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라지꽃 한 송이가 만든 섬

퍼플섬을 걷다

by다소느림

신안 퍼플섬에 다녀왔다.

반월도와 박지도.

다리 하나로 이어진 두 개의 작은 섬.


포털에 검색하면 따라붙는 수식어는 화려하다.

UN세계관광기구가 인정한 '세계 최우수 관광마을'.

연간 40만 명이 찾는 전남 대표 관광지.

보라색 옷이나 신발,

액세서리를 착용하면 입장료가 무료가 되는 섬.


그러나 막상 걸어본 섬은,

수식어가 만들어낸 기대치를 따라가지 못했다.


생각보다 컸고,

생각보다 사람이 많았고,

생각보다 볼 것은 적었다.


날씨는 맑았다.

사진과 영상은 잘 나왔다.

그런데 다리를 다 건너고 나서

남은 감정은 '예뻤다'보다

'의외로 짧았다'에 가까웠다.


길게 잡아도 반나절이면 끝나는 동선 안에,

섬이 가진 이야기는 생각보다 압축돼 있었다.

화려한 수식어와 실제 체류 시간 사이의 격차.


이 글은 그 간극에 대한 이야기다.


도라지꽃에서 시작된 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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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플섬의 시작은 거창하지 않았다.


신안군에 따르면,

반월도와 박지도에 자생하던 보라색 도라지꽃과 꿀풀,

그리고 지역에서 재배하던 콜라비가 보라색이라는 점에 착안해

섬 전체를 보라색으로 꾸미기 시작한 것이 출발점이었다.


2015년 전라남도 '가고 싶은 섬' 사업에 선정된 이후,

2018년부터 주민 90%에 해당하는 60가구가

자발적으로 지붕을 보라색으로 칠하고

마을 빈터에 라벤더를 심었다.


목교와 해안 산바카라로, 창고 벽,

심지어 앞치마와 식기, 쓰레기통, 커피잔까지

보라색으로 통일한 이 작업은

국내 최초로 섬 전체를 하나의 색으로

이미지메이킹한 사례로 평가받는다.


다리에는 사연도 있다.

평생 박지도에서 살아온 김매금 할머니가

"걸어서 육지로 나오고 싶다"는 소망을 신안군에 전했고,

2007년 첫 목조 다리가 놓였다.


그전까지 박지도와 반월도 주민들은

안좌도 두리마을에서 배를 타고 드나들어야 했다.


다리가 놓이기 전까지 섬은

물때에 발이 묶이는 곳이었다는 뜻이다.

이후 2007년부터 2011년에 걸쳐 안좌도와 반월도,

박지도를 잇는 해상보행교 공사가 단계적으로 진행됐고,

문브릿지(380m)와 두 개의 퍼플교(915m, 547m)가

차례로 들어서며 지금의 퍼플섬이 완성됐다.


다리 전체 길이는 자료에 따라 1.8km 안팎,

많게는 1,492m에 이르는 단일 구간으로 소개되기도 하는데,

천천히 걸으면 2~3시간이 걸리는 코스로 안내된다.


세 섬의 둘레를 모두 걷는다면

10km 안팎까지 늘어난다.


섬 안에는 꽃밭과 다리 말고도

별도의 콘텐츠 시설이 있다.

매표소 인근에는 '퍼플박스'라는 복합 문화 창고가 있는데,

신안 앞바다 해저 유물 이야기와 고흐, 고갱, 클림트 같은

화가들의 작품을 20×10m 규모의 공간에 미디어아트로 풀어낸다.


건물 뒤편에는 포토존도 따로 꾸며져 있다.

즉 퍼플섬의 콘텐츠는 '자연(꽃과 다리)'과

'인공 콘텐츠(미디어아트, 포토존)'로 나뉘어 있는 구조이고,

이 두 축이 섬 전체 체류 시간을 떠받치고 있는 셈이다.


전략은 통했다.


2020년 20만3천 명이던 방문객은

2021년 28만7천 명,

2022년 38만5천 명으로

해마다 가파르게 늘었고,

2021년에는 천 개가 넘는 섬을 거느린

신안군 전체에서 가장 먼저

UNWTO 세계 최우수 관광마을과

한국관광공사 '한국관광의 별' 본상을

동시에 거머쥐었다.


