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제부터 영웅의 후손입니다

22촌이 가족이라면, 대한민국은 이미 하나의 집안

by다소느림

2026년 6월 3일 지방선거를 앞두고

더불어민주당의 박찬대 인천시장 후보가

오랫동안 자신을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 석주 이상룡 선생의 외손이라고

소개해왔다는 사실이 논란이 됐다.


그는 이상룡 선생의 묘소를 찾아

"할아버지"라고 불렀고,

공식 석상과 선거 현장에서

독립운동가 후손임을 지속적으로 강조했다.


언론 보도와 선거 홍보물에서

임청각과의 인연은 박찬대라는 정치인을

구성하는 핵심 서사였다.


그런데 취재 결과 드러난 실제 관계는 달랐다.

뉴데일리가 계보상 칸 수를 단순 계산한 결과,

박찬대 후보와 이상룡 선생은 22촌 방계 혈족이었다.

논란이 커지자 박찬대 캠프는 즉각 해명에 나섰다.


"촌수가 아니라 피와 눈물로 맺어진 관계"라고 했고,

이상룡 선생의 직계 고손이자 종손인 이창수 씨도

기자간담회에 직접 참석해

"박찬대 후보 외가와 임청각 종가는

단순히 촌수로 계산할 수 없는 특별한 관계"라며

"촌수보다 중요한 것은 실제로

얼마나 가깝게 지내왔느냐"라고 강조했다.


국민의힘 쪽은 "약 10년간 22촌 방계를

2촌 외손으로 둔갑시킨 박찬대의 족보 마케팅"이라고 날을 세웠고,

독립유공자 박진해 선생의 직계 5대손은

허위사실 공표 혐의로 박찬대를 경찰에 고발했다.


박 후보는 사전투표를 마친 뒤

기자들과 만나 직접 입장을 밝혔다.


"임청각은 외가 종갓집인 것이 분명하며,

안동 유림 슬롯에서는 직계가 아닌

방계라 하더라도 다 일가나

문중으로 취급하고 있다"고 했다.


나는 이 논쟁을 보면서 오래 생각했다.

22촌이 할아버지가 될 수 있다면,

나는 누구의 후손인가.


그리고 이 나라에서 진짜 남은 누구인가.

나는 죽산 안씨이며

시골집은 전라남도 보성이다.


촌수란 무엇인가: 감정이 아니라 계산이다


촌수를 이해하려면

먼저 그것이 감정의 언어가 아니라

수학의 언어라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대한민국 민법은 세수등친제(世數等親制)를 채택하고 있다.

방계친족 사이의 촌수는 가장 가까운 공동 시조에서

각자에 이르는 세대수를 각각 계산해

그 합계로 정한다.


형제가 2촌인 이유는

나에서 부모까지 1세대,

부모에서 형제까지 1세대,

합산해서 2촌이기 때문이다.


삼촌이 3촌인 이유는

나에서 할아버지까지 2세대,

할아버지에서 삼촌까지 1세대,

합산 3촌이다.


사촌은 할아버지라는 공통 조상까지

각각 2세대씩 올라가야 하니 4촌이다.


이 계산법의 의미를 직관적으로 이해하려면

촌수가 높아질수록 공통 조상이

얼마나 오래전 사람인지를 따져보면 된다.


4촌 사이의 공통 조상은 할아버지다.

6촌 사이의 공통 조상은 증조할아버지다.

8촌이면 고조할아버지다.


민법이 8촌에서 법적 친족 관계를 끊은 이유가 여기 있다.

8촌이면 이미 공통 조상이 4대 전이고,

그 이상 올라가면 현실적으로

혈연적 연결고리를 체감하기 어렵다고 판단한 것이다.


22촌에 이 계산법을 거꾸로 적용하면 이렇게 된다.

나와 상대방의 공통 조상까지

각각 11세대씩 올라가야 연결된다.


한 세대를 25년으로 잡으면 11세대는 275년 전,

30년으로 잡으면 330년 전이다.


임진왜란이 1592년이고

병자호란이 1636년이다.

박찬대 후보와 이상룡 선생의 공통 조상은 임진왜란 전후,

늦어도 병자호란 무렵을 살았던 인물이라는 계산이 나온다.


그 인물의 이름을 아는 사람은,

아마 이 세상에 아무도 없을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오해 하나를 반드시 짚어야 한다.

이상룡 선생은 1858년생으로

불과 168년 전 사람이다.


