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외가 만든 유산

방치가 보존이 되다

by다소느림

주말, 낙안읍성을 방문했다.

입구 쪽은 정비가 잘 돼 있었다.

매표소, 안내판, 관광객 동선을 유도하는 표지판들.

초가지붕이 가지런히 이어지고,

돌담이 단정하게 쌓여 있었다.


낙안읍성 길(편집본).jpg

처음 몇 걸음은 예상한 풍경이었다.

하지만 발길을 안쪽으로 더 옮겼더니

금세 다른풍경이 나왔다.


동선에서 한 골목만 벗어나도 분위기가 바뀌었다.

돌담 틈새에 잡풀이 자라 있었다.

손이 닿지 않은 지붕 한쪽이

눅눅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관광객용으로 정비된 바깥 경계와,

실제 주민이 사는 안쪽 사이에

눈에 보이는 경계선이 있었다.


카메라를 든 사람들이 걷는 동선이 있었고,

그 동선 바깥이 있었다.


그 바깥에서 한복을 입은 사람이

마당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관광 안내원도 아니었고

체험 프로그램 진행자도 아니었다.


그냥 여기 사는 사람이었다.

시선이 닿자 고개를 들지 않았다.


익숙한 듯했다.

관광객의 시선에

익숙한 사람의 움직임이었다.


그리고 조용했다.

연간 120만 명이 찾는다는 곳치고 조용했다.


주말인데도 사람이 많지 않았다.

삼삼오오 돌아다니는 관광객들이 있었지만,

마을 전체를 채울 만한 인파는 없었다.


그 조용함이 이상했다.

SNS에서 인증샷이 터지는 곳들은

주말마다 줄이 선다.


보성 윤제림,

신안 퍼플섬,

고흥 쑥섬.


색감이 강하고 사진이 잘 나오는 곳은 사람이 몰린다.

낙안읍성은 달랐다.


초가지붕은 사진 앱의 필터 없이는 흐릿하게 나왔다.

돌담은 감성적이기보다

그냥 낡아 보였다.


SNS에서 소비되는 방식의 공간이 아니었다.

조용한 이유가 거기 있었다.


그러나 그 조용함 안에서,

이 마을이 품고 있는 것들이

비로소 보이기 시작했다.


숫자로 보는 낙안읍성


낙안읍성은 전라남도 순천시 낙안면에 있는 조선시대 읍성이다.


1397년 조선 태조 6년,

왜구 침입을 막기 위해

낙안 출신 김빈길 장군이

토성을 쌓으면서 시작됐다.


1424년 석성으로 개축했고,

1626년 낙안군수 임경업 장군이

지금의 형태로 완성했다.


둘레 1,410m. 높이 3~5m.

평지에 쌓은 석성.


국내 3대 읍성(해미읍성·고창읍성·낙안읍성) 중

유일하게 성곽 안에 주민이 실제 거주하는 곳이다.

1983년 국가 사적 제302호로 지정됐다.


2011년 유네스코 세계유산 잠정목록에 이름을 올렸다.

CNN이 선정한 '한국에서 가봐야 할 50곳'에 포함됐다.

국가유산청 선정 가족 여행지 32선.


성벽 안에는 초가집 290여 채가 있다.

3개 마을(동내리·남내리·서내리)에 걸쳐

108가구가 등록돼 있다.


그 중 실제 거주 가구는 98가구.

주민 수는 228명이다.


그리고 이 마을을 연간 120만 명이 찾는다.

관광객 대 주민 비율.

약 5,263 대 1이다.


입장료는 성인 4,000원,

청소년·군인 2,500원,

어린이 1,500원.


성인 방문객 비율을 70%로 가정하면

단순 계산으로 연간 입장 수익만 33억 원을 넘는다.

120만 명이 찾는 마을에 228명이 산다.


33억 원이 걷히는 공간에서

주민에게 돌아가는 몫은 공개되지 않는다.

이 숫자들이 낙안읍성의 모든

구조적 긴장을 압축하고 있다.


"살아있는 민속마을"


낙안읍성 전경.jpg

낙안읍성을 소개하는 모든 자료에는

이 문장이 붙는다.


"살아있는 민속마을."


전국에 전통 민속마을은 여럿 있다.

경주 양동마을,

안동 하회마을,

제주 성읍마을.


그러나 이들은 모두 성곽 바깥의 마을이다.

낙안읍성은 다르다.


1,410m 석성 안에 주민이 실제로 산다.

이 형태가 보존된 국내 유일의 사례다.

전시용으로 조성된 용인 한국민속촌이나

영주 선비촌과는 출발점이 다르다.