같은 해 처음 시작된

UNWTO '세계 최우수 관광마을' 선정 사업에는

세계 75개국 170개 마을이 본선에 올라 경쟁했는데,

그 안에서 반월·박지도가 최고 등급을 받은 것이다.


2015년부터 전라남도와 신안군이

이 작업에 투입한 예산은 약 45억 원으로 알려져 있다.


작은 섬 두 곳에 투입된 예산치고는

결코 적지 않은 금액이고,

그만큼 결과도 분명했다.


130명의 섬, 40만 명의 발걸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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숫자를 다시 들여다보면,

이 성공은 동시에 불균형의 기록이기도 하다.


퍼플섬의 상주인구는 130여 명 안팎이다.

연간 방문객이 40만 명을 넘는다는 것은,

인구의 3,000배에 달하는 외부인이 매년

이 작은 섬을 거쳐 간다는 뜻이다.


2022년 기준으로도 38만5천 명의 방문객이

당시 인구(151명)의 2,500배가 넘는 규모였다는 점이 보도된 바 있다.


박지도에서 열리는 라벤더 축제 기간 중에는

그 비대칭이 더 극단적으로 드러난다.

2025년 축제는 16일부터 25일까지 열흘간 진행됐는데,

그 기간 동안에만 5만여 명이 다녀갔고

전년 대비 약 20% 증가한 수치였다.


그중 하루는 방문객이 1만 명을 넘기기도 했다.

인구의 약 100배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단 하루 만에 섬을 통과한 셈이다.


박지도와 반월도는 꽃으로 계절을 분업한다.

박지도의 라벤더 정원은 3만5,341㎡ 부지에

6만6,000주, 2,000만 송이의 프렌치 라벤더가 식재돼 있으며

통상 5월에 만개해 5월 중하순 축제로 절정을 이룬다.


지중해 프로방스의 라벤더 가든을

연상시킨다는 평가를 받을 만큼 규모가 크고,

축제 기간에는 보라옷 콘테스트와 버스킹,

라벤더 향 만들기 같은 부대 행사도 함께 열린다.


반대로 반월도를 채우는 버들마편초는

남미 열대 지방이 원산지인 식물로,

5월 말부터 피기 시작해 7월 중순까지 1차로 만개한다.


꽃을 잘라주는 관리 작업을 거치면

약 3주 뒤 다시 꽃이 피어나는 특성 덕분에

최장 10월까지 보랏빛을 유지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두 섬은 5월부터 10월까지,

사실상 절반의 한 해를 보라색으로 채우는 구조를 만들어냈다.


한 섬이 지는 시기에

다른 섬이 피어나는 식으로 운영되고 있다는 점에서,

이것을 단순한 우연이라고 부르기는 어렵다.


다만 이번 방문에서 마주한 라벤더는

기대만큼 풍성하지 않았다.


5월에 다녀온 지인 역시 비슷한 인상을 전했는데,

올해는 평년보다 낮은 기온으로

개화 시기 자체가 늦어졌다는 점을 감안하면

타이밍의 문제였을 가능성이 크다.


관리사무소 측도 늦은 개화를 고려해

축제 종료 이후 약 2주간 추가로

꽃을 볼 수 있도록 관리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반대로 6월 중순에 마주한 반월도의 버들마편초는,

화단이 아니라 길가에 자연스럽게 흘러가듯

심어진 모습이어서 오히려

인위적이지 않은 인상을 남겼다.


똑같이 '보라색 꽃'이라는 콘셉트 아래 있지만,

박지도가 정원처럼 정제된 느낌이라면

반월도는 야생화처럼 풀어놓은 느낌에 가까웠다.


누구를 위해 설계된 동선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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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눈에 들어온 것은 꽃이 아니라 동선이었다.


퍼플섬에는 두 가지 이동수단이 있다.

직접 운전하는 4인용 카트는 30분에 2만 원,

섬 주민이 직접 운전하며 섬 이야기를 들려주는 전동카트는

1인당 5,000원(4인 이상 출발 조건)이다.


공식 안내에 따르면

다리 전체를 걷는 데는 2~3시간이 걸린다.


짧지 않은 거리다.


