역사를 알고 나면,

이 문장이 단순한 수사가 아니라는 게 보인다.


정말로 반세기 동안 아무것도 짓지 않았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대규모 부지가 남아 있다는 뜻이다.

소외가 이번만큼은 기회의 재료로 쓰이는 셈이다.


그런데 이 계획에도 벌써

코스트코·복합쇼핑몰 사례와 닮은

균열이 여러 겹으로 보인다.


물 문제.

광주·전남은 불과 3년 전,

물이 없어서 제한급수를 걱정하던 지역이었다.


2022년 기상가뭄 발생일이 281.3일,

동복댐·주암댐 저수율이 10%대까지 떨어졌고

주암댐은 2023년 4월 20%까지 내려간 바 있다.


그런데 정부가 제시한 반도체 팹의 물 수요는 하루 65만 톤이고,

이 중 상당량이 광주 식수원인 동복댐(하루 27만 톤 공급, 1985년 건설)의

여유분 5만 톤과 증고 확보분 25만 톤에서 나온다.


여기에 주암댐·장흥댐 여유량 15만 톤,

보성강댐·나주댐의 발전·농업용수 전환분 20만 톤,

하수재이용수 30만 톤까지 더해 만든 숫자다.


극한 가뭄이 다시 오면

식수와 공업용수 중 무엇을 먼저 줄일지,

그 우선순위조차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반도체 공정 특유의 초순수 수질 요건까지 고려하면,

영산강 수질이 그 기준을 충족하는지에 대한

검증도 아직 남은 과제다.


정부는 이 계획이 새 댐을 짓는 게 아니라

기존 수자원의 재배분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그런데 정치권에서는 아예

신규 댐을 짓자는 목소리도 나온다.


홍준표 전 대구시장은

"지리산 밑 산청군에는 계곡댐 적지가 20여 곳 있다"며

지리산 부근이 한라산 다음으로 강수량이 풍부해

신규 댐 최적지라 주장했고,

"박정희 대통령 이후 환경론자들의 극심한 반발로

새 댐 건설은 늘 무산돼 왔다"고 지적했다.


섬진강에 대해서도

"장마철 물이 그냥 바다로 흘러가는 게 국가적 낭비"라며

새 섬진강댐 건설을 제안했다.


다만 이건 정부 공식 계획이 아니라

야권 정치인 개인의 제안일 뿐이다.


그럼에도 이 제안이 시사하는 바는 크다.

물 부족을 근본적으로 해소하려면

결국 신규 댐 같은 대규모 토목사업으로 돌아가게 되고,

그 사업은 예외 없이 환경단체와 주민 반발이라는

같은 장벽에 부딪힌다는 것이다.


전력 문제.

팹 4기 가동에 필요한 6.3GW는

한빛원전 전체 설비용량 5.9GW로도 못 채운다.


게다가 한빛 1호기는 이미 가동이 정지됐고

2호기도 올해 9월 수명이 끝난다.


결국 신규 원전 건설이 거론되는데,

한빛 1·2호기 수명연장을 위한 공청회는

2024년 이미 주민 반발로 무산된 전례가 있다.


사용후핵연료 저장률은 이미 85%를 넘었고,

온배수로 인한 해양생태계 영향까지

어민들의 오랜 민원 대상이다.


"재생에너지 최적지"라는 말이 실제로는

"원전을 더 지어야 한다"는 결론으로 이어지는 구조다.

원전 1기 건설에 통상 13년 11개월이 걸리는데,

반도체 양산 목표는 2030년이다.


탄소중립 문제.

반도체와 AI데이터센터를 합친 필요 전력은

대형 원전 18기 분량인 24.7GW에 달하고,

환경단체들은 이로 인한 추가 온실가스 배출량이

한 해 2000만 톤에 이를 수 있다고 추산한다.


이는 한국의 연간 온실가스 감축 목표치와 맞먹는 규모다.

그런데 정부의 18쪽짜리 설명자료에

'기후'라는 단어는 단 두 번 나온다.

그마저도 추가 배출과 관련된 내용은 없었다.


무안 군공항 문제.

정부는 반도체 산단 부지를

광주 군공항 부지(약 250만 평)로 확정했는데,

그 군공항이 이전할 곳이 무안이다.


무안군은 광주 민간공항의 선(先) 이전과 1조 원 규모 지원,

국가 차원의 인센티브를 요구하며,

2025년 12월 6자 협의체에서

이미 합의했던 조건조차

이행되지 않을 수 있다는

불안을 드러내고 있다.


김산 무안군수는

"광주가 첨단산업 발전의 기회를 얻는 동안

무안에 부담이 집중되는 구조는 받아들이기 어렵다"며

"특별한 희생에는 특별한 보상이 반드시 뒤따라야 한다"고 말했다.


광주가 혜택을 챙기는 동안

무안은 부담부터 떠안는 구도,

호남과 영남 사이의 오래된 불균형이

이번엔 광주와 무안 사이에서 축소판으로 반복되는 셈이다.


그런데 이 문제엔 국내 절차만으로

끝나지 않는 변수가 하나 더 있다.