낙안읍성의 초가집은 꾸며 놓은 세트장이 아니다.

18~19세기부터 이어져 온 실제 집이다.

그 집 안에서 실제 사람들이

오늘도 농사를 짓고

민박을 치고

채마밭을 일군다.


주민들이 살아가고 있다는 그 사실.

그것이 낙안읍성을 특별하게 만드는 유일한 조건이다.


그리고 동시에,

낙안읍성을 가장 복잡하게 만드는 조건이기도 하다.


보존의 역설 1: 저항이 소외를 낳고, 소외가 보존을 낳았다


낙안읍성이 지금의 모습으로 남아 있는 이유를 이해하려면

1908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1908년 10월 15일.

낙안군이 폐군됐다.


조선시대 이래 수백 년간

독립된 행정구역이었던 낙안군이

지도에서 사라졌다.


남부 지역인 고상면·고하면·남상면·남하면은 보성군으로,

나머지 지역은 순천군으로 분할 편입됐다.

지금의 벌교읍 일대가 그렇게 보성군 소속이 됐다.


왜였을까.


승정원일기에는 "郡의 폐합에 관한 건을 재가하여

이에 반포하게 하노라"는 짧은 기록만 남아 있다.

이유와 목적은 없다.


그러나 역사학계의 정설은

다른 곳을 가리킨다.


1908년 4월,

보성 출신 의병장 안규홍이 의병을 일으켰다.

안규홍은 머슴과 소작농을 근간으로 한

토착 농민 의병이었다.


이전 의병이 양반 유생 중심이었다면,

안규홍 부대는 반봉건적 성격을 뚜렷이 띠었다.

빈농과 머슴이 주축이었고,

일본 세력 구축·친일파 제거·탐관오리 근절을

활동 방향으로 삼았다.


안규홍 부대의 활동 무대는 보성에서 순천,

광양 백운산까지 이어졌다.


1908년 4월 거병한 이후

1909년 10월까지 약 1년 6개월 동안

수십 차례 투쟁을 전개했다.


일본군과 무려 26차례 싸워 승리했다.

낙안군 일대는 그 핵심 거점이었다.


벌교에서 일본 순사를 맨주먹으로 쓰러뜨렸다는

전설이 지금도 전해진다.

"벌교에서 주먹 자랑하지 마라"는 말의

원조가 바로 안규홍이다.


1963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됐다.


1908년은 전국 의병 절정기였다.

전국 의병 봉기 인원이 7만 명을 넘었고,

충돌 건수는 1,450여 건에 달했다.


낙안군은 그 불길이 가장 거센 곳 중 하나였다.

일제는 항일 활동의 거점을 행정적으로

지워버리는 방식으로 보복했다.


낙안군 폐군이 안규홍 의병 활동에 대한 보복이라는 것은

역사학계의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지워진 고을은 이후 순천의 변두리로 전락했다.

중심지 기능을 잃었다.

경제발전에서 소외됐다.

개발이 비켜갔다.


도시화의 물결이 미치지 않았다.

그 결과로 읍성이 살아남았다.


저항했기 때문에 지워졌다.

지워졌기 때문에 개발되지 않았다.

개발되지 않았기 때문에 보존됐다.


"낙안(樂安)"은 "즐겁고 편안한 땅"이라는 뜻이다.

항일 저항의 보복으로 고을이 지워졌고,

그 덕분에 600년 유산이 살아남은 땅이다.


비슷한 아이러니는 순천만에도 있다.

매립해서 공단을 유치하려다

주민 갈등 끝에 보존하기로 결정했고,

그 덕분에 지금 세계적인 생태 자원이 됐다.


낙안읍성과 순천만,

두 곳 모두 보존의 의도가 아니라

방치와 소외와 갈등이 만들어낸 유산이다.


보존의 역설 2: '원형 보존'이라는 말의 이면


낙안읍성을 홍보하는 모든 자료에

"원형 보존"이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사실관계를 들여다보면 다른 그림이 나온다.

1983년 낙안읍성이 국가 사적으로 지정됐을 당시,

동문 주변을 제외한 대부분의 성벽은 절반 정도만 남은 상태였다.

6·25전쟁 이후 성이 심각하게 훼손됐기 때문이다.


1984년부터 대대적인 복원·정비 사업이 시작됐다.

동문과 서문이 이 시기에 복원됐다.

성벽도 이 시기에 정비됐다.


관광객들이 마주하는 핵심 건물들의 내력을 확인해보자.


남원의 광한루, 순천의 연자루와 함께

호남 3대 명루로 꼽혔던 낙민루는

1951년 북한군에 의해 소실됐다.