입장료는 성인 기준 5,000원이지만,

보라색 옷이나 신발,

모자 같은 소품을 착용하면

무료로 입장할 수 있다는 점도 흥미롭다.


매표소에서 보라색 기념품을 판매하기도 하니,

입장료 자체도 결국 '보라색 소비'로 흡수되는 구조다.


문제는 배치였다.


섬에서 가장 핵심적인 볼거리로 꼽히는

라벤더 정원과 같은 꽃밭은 입구에서 상당히 떨어진,

안쪽 깊숙한 위치에 자리하고 있었다.


더위가 본격화되는 시기,

도보로 그 거리를 걷는 방문객은 많지 않았다.


대다수는 자연스럽게 카트에 올랐다.

매표소 근처의 퍼플박스(미디어아트센터)나

포토존 같은 가벼운 콘텐츠는 도보권 안에 있지만,

정작 섬의 상징과도 같은 꽃밭은

그 도보권 바깥에 놓여 있는 셈이다.


즉 '쉽게 닿는 콘텐츠'와

'진짜 보고 싶은 콘텐츠' 사이에

물리적 거리가 끼어드는 구조다.


이 동선이 의도된 설계인지,

아니면 지형적 한계에 따른 결과인지는

운영 주체의 공식 입장 없이 단정하기 어렵다.


다만 분명한 사실은 있다.

카트 운영의 수익은 섬 주민들에게 직접 돌아간다는 점이다.


신안군은 도서지역 정주여건 개선과

주민 소득 증대를 퍼플섬 조성 사업의 공식 목표로 명시해왔고,

우회도로 개설과 마을도로 포장,

주차장 확충, 선착장 확장 같은

인프라 사업 역시 관광과 주민 생활 편의를

동시에 겨냥한 것이었다.


신안군수는 한 인터뷰에서

섬 관광 정바카라의 성공 요인으로

'아름다운 자연, 고유의 이야기, 매력 넘치는 브랜딩'을 꼽으며

도서지역 특유의 불리한 조건을 거꾸로

경쟁력으로 바꾸는 전략을 강조한 바 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동선이 카트 쪽으로 자연스럽게 수렴하는 구조는

'상술'이라기보다 '주민 직접 수혜형 관광모델'이

작동한 결과에 가깝다.


다만 그 모델이 방문객 입장에서

자발적 선택처럼 느껴지는지,

사실상 유도된 소비처럼 느껴지는지는

또 다른 질문으로 남는다.


신안군은 이런 방식의 주민참여형 소득모델을

퍼플섬에만 적용하지 않는다.


신재생에너지 사업에 주민 지분 참여를 의무화하고

그 수익을 이른바 '햇빛연금' 형태로

정기 지급하는 정바카라 역시 같은 철학 위에 서 있다.


신안군의 면적은 육지와 바다를 합쳐

서울시의 22배에 달하는데,

평균 17% 수준의 태양광 발전 효율과

28% 수준의 풍력 발전 효율을 지속하면

산유국에 비견할 만한 신재생에너지 개발 이익이

가능하다는 것이 신안군의 설명이다.


소멸 위기를 겪던 작은 섬들이

관광과 에너지라는 서로 다른 자원을 통해

동시에 인구를 회복하고 있다는 점은,

퍼플섬의 동선 논쟁을 단순한 불편함이 아니라

지역 생존 전략의 일부로 다시 보게 만든다.


실제로 신안군 인구는 2023년 179명,

2024년 136명 순증가했고

무인도였던 곳에 주민이

새로 이주해 유인도로 바뀐 사례도 나왔다.


인구 소멸 지역에서

인구가 돌아오는 흐름은

전국적으로도 드문 사례다.


같은 신안, 다른 두 개의 얼굴


신안이라는 지명에는

또 하나의 기억이 따라붙는다.

2014년 세상에 알려진

이른바 '염전노예' 사건이다.


신안군 내 일부 염전에서

장애인을 비롯한 피해자들을 감금하고

임금을 착취한 사실이 드러나며

전국적 공분을 일으켰다.


피해자들은 섬을 빠져나오려

여러 차례 시도했지만

매번 마을 주민의 신고로 발각돼

도망치지 못했다는 증언이 알려지며,

사건은 단순히 악덕 업주 한 명의 일탈이 아니라

지역 공동체와 공권력이 사실상 방조했다는 논란으로 번졌다.