광주 군공항은 청주·김해·수원·대구와 함께

국내 5개 한미 공군 공동운영기지(COB) 중 하나로,

평시엔 미군이 상주하지 않지만

유사시 F-22·F-35 등 미 항공전력이

전개되는 우발기지로 운용된다.


이 때문에 주한미군지위협정(SOFA)에 따라

미군 전용구역 약 74만2000㎡,

활주로 등 한미 공동사용구역

약 96만㎡가 미측에 공여돼 있어,

한국 정부가 일방적으로 부지를 회수할 수 없다.


이전을 하려면 SOFA에 근거한

한미 협의와 공동운영기지 재지정 절차를 거쳐야 한다.


이 협의 자체는 새로운 게 아니다.

국방부는 2020년부터 미군 시설 이전을 위한

한미 포괄협정문 마련에 나섰고,

2024년 10월에는 SOFA 특별분과위원회까지

구성해서 6년째 논의해왔다.


다만 기존 로드맵이

"무안에 대체시설을 먼저 짓고

2033년 9월까지 이전한다"는

여유 있는 일정이었기 때문에,

그동안은 특별히 주목받지 않았다.


그런데 정부가 이 부지를

반도체 클러스터로 쓰기로 결정하면서,

2033년까지 기다릴 여유가 사라졌다.


김용범 청와대 정바카라실장은

"군공항 일부를 미군이 사용하고 있어

당연히 협의해야 하는 사안"이라며

"한미 협의를 이미 시작했다"고 밝혔다.


주한 미 7공군 측은

"광주기지에 중요한 군사적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원론적 입장만 내놓았을 뿐,

구체적 이전 시점에 대한 확답은 아직 없다.


무안군수의 동의라는 국내 절차

하나만 넘으면 될 줄 알았던 문제 위에,

외교·안보 협의라는 층위가 하나 더 얹힌 셈이다.


인력과 생태계 문제.

팹 4기 가동에 필요한 인력은

1만2000명에 달하는데,

이미 비슷한 실험을 해본 충북

(SK하이닉스 청주, DB하이텍 음성)조차

낮은 임금과 정주 여건 때문에

여전히 인력 확보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업계에서는 "취업 남방한계선은 평택,

연구개발 남방한계선은 판교"라는 말까지 나온다.

소부장(소재·부품·장비) 생태계가 함께 따라오지 못하면,

지역은 단순 조립·생산기지에 머무를 수 있다는 우려도 있다.


독일 드레스덴이 대학·연구소·700개 이상

회원사 네트워크로 자립적 생태계를 이룬 것과

대비되는 지점이다.


먼저 이 길을 걸어본 용인 클러스터도

SK하이닉스 착공까지 6년이 걸렸고,

삼성전자는 아직 토지보상 절차가 진행 중이다.


"자율이냐 강제냐" 논쟁.

이 모든 논쟁의 밑바닥에는

더 근본적인 질문이 깔려 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정말 자발적으로 호남을 택한 것인가,

아니면 정부가 사실상 떠민 것인가.


이재명 대통령 스스로도 이 지점의 애매함을 인정했다.

그는 호남 선정 배경에 "정부의 행정지도와 기업 환경 개선,

CEO의 자율적 결정이 있었다"고 밝히면서도,

이를 "부당한 압력이 아니라 행정지도"라 구분했다.

정부가 개입한 사실 자체는 부인하지 않은 셈이다.


야당의 문제 제기는 상당히 구체적이다.


안철수 의원은 "사기업에 수백조 원 투자를

특정 지역에 하라고 하명할 법적 근거가 있나,

명백한 직권남용"이라 주장했고,

삼성전자 IM부문장 출신인 고동진 의원도

"국민 누구라도 강제하거나 압박했다고

의구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오세훈 서울시장은

"행정지도란 이름으로 사실상 강요를 해놓고

기업의 자발적 선택으로 바카라임을 돌리고 있다"고 정면 비판했다.


반면 산업적 필연성을 짚는 분석도 있다.


기존 용인 클러스터의 전력·용수가 이미 한계에 다다랐고,

영남권은 RE100(재생에너지 100% 사용)

요건을 맞추기 어려운 상황이라,

청정에너지가 남는 호남이

대안으로 부각된 측면이

실제로 있었다는 것이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로서도

"정권의 등 떠밀기를 무시할 수 없지만,

반도체 슈퍼사이클을 앞두고

타이밍을 놓칠 수 없다는 위기감이 컸다"는게

업계의 전언이다.


순수한 강제도,

순수한 자발도 아닌,

정부가 판을 깔고 기업이

그 안에서 손익계산을 한 결과에 가깝다는 분석이다.


이 논란이 유독 커진 데는 속도 문제도 있다.

호남이라는 지역이 구체적으로 흘러나오기 시작한 게

발표 불과 보름 전이었고,

별다른 공론화 과정 없이

속전속결로 결정이 이뤄졌다.


이 속도감 자체가

"기업의 독자적 판단"이라는

설명에 대한 의구심을 키운 측면이 있다.


시민슬롯의 반응.