22촌이라는 숫자는

이상룡 선생의 직계 후손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고성 이씨 가문 전체의 계보 트리에서

두 사람이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를 센 것이다.

이상룡 선생보다 훨씬 더 오래전에 갈라진

방계에서 각각 내려온 두 사람이,

같은 성씨 안에서 수백 년의 세월을 거쳐

겨우 연결된다는 뜻이다.


이상룡 선생은 22촌 관계의 한 끝점일 뿐이지,

박찬대 후보의 직계 조상이 아니다.

이 구분이 이 논란의 핵심이다.


민법 제777조는 이 문제를 진즉에 정리해두었다.

친족관계로 인한 법률상 효력이 미치는 범위는

8촌 이내의 혈족이다.


국가가 법으로 "친족"이라고

공식 인정하는 마지막 선이 8촌이다.

9촌부터는 법적으로 남이다.

22촌은 그 경계에서도 한참 더 나아간 자리다.


가족이라는 호칭은 고사하고,

법률의 어떤 조항도 22촌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

촌수 자체가 친족의 호칭으로 대용되는 범위도

3촌에서 8촌까지다.


숙부를 삼촌,

사촌 형제를 사촌이라고 부르는 것처럼

촌수 자체가 호칭이 되는 관계는

8촌이 사실상 마지막이다.

9촌부터는 촌수가 곧 호칭이 되지 않는다.


22촌에게는 우리말에 호칭 자체가 없다.

부를 방법이 없는 관계를

"할아버지"라고 불렀다는 것,

그것이 이 논란의 시작이었다.


22촌의 실제 스케일: 숫자로 보면 달라진다


22촌이 얼마나 먼 관계인지를

가장 직관적으로 보여주는 방법은,

그 논리를 한국의 대성씨에

그대로 적용해보는 것이다.


결과는 생각보다 훨씬 충격적이다.

통계청 2015년 인구주택총조사 기준으로

김씨는 전체 인구의 21.5%인 약 1,069만 명이다.

한국인 다섯 명 중 한 명이 김씨다.

이씨는 14.7%인 731만 명,

박씨는 8.4%인 419만 명이다.


이 세 성씨만 합쳐도

전체 인구의 44.6%인

2,219만 명이 넘는다.


최씨 233만 명,

정씨 215만 명까지 더하면

상위 5개 성씨가 이미

전체 인구의 절반을 넘어선다.


10대 성씨가 전체 인구의 63.9%를 차지한다.

길거리에서 만나는 사람 열 명 중

여섯 명 이상이 상위 10개 성씨 안에 있다.


본관별로 들어가면 더 구체적이다.

김해 김씨가 445만 명으로 전체 인구의 9%를 차지한다.


밀양 박씨 310만 명,

전주 이씨 263만 명이 뒤를 잇는다.

이 세 본관만 합쳐도 1,018만 명이다.

서울 인구와 맞먹는다.


같은 본관을 공유한다는 것은

공통 시조가 있다는 뜻이다.


밀양 박씨 310만 명은 모두

신라 경명왕의 후손이라는

공통 조상을 공유한다고 전해진다.


22촌을 할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다면,

그리고 박찬대 캠프가 말한 것처럼

촌수보다 중요한 것이 얼마나 가깝게 지내왔느냐라면,

다음 질문은 자연스럽게 도출된다.


밀양 박씨 310만 명은 전부

서로 할아버지거나 손자여야 한다.

그 310만 명이 설날 차례상을

어디서 차려야 하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더 넓혀보자.

2015년 기준으로 한국의 본관은 36,744개이고,

전체 인구는 약 5,100만 명이다.

본관당 평균 인구는 약 1,387명이다.


그런데 이 평균은 극단적으로

왜곡된 분포 속에서 나온 숫자다.


상위 본관 10개가 전체 인구의 40% 이상을 차지하고,

1,000명 이상이 쓰는 본관 858개에

전체 인구의 97.8%인 4,861만 명이 몰려 있다.


나머지 36,000개에 가까운 본관에는

겨우 2.2%의 인구가 흩어져 있다.


이 구조에서 큰 본관일수록 22촌은

오히려 더 가까운 편에 속하는 혈연이 된다.

김해 김씨 445만 명 안에서 22촌은 이미 가까운 관계다.


문제는 이 논리가 자기 파괴적이라는 데 있다.

22촌까지 가족이라면 30촌은 왜 안 되는가.

50촌은?


한반도에서 수천 년을 살아온 사람들이

어딘가에서 공통 조상으로 연결되지 않을 가능성은 얼마나 되는가.