이후 정부 차원의 전수조사와

제도 개선으로 이어졌지만,

문제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2016년 새우잡이 어선 노동착취,

2018년과 2021년 장애인 노동착취 사건이

잇따라 보도되며 같은 유형의 문제가

반복되고 있다는 우려가 제기됐다.


2023년에는 한 온라인 게시글이

"퍼플섬을 관광지로 소비하지 말아야 한다"며

이 문제를 다시 환기시켰고,

여전히 근본적으로 해결되지 않은 문제라는

지적과 함께 적지 않은 반향을 낳았다.


다만 사실관계는 분명히 짚어야 한다.

이 사건들이 발생한 곳은 신안군 내 염전과 어선이며,

퍼플섬(반월도·박지도)이 그 사건의 직접 무대였던 적은 없다.


신안군은 공식 집계로

1,025개(유인도 76개, 무인도 949개)의 섬으로 이뤄진

국내 최대의 도서 지자체로,

행정구역은 하나지만 그 안에 생활권과

산업구조가 전혀 다른 수많은 섬이 존재한다.


작은 섬들끼리도 서로 생활권이 분리돼 있어

인접한 섬 주민들끼리만 강한 유대관계를 형성하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 사건이 외부에 쉽게 드러나지 않았던

배경으로 지목되기도 한다.


'신안=염전노예'와 '신안=퍼플섬'을

곧바로 등치시키는 것은

사실관계를 단순화하는 일이 될 수 있다.


그럼에도 이 두 기억이 같은 행정구역 안에서

공존한다는 사실 자체는 가볍지 않다.


한쪽은 전 세계가 인정한 관광 브랜드로 성장했고,

다른 한쪽은 10년 가까운 시간 동안 유사한 형태의

인권 문제가 간헐적으로 반복되며

충분히 해소되지 못했다는 지적을 받는다.


같은 땅에서 한쪽의 이야기는 적극적으로 알려지고,

다른 한쪽의 이야기는 사건이 터질 때만 잠깐 조명된다.


이 비대칭은 퍼플섬의 문제가 아니라,

신안이라는 지역이 스스로의 서사를 관리해온

방식에 대한 질문이다.


보라색으로 물든 섬의 사진이 SNS를 통해 퍼지는 속도와,

염전에서 벌어진 일이 세상에 알려지기까지

걸린 시간을 나란히 놓고 보면,

그 격차는 더 분명해진다.


색깔은 섬을 살렸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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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라지꽃 한 송이에서 출발한 발상은

결과적으로 작은 섬 두 개를 살려냈다.


인구 130명의 섬에 연간 40만 명이 찾아오게 만든

브랜딩의 힘은 부정하기 어렵다.

주민들은 새로운 소득원을 얻었고,

소멸 위기에 놓였던 섬은 세계가 주목하는 관광지가 됐다.


한때 무인도가 될 위기까지 겪었던 섬이

지금은 전 세계가 벤치마킹하는 컬러 마케팅 사례로 거론된다는 사실은,

도서지역 소멸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이 거대한 자본이나 인프라가 아니라

'이미 그 자리에 있던 것을 다르게 보는 시선'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그러나 브랜딩이 만든 것은 풍경이지,

콘텐츠의 밀도까지는 아니었다.


색깔 하나로 섬 전체를 물들이는 일은

강렬한 첫인상을 남기지만,

그 인상이 사라진 자리에

무엇이 남는지는 또 다른 문제다.


2~3시간이면 끝나는 동선,

핵심 볼거리를 향해 자연스럽게 카트로 유도되는 구조,

그리고 그 모든 것이 결국 누구의 소득으로 귀결되는지에 대한

질문은 한 번의 방문으로 다 풀리지 않는다.


동선은 누구의 편의를 위해 설계되었는가.


그 질문에 대한 답은 방문객의 지갑이 아니라,

섬에 남아 살아가는 130명의 삶에서 먼저 찾아야 할 것이다.


보라색은 분명 섬을 살렸다.


인구를 불러왔고,

세계지도 위에 작은 섬의 이름을 새겼다.


다만 그 색이 무엇을 보여주었고,

무엇을 가렸는지는 다녀온 사람들 각자의 몫으로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