에너지정의행동,

녹색연합,

환경운동연합,

기후정의동맹,

녹색전환연구소,

참여연대,

환경정의 등

여러 환경단체가

동시다발적으로 성명을 냈다.


녹색연합은 "재벌 기업들을 위한 전력,

용수 공급을 위해 지역 주민이 환경 파괴를

감내하고 모두가 온실가스 배출 바카라임을

떠안게 되는 명백한 에너지 착취"라 규정했다.


환경운동연합은 "생태적·민주적 관점 없이

개발을 되풀이하면 이재명 정부는

또 하나의 개발 독재 정부로 기억될 것"이라 경고했다.


기후정의동맹은 "슬롯적 토의와

민주적 검토 없이 나온 일방적인 개발 계획"이자

"기후위기 대응 포기·기후부정의 선언"이라 못박았다.


정치권의 반발.

대구시장 당선인과 경북지사는

"호남 편중 투자 즉각 철회하라"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철우 경북지사는 "전공정 팹까지

특정 지역에 집중시키는 건

기존 국가첨단전략산업 정바카라과도

배치될 수 있다"고 주장했고,

추경호 대구시장 당선인은 이를

"국가균형발전이 아니라 국가 균열 발전"이라 규정했다.


구미시장은 맞불로 반도체 클러스터 부지를

평당 1000원에 공급하겠다는

파격 제안을 내놓기도 했다.


부울경 지역구 의원 26명은

"균형발전이 아니라 균형차별"이라 비판했다.

반면 국민의힘 내 호남 출신 정치인들은

결이 다른 목소리를 냈다.


양향자 최고위원은 "호남도 대한민국이다.

반도체 앞에 좌우가 어디 있나,

전력망에 진보·보수가 어디 있나"라고 말했고,

이정현 전 대표도 "국민의힘이 바뀌어야 한다"고 쓴소리를 보탰다.


여론의 균열.

"이 결정이 기업의 자율적 판단이냐,

정부의 압력이냐"를 물은 조사에서

응답자의 52.8%가 "정부의 압력"이라 답했고

40.4%만 "기업의 자율적 결정"이라 답했다.


지역별로도 광주·전남·전북의 찬성은

72.8%인 반면 대구·경북은 32.8%,

부산·울산·경남은 36.2%에 그쳐

극과 극으로 갈렸다.


18~29세 청년층은 찬성 39.1%로

전 연령대 중 가장 부정적이었다.


이 이슈는 정당 지지율에도

실시간으로 반영되고 있다.

한 여론조사는 이 사안으로

민주당이 광주·전라·40대 지지층 결집 효과를,

국민의힘이 영남권 결집 효과를 각각 봤다고 분석했다.


그나마 제도적 뒷받침은 마련되는 중이다.

오는 8월 시행 예정인 반도체특별법에 따라,

산업통상자원부는 비수도권 지역에 한해

국가가 용수·전력 등을 최대 100% 지원하는

시행령을 입법예고했다.


다만 이 지원이 실제로 위에 언급한

물·전력·인력 문제를 얼마나 해소해줄 수 있을지는

아직 미지수다.


반복되는 굴레


정리해보면 이렇다.


조선의 세곡,

일제의 쌀,

경제개발기의 공장,

그리고 지금의 반도체까지.


시대는 바뀌었지만 패턴은 낯익다.

국가나 자본이 필요로 할 때

호남의 자원과 땅이 동원되고,

그 몫이 지역에 온전히 돌아오는지는

매번 사후에 다퉈야 하는 문제로 남는다.


동시에 코스트코와 복합쇼핑몰 사례가 보여주듯,

반세기 넘게 배제당한 지역은

이제 개발이 와도 곧바로 반기지 않는다.


조건부터 따지고,

협상에 수년을 쓰고,

그 사이 옆 도시는 앞서나간다.


이건 이기적이라기보다,

오랜 배제가 만들어놓은 방어기제에 가깝다.

"이번엔 정말 우리 몫이 돌아올까"라는

의심이 습관이 된 것이다.


문제는 이 두 가지

구조적 배제와 방어적 습관이

서로를 강화한다는 점이다.


투자가 늦어지니 지역은 낙후되고,

낙후되니 협상력이 없어 조건을 세게 요구하고,

조건을 세게 요구하니 다시

"까다로운 지역"이라는 평가를 받고,

그 평가가 다음 투자를 또 망설이게 만든다.


지금 반도체 클러스터를 둘러싼

물, 전력, 탄소중립, 무안 갈등, 환경단체의 반발,

영남권의 반발과 여론의 균열까지

이 모든 논쟁은 새로운 게 아니다.

같은 순환의 최신판이다.


"그동안 뭘 안 해줬다"는 항의와

"그동안 뭘 해도 반대했다"는 평가는,

서로 다른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의 긴 역사가 만들어낸 두 개의 얼굴이다.


조선의 세곡,

일제의 쌀,

경제개발기의 공장,

그 모든 시기에 걸쳐 반복된

배제가 방어적 태도를 낳았고,

그 방어적 태도가 다시

"발전이 늦은 건 자업자득"이라는

평가로 돌아오는 순환.


이 순환이,

800조 원이 걸린 지금이라고

다르게 흘러갈 이유가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