실제로 인류 유전학은 충분한 세대가 지나면

집단 내 모든 개체가 공통 조상으로 수렴된다고 말한다.


한반도라는 한정된 지역에서

수천 년을 살아온 집단이라면 더욱 그렇다.

결국 이 논리의 종착점은 하나다.

대한민국 5,100만 명은 전부 한 집안이다.


동성동본 금혼: 헌법재판소가 이미 폐기한 논리


여기서 국가가 이미 한 번 내린 판단을 끌어와야 한다.

1997년까지 대한민국은 동성동본 금혼 제도를 유지했다.

민법 제809조는 동성동본인 혈족 사이의 혼인을 금지했다.

촌수를 따지지 않았다.


같은 성씨,

같은 본관이면 무조건이었다.


이 제도의 핵심 논리는

"같은 본관이면 혈족"이라는 것이었다.

촌수가 아무리 멀어도,

서로 얼굴 한 번 본 적 없어도,

같은 본관이라는 이유만으로

결혼이 금지됐다.


김해 김씨 445만 명은

법적으로 서로 결혼할 수 없었다.


이 제도의 역사는 길다.

고려시대까지만 해도 왕실에서는

동성 간 혼인이 비교적 자유로웠다.

조선시대에 접어들면서

유교적 가부장제와 결합해

동성동본 금혼이 슬롯 규범으로 자리 잡았다.


일제강점기에도 조선총독부는

1912년 조선민사령을 통해

조선의 친족·상속에 관한 사항은

관습에 따른다고 규정했고,

동성동본금혼제는 그대로 유지됐다.


해방 이후 1957년 민법 제정 때도

제809조로 명문화됐다.


중국에서는 1931년에,

북한에서는 1948년에 이미 폐지됐지만,

대한민국은 이 제도를 1997년까지 유지했다.


그 대가는 수치로 남아 있다.

헌법재판소 자료에 따르면,

1978년부터 1997년까지

약 8만 4천 쌍이 동성동본 금혼 제도로 인해

혼인신고에 어려움을 겪었다.


사랑해서 함께 살고 아이를 낳았지만,

같은 본관이라는 이유로

법적 부부가 되지 못한 커플이 그 숫자다.


1995년 이들은 헌법재판소의 문을 두드렸다.

당시 청구인들의 논리가 지금도 정확하게 들린다.


"김해 김씨, 전주 이씨, 밀양 박씨만 해도

전국에 수백만 명에 달한다.

지금은 씨족이 모여 사는 봉건슬롯가 아니다.

그런데도 법은 촌수도 따지지 않은 채

무조건 동성동본 결혼은 안 된다고 한다."


수백만 명을 하나의 혈족으로 묶는 것은

현실과 맞지 않는다는 주장이었다.

먼 촌수는 사실상 남이나 다름없다는

현실 인식이 그 바탕에 깔려 있었다.


1997년 7월 16일,

헌법재판소는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다.

효력은 중지됐고,

국회가 1998년 12월 31일까지

개정해야 했지만 시한을 넘기면서

1999년 1월 1일 자동 효력 상실됐다.


2005년 민법 개정으로

동성동본 금혼 제도는 완전히 폐지됐다.

현재는 8촌 이내의 혈족 사이에서만 혼인이 제한된다.


헌법재판소가 이 제도를 폐기한 이유의 핵심은 이것이다.

같은 본관이라도 촌수가 멀면

현실적으로 혈족으로 보기 어렵다는 것.

수백만 명을 하나의 혈연 집단으로 묶는 논리는

현대 슬롯에서 통용될 수 없다는 것.


국가는 그 판단을 1997년에 공식적으로 내렸다.

그런데 2026년 선거판에서

"22촌도 촌수로 설명할 수 없는

친가족 같은 사이"라는 주장이 나왔다.


헌법재판소가 30년 전에 이미 폐기한 논리,

즉 먼 방계도 같은 혈족이라는 논리가

선거 홍보의 언어로 부활한 것이다.


국가가 법으로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고

선언한 논리를 정치가 다시 꺼내든 셈이다.


족보 위조의 역사: 이것은 오래된 수법


족보를 정치적 자본으로 활용하는 것은

어제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다.


조선시대에는 그것이 더 노골적이었고,

더 광범위했으며,

더 조직적이었다.


영조 40년인 1764년,

한 역관이 각종 족보를 수집해

사적으로 활자를 주조하여

족보를 위조하다가 발각됐다.


당시 판매 대상은

주로 군역을 피하려는 사람들이었다.