1987년에야 복원됐다.


동헌, 내아, 옥사 등

관아 건축물들도 모두 현대에 복원됐다.


2019년부터 2021년까지는

동벽·남벽·북벽 일부 구간이 무너지거나

배부름 현상이 나타났다.


정비 보수 과정에서 원인이 밝혀졌다.

심석을 쓰지 않고 면석쌓기를 하고

내외벽 사이에 흙과 돌을 채워 넣은 탓이었다.

결국 해당 구간은 최하단까지 해체하고

처음부터 다시 쌓았다.


성곽만이 아니다.

민가 상황은 더 복잡하다.


낙안읍성 내 가옥의 60%는

주민 소유로 실제 거주 중이다.

겉모양은 초가집이다.

그러나 내부는 다르다.


입식부엌, 수세식 화장실, 현대식 난방 시설.

사적지 규정상 외관은 초가를 유지해야 하지만,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내부는 현대적으로 바뀌었다.


겉은 조선이고 속은 현대다.

이 간극이 유네스코 세계유산 본등재가

15년째 이루어지지 않는 핵심 이유 중 하나다.


유네스코가 등재의 핵심 기준으로 요구하는 것이

"진정성(Authenticity)"이기 때문이다.


600년 전통이라고 홍보되는 공간에서,

실제로 600년을 견뎌온 구조물은 얼마나 되는가.

그 질문에 명확하게 답하기 어렵다는 것이

낙안읍성의 현실이다.


하회·양동은 됐는데, 낙안읍성은 왜 안 됐나


안동 하회마을과 경주 양동마을은

2010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됐다.

낙안읍성은 2011년 유네스코 세계유산 잠정목록에 올랐다.


잠정목록 등재 시점으로만 보면

낙안읍성이 하회·양동보다 불과 1년 늦다.

그러나 결과는 달랐다.


하회·양동은 2010년 본등재됐다.

낙안읍성은 2026년 현재까지

15년째 잠정목록에 머물러 있다.


유네스코가 하회·양동을 등재할 때

제시한 기준을 정확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씨족 마을의 대표적인 사례로서,

500여 년 동안 유교적 이념에 따라

형성된 촌락 형태를 원형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공동체놀이, 세시풍속, 관혼상제 등

주민들의 생활과 밀접한 무형유산이 세대를 이어 전승되고 있다."


"한국인의 전통적인 삶이 그대로 전승되고 있는 생활공간이며,

주민들이 세대를 이어 삶을 영위하고 있는 살아있는 유산(Living Heritage)이다."


이 기준에 비춰볼 때

낙안읍성의 구조적 한계가 드러난다.


첫째, 씨족 정체성의 문제다.


하회마을은 풍산 류씨 집성촌이다.

양동마을은 경주 이씨와 경주 손씨

씨족의 혼인으로 형성된 마을이다.


두 곳 모두 같은 성씨가 수백 년을 이어온 혈통 공동체다.

유네스코 등재 기준의 핵심인 "씨족 문화의 연속성"이 있다.


한국의 역사마을 중 씨족마을이

전체의 약 80%를 차지하고,

유네스코 평가 틀 자체가 씨족 중심으로 설계돼 있다.


낙안읍성은 다르다.


양반과 평민이 혼재하는 읍성 행정 마을이다.

씨족 정체성이 아니라 행정 단위 정체성을 가진 공간이다.

낙안읍성의 가치가 하회·양동보다 낮다는 게 아니다.

평가 기준의 틀 자체가 씨족 마을에 맞춰져 있다는 뜻이다.


둘째, 진정성(Authenticity) 문제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낙안읍성의 관아 건물 대부분은

1980~90년대 복원물이다.


민가 내부는 현대식이다.

성벽은 2020년대에도 무너져 다시 쌓고 있다.

유네스코가 요구하는 원형의 진정성을 충족하기 어렵다.


셋째, 무형유산 전승의 연속성 입증 문제다.


낙안읍성은 낙안군악, 공동체 제의, 판소리 등

무형유산의 전승지로 가치가 있다고 평가받는다.


그러나 이 무형유산이 현재 마을 주민들에 의해

실제로 전승되고 있는지 입증하는 것이 핵심 과제다.

경연대회를 개최하는 것과,

마을 주민이 그 전통을 살아서 이어가는 것은 다른 문제다.


판소리의 고향, 그러나 소리꾼이 사는가


낙안읍성에는 세간에 잘 알려지지 않은 정체성이 있다.

이 마을은 조선 판소리의 성지다.


동편제의 거장 송만갑(1865~1939) 국창이

이 마을에서 20년을 살았다.