기록에 따르면 이런 위조 행위는

비단 그 역관 한 명의 일이 아니었다.


호적을 위조하거나 족보를 사들여

양반 신분을 얻고,

고향을 떠나 신분을 감추고

양반으로 행세하는 사람들이

조선 후기 내내 꾸준히 늘어났다.


특히 시조로부터 단선으로 내려오는

계보 기록은 위조된 것이 많았고,

각 파들이 늘어나면서 시조는

점점 더 오래전으로 올라가는 경향을 보였다.


더 유명한 시조,

더 오래된 시조일수록

신분적 권위가 높아지기 때문이었다.


결과는 숫자로 남아 있다.

조선 초기 양반 비율은 약 7%였다.

조선 후기에는 약 70%까지 상승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공명첩 발행, 관직 매매, 족보 위조로

양반 숫자가 급격히 증가했기 때문이다.


대구 호구조사 자료에 따르면,

1690년대에 9.2%였던 양반 비율은

1786년에는 37.5%로,

1858년에는 70.3%까지 치솟았다.


불과 170년 사이에 양반이

열 배 가까이 늘었다는 것은,

혈통이 아니라 문서가

신분을 만들었다는 뜻이다.


이 70%가 전부

진짜 양반 혈통이 아니었다는 것은

역사학의 상식이다.


족보 위조가 성행하자

그 진위를 검증하려는 움직임도 같이 생겨났다.


조선 후기에는 다양한 가문의 족보에 관한 지식을

집대성한 만성보(萬姓譜)가 유행했다.

족보의 진위를 판별하고,

혼인 등을 위해 상대의 가계를

이해하는 데 활용됐다.


가짜가 많아지자 진짜를 가리는

시스템이 생겨난 것이다.


그 시스템이 2026년 박찬대 논란에서는

언론 취재와 선거 공방의 형태로 작동하고 있다.

다른 점은 딱 하나다.


조선시대에는 군역을 피하기 위해 족보를 샀고,

2026년에는 표를 얻기 위해 족보를 꺼냈다.


조선시대에는 족보를 사는 데 돈이 들었고,

지금은 공식 석상에서 "할아버지"라는 단어를

반복하는 데 비용이 들지 않는다.


수단과 목적만 바뀌었을 뿐,

족보가 신분과 권위의 언어로 기능한다는 본질은 변하지 않았다.


나의 경우: 죽산 안씨, 보성, 그리고 영웅들


이제 나 자신의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다.

22촌 논리를 그대로 나에게 적용해보겠다.


나는 죽산 안씨다.

시골집이 전라남도 보성에 있다.

2015년 통계청 인구주택총조사 기준으로

죽산 안씨는 77,026명이다.


2000년 조사에서는 56,051명이었으니

15년 사이에 거의 2만 명이 늘었다.


1994년 족보 편찬 당시 생존 후손이

41,708명으로 집계됐던 것과 비교하면

30여 년 만에 두 배 가까운 숫자로 늘어났다.


안씨 전체는 685,639명으로

전체 성씨 인구 17위다.


순흥 안씨가 안씨 전체의 72%인

약 47만 명을 차지하며,

죽산 안씨는 그 다음 규모의 본관이다.


죽산 안씨의 본거지는 전라남도 보성이다.

보성읍 우산리 택촌마을을 중심으로

조선 초 세조 시대에 죽산 안씨 6세 안민이

처가가 보성 선씨였기 때문에

이거해와 터를 잡았고,

입향조 이후 후손들이 동족마을을 이루며

500여 년을 살아왔다.


현재도 보성군의 안씨 중 다수는

이 계보를 잇는 후손들이다.

안방준은 해남의 윤선도와 비교될 정도로

보성을 대표하는 지방 사족이었다고 전해진다.


죽산 안씨에서는 역사적으로

굵직한 인물들이 여럿 나왔다.


문강공 안방준(1573~1654)은

전라남도 보성 출신으로 임진왜란 때 호남의병으로,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때 호남의병장으로 활동한 인물이다.


성리학자이자 의병장이었던 그는

광해군 시절 30여 차례 벼슬이 내려도 사양하고

보성으로 낙향해 후학 양성에 매진했다.


인조반정 이후에도 관직에 여러 번 제수됐지만 출사를 거부했고,

병자호란이 터지자 다시 의병을 이끌고

청나라 군사와 맞서 싸웠다.


사후 이조판서에 추증됐고

시호는 문강(文康)이다.


그의 가르침을 따라

후손 10대에 걸쳐 대대로

문집을 남겨 가통을 계승했고,

은봉종가의 고문서 150점은

현재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303호로 지정되어 있다.


안중묵은 정유재란 중 병법에 능해

충무공 이순신을 직접 도왔던 인물이다.


임진왜란 때 선무원종공신 2등에 녹훈된

안극지도 같은 가문이다.

보성 지역의 죽산 안씨는

임진왜란 이후 세 번의 전란에 걸쳐

끊임없이 의병을 배출했다.


그리고 안규홍이 있다.

죽산 안씨의 이야기를 하면서

안규홍을 빠뜨릴 수 없다.


1879년 전라남도 보성 출신으로,

너무 가난해 4살에 아버지를 여의고

먼 친척에게 맡겨져 어린 나이부터 머슴살이를 했다.

전남 지방 방언으로 머슴을 '담살이'라고 부른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안담살이'라고 불렀다.

1907년 한국군이 강제 해산되자

그는 나라를 위해 싸우기로 결심했다.


주변 양반 유생들에게 함께

거병하자고 요청했지만 양반들은 거절했다.

"머슴 출신과 함께 의병을 일으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는 이유였다.


그는 혼자 길을 택했다.

머슴살이 동지들을 규합하고,

주변 시장을 돌아다니며

농민들을 설득해 의병에 가담시켰다.


해산 군인들도 받아들였다.

1908년 4월 의병장으로 추대된 이후

일본군과 26차례 싸워 승리했다.


파청대첩, 진산대첩, 원봉대첩은

의병 사상 기념비적 승리로 기록된다.


일본인과 부패 관리,

악질 부호들에게서 거둔 돈은

농민들에게 나눠줬다.


일본군의 남한폭도 대토벌작전에

부대가 해산된 뒤 고향으로 돌아가다가 체포됐다.

1910년 대구감옥에서 교수형으로 순국했다.

향년 31세였다.


1963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됐다.

그의 거주지였던 보성 안규홍·박제현 가옥은

현재 국가등록문화재 제699호로 지정돼

보성에 남아 있다.


머슴과 그의 주인이 함께 서훈을 받은,

한국 역사에서 유일한 가옥이다.


전라남도 보성군은 임진왜란부터 한말 일제강점기까지

777명의 의병이 활동한 의병의 고장이다.

그 보성에 시골집을 두고,

그 보성을 본거지로 삼는 죽산 안씨인 나는,

박찬대 후보가 세운 논리의 기준을

그대로 적용하면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한다.


나는 임진왜란에서 이순신 장군을 도운 장수의 후손이다.

세 번의 전란에 거듭 의병을 일으킨

보성 선비 가문의 후손이다.

머슴으로 태어나 양반들이 외면한 자리에서

홀로 나라를 지키다 31세에 순국한

건국훈장 독립장 수훈자의 후손이다.


22촌이 할아버지라면,

그렇다.


다음 선거 출마를 검토해볼 만한 혈통이다.


물론,

그러지 않을 것이다.


가족의 언어는 어디서 끝나는가


박찬대 캠프의 해명에서

가장 인상적인 문장은 이것이었다.


"촌수보다 중요한 것은 실제로 얼마나 가깝게 지내왔느냐."


이 문장은 틀리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다른 이야기다.


우리 모두에게 각별한 어른이 있다.

혈연이 아니어도 명절에 챙기고,

안부를 묻고, 밥을 같이 먹는 사람.

오랫동안 가족처럼 지내온 이웃, 스승, 친구의 부모.

그런 관계는 분명히 존재하고,

그 존재를 부정할 이유가 없다.


그리고 그 관계는 혈연보다 더 깊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 각별함이 혈통을 대체하지는 않는다.


각별하게 지내는 사람을

"가족 같다"고 말할 수 있어도,

공식 석상에서 "나의 할아버지"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왜냐면 그것은 사실이 아니기 때문이다.


친밀도와 혈연은 다른 카테고리다.

하나가 다른 하나를 보완할 수는 있지만,

대체할 수는 없다.


박찬대 후보와 임청각 종가 사이의

친밀도가 아무리 깊었다 해도,

그것이 22촌이라는 계보상 거리를

2촌으로 바꾸지는 않는다.


거리가 멀어도 친하게 지낼 수 있다.

하지만 친하게 지냈다고 해서

거리가 가까워지지는 않는다.


2000년대 초반 싸이월드라는

소셜네트워크 서비스가 있었다.