가야금병창의 중시조 오태석(1895~1953) 명인이

이 마을 동내리 398번지에서 태어났다.


오태석이 스무 살 되던 해,

마침 낙안읍성에 들어와 20년간 머물던 송만갑을 만났다.

그에게서 동편제 판소리를 배웠다.


오태석은 이후 가야금병창을 집대성해

국내 무형유산의 중요한 축을 세웠다.

동편제 판소리의 핵심 계보가 이 마을을 통과했다.


조선 말기 판소리 8명창 가운데

동편제를 대표하는 이름이 송만갑이다.


그가 20년을 산 마을이 낙안읍성이고,

그의 제자 박봉술·박동진으로 이어지는

동편제 계보가 여기서 단단해졌다.


순천시는 이 유산을 행사로 활용한다.

2008년부터 낙안읍성 전국 국악대전과

전국 가야금병창 경연대회를 매년 개최하고 있다.


국회의장상,

국무총리상,

교육부장관상,

문화체육관광부장관상이 수여된다.


전국의 국악인들에게 등용문으로 알려진 대회다.

그러나 경연대회가 있다는 것과

전승이 이루어진다는 것은 다른 이야기다.


전국에서 참가자들이 낙안읍성을 찾는 것은 성지 순례다.

낙안읍성 주민이 소리를 배우고

다음 세대에 넘기는 것은 전승이다.


낙안읍성이 "무형유산 전승지"라는 표현은

과거에 그랬다는 의미인가.

지금도 그렇다는 의미인가.


이 모호함이 유네스코 등재 심사에서

가장 취약한 고리가 된다.


"살아있는 유산"임을 증명하려면,

그 유산을 살아서 이어가는 사람이

마을 안에 있어야 한다.


재산권이 묶인 사람들


낙안읍성 주민들은 특이한 법적 지위에 있다.

국가 사적 제302호 안에 사는 사람들이다.

집을 고치려면 문화재청의 허가가 필요하다.

외관을 임의로 바꿀 수 없다.


보일러 교체, 단열재 설치 같은

일상적인 시설 개선도 규제를 받는다.

현대식 건물을 증축하는 것은 원천 불가능하다.


이것이 문화재보호법의 구조다.

문화재보호법은 문화재 보호를 위해

광범위한 재산권 제한 규정을 둔다.


그러나 손실보상에 대해서는

내용, 방법, 기준 모두가 미비하다.

규제는 강하지만

지원은 약하다.


놀랍게도 국가유산청 스스로

이 문제를 인정한 공식 자료가 있다.


"문화재보호법은 문화재로 지정된 것을 대상으로

원형 보존적 규제를 실시할 뿐 주민 지원사업 등을

실시하지 않기 때문에 인근지역의 쇠퇴화를

촉진시키는 문제가 있었다."


"쇠퇴화를 촉진시킨다."

국가 공문서에 등장하는 표현이다.


낙안읍성 주민들은 바로 그

쇠퇴화의 한가운데서 살아가고 있다.

집을 개량할 수 없으니 불편한 생활이 이어진다.

수익을 창출할 수 있는 상업 시설도 마음대로 설치하지 못한다.


마을을 가득 채우는 관광객 120만 명의 흐름에서

정작 주민은 바깥에 있다.


한 칼럼니스트가 이 상황을 이렇게 정리했다.

"그들은 월급을 받고 볼거리를 제공하는 직업인이 아니다.

일반 시민과 똑같은 주민이며,

사생활을 보호받을 권리가 있는 국민이다."


정확한 문장이다.


낙안읍성 주민들은 공무원도,

전시 인력도,

관광 서비스 제공자도 아니다.

그냥 이 땅에서 살아온 사람들이다.


그 삶이 어쩌다 유산의 조건이 됐고,

그 조건 때문에 재산권을 제한받는 상황에 놓였다.


입장료 33억, 주민들에게 돌아간 몫은?


입장료 수익 구조를 한 번 따져보자.


성인 입장료 4,000원.

청소년·군인 2,500원.

어린이 1,500원.

연간 방문객 120만 명.


성인 비율을 70%로 가정하면

성인 방문객은 약 84만 명이다.

입장 수익만 단순 계산해도

연간 33억 6,000만 원을 넘는다.


관리 주체는 순천시 낙안읍성지원사업소다.

이 수익이 어떻게 집행되는지,

주민 지원에 얼마나 쓰이는지에 대한 공개 자료는 없다.


주민들이 생계와 연결할 수 있는 수단은 한정적이다.

민박 운영, 농산물 직접 판매, 마을 내 식당 운영 정도다.


입장료 수익에서 직접적인 몫을 받는 구조가 아니다.

120만 명을 끌어들이는 핵심 자원은

"사람이 산다"는 사실이다.


주민이 사라지면 낙안읍성은

용인 민속촌과 다를 바가 없다.


그 사실의 가치를 국가가 취하면서,

그 가치를 만드는 주민에게

어떤 몫이 돌아가는지는 불투명하다.

수혜와 기여의 불균형이다.


전주한옥마을과의 대비


전주한옥마을을 낙안읍성과 나란히 놓으면

대조적인 그림이 나온다.

전주한옥마을 연간 방문객은 약 1,000만 명.

낙안읍성의 8배 이상이다.


그러나 전주한옥마을에서

실제 주민이 사는 비율은 점점 낮아지고 있다.


한복 대여점, 카페, 관광 식당이 골목을 채웠다.

원주민이 밀려나고 상업 시설이 그 자리를 채웠다.

젠트리피케이션이 진행된 공간이다.


낙안읍성은 반대 방향의 문제를 안고 있다.

사적지 규제로 상업화가 원천 제한된다.


주민은 남아 있지만 생계 수단이 좁다.

방문객도 상대적으로 적고,

수익 구조도 불투명하다.


두 곳을 나란히 보면 이런 구도가 나온다.


전주한옥마을: 상업화 과잉 → 원주민 이탈.

낙안읍성: 보존 규제 과잉 → 원주민 생계 제약.


어느 쪽도 "사람이 사는 전통 공간"의

지속 가능한 모델이 아니다.


한쪽은 사람을 내쫓고 관광지가 됐다.

한쪽은 사람을 묶어놓고 관광지가 됐다.

결과는 다르지만 구조적 문제의 방향은 같다.


주민이 중심이 아닌 관광지.


40%, 이미 비어가고 있는 마을


현재 낙안읍성 가구 중 60%만

주민이 실제 거주 중이다.

나머지 40%는 이미 빈집이거나

관광 목적으로 전환된 상태다.


228명의 주민 중 연령 분포는

공식적으로 공개되지 않는다.


그러나 전남 농촌 지역의 고령화 추세,

사적지 규제로 인한 생활 불편,

일자리 부재를 감안하면 젊은 세대가

마을에 남아 있을 유인은 크지 않다.


마을에서 태어나 평생 살아온 노인 세대가

하나씩 세상을 떠나면 어떻게 되는가.

그 빈자리를 채울 다음 세대가 있는가.


228명이 150명이 되고,

100명이 되고,

50명이 된다.


그때도 낙안읍성은 "살아있는 민속마을"인가.

아니면 주민이 사라진 빈 초가집들의 박물관인가.


낙안읍성과 용인 한국민속촌의 차이는 딱 하나였다.

실제 주민이 존재한다는 것.

그 차이가 사라지면

낙안읍성은 무엇이 되는가.


1908년이 묻고, 2026년이 답하지 않는 질문


1908년, 일제가 낙안군을 지도에서 지웠다.

항일 저항에 대한 보복이었다.

지워진 고을은 소외됐다.

소외된 덕분에 읍성이 살아남았다.


1983년, 국가가 이 마을을 사적으로 지정했다.

주민의 재산권이 제한됐다.

그 상태로 40년이 지났다.


2011년, 유네스코 잠정목록에 올랐다.

본등재를 위해서는 "살아있는 유산"임을 입증해야 한다.


그런데 그 유산을 살아있게 만드는 주민들의 조건은

40년 동안 나아지지 않았다.


2026년 현재.

연간 120만 명이 찾아온다.

입장료 수익은 수십억 원이 넘는다.


CNN이 한국 대표 관광지로 소개한다.

국가유산청이 가족 여행지로 추천한다.


그 모든 가치의 원천이 "사람이 산다"는 사실인데.

사람이 계속 살 수 있는 조건에 대해서는

아무도 명확히 답하지 않는다.


낙안읍성은 보존됐다.

그러나 무엇을,

누구를 위해 보존된 것인가.


성벽은 남아 있다.

초가지붕은 유지되고 있고

관아는 복원됐다.


그 안에서 살아온 사람들의 권리는 어디에 보존돼 있는가.


저항이 소외를 낳고,

소외가 방치를 낳고,

방치가 보존을 낳은 이 역설의 공간에서.


2026년에도 228명이 불을 때고

채마밭을 일구고 있다.


이 마을을 살아있게 만드는 건 성벽이 아니다.

그 228명이다.


그 228명이 사라지는 날,

낙안읍성이라는 유산도

진짜 사라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