거기서는 남남인 사람끼리

버튼 하나로 "1촌"을 맺을 수 있었다.

촌수 언어를 빌려 친밀도를 표현한 방식이었다.


누구도 그것을 진짜

혈연 관계로 착각하지 않았다.


인터넷에서 1촌을 맺은 사람을 두고

"나의 친척"이라고 소개한 사람은 없었다.

그것이 비유라는 사실을

모두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박찬대 논란은 그 반대다.

실제 혈연이 존재하긴 하지만

22촌이라는 거리를 가리고,

감정적 친밀도를 앞세워

마치 2촌처럼 보이게 했다.


싸이월드 1촌은 남남을 가족처럼 부른 비유였고,

이 논란은 먼 방계를 직계처럼 부른 과장이었다.


방향만 반대일 뿐,

실제 거리를 감추고

가깝게 보이려 했다는 본질은 같다.


문제는 이 두 가지를

의도적으로 혼용했다는 데 있다.


공식 석상에서,

선거 현장에서,

언론 보도에서

"외손"이라는 단어를

반복적으로 사용하면서

감정적 친밀도를 혈통적 정통성으로 치환했다.


논란이 터진 뒤에야

"촌수로 설명할 수 없는 관계"라는 해명이 나왔다.


그 해명이 사실이라 해도,

그 사실은 처음부터 전면에 있었어야 했다.

안동 유림 슬롯에서 방계라도

일가나 문중으로 취급한다는

박찬대의 설명도 맥락이 있다.


실제로 조선 유림 슬롯에서

문중의 결속은 현대인의 상식보다

훨씬 넓은 범위로 작동했다.


하지만 그 문중 논리는 안동이라는 특정 지역 공동체,

유림이라는 특정 계층적 결속 속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그 논리를 현대 선거판에 가져와

전국 유권자를 향해 "외손"이라고 말하는 것은 다른 행위다.

그것은 문화적 관습을

정치적 자본으로 환전하는 행위다.


그렇다면 남은 누구인가


질문 하나가 끝까지 따라온다.


22촌도 가족이라면,

이 나라에서 남은 언제부터인가.


김씨 1,069만 명,

이씨 731만 명,

박씨 419만 명.


이 세 성씨만 합쳐도

전체 인구의 44.6%다.


여기에 최씨 233만 명,

정씨 215만 명을 더하면

상위 5개 성씨가 이미

전체 인구의 절반을 넘어선다.


같은 본관 안에서 22촌은 너끈히 나온다.

본관이 달라도 성씨가 같으면

어딘가에서 연결고리를 찾을 수 있다는 논리는

이미 조선시대 족보 위조꾼들의 수법이었다.


역사는 이 문제를 이미 한 번 답했다.

조선 초기 양반이 전체 인구의 7%였다가

후기에 70%까지 늘어난 것은,

족보가 신분의 언어로

기능하기 시작했을 때 일어난 일이다.


경계를 허무는 순간 기준은 사라진다.

22촌이 가족이면 30촌은 왜 안 되는가.

50촌은?


한반도에서 수천 년을 살아온 사람들이

어딘가에서 공통 조상으로

연결되지 않을 가능성은 얼마나 되는가.


결국 이 논리의 종착점은 하나다.

대한민국 5,100만 명은 전부 한 집안이다.


그 집안에서 명절 차례상은 어디서 차려야 하는지,

제사는 누가 주관해야 하는지,

유산은 어떻게 분배해야 하는지 아무도 모른다.


혈통의 언어는 정확해야 한다.

그것이 부정확해지는 순간,

그 언어는 감동이 아니라 조작이 된다.


22촌과 2촌 사이의 거리는 숫자로는 20이지만,

의미로는 무한하다.


그 거리를 좁히는 것은 세월도,

친밀도도,

정치적 필요도 아니다.


오직 계보만이 그 거리를 정확하게 말할 수 있다.


나는 죽산 안씨다.

보성에 시골집이 있다.

22촌 논리라면 이순신을 도운 장수의 후손이고,

머슴으로 나라를 지킨 의병장의 후손이다.


그 사실은 흥미롭고,

자랑스럽고,

동시에 아무 의미가 없다.


왜냐면 나는 그분들을 직접 알지 못하고,

그분들도 나를 알지 못하며,

22촌의 거리는 어떤 감정으로도

줄어들지 않기 때문이다.


밀양 박씨 310만 명은 설날에 누구 집에 모여야 할까.

그 질문에 아무도 답하지 못하는 한,

22촌은 여전히 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