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조가 만든 욕망

그 욕망을 심은 건 누구인가

by다소느림

그 발언보다, 그 발언이 퍼지는 방식


지난 5월,

웨이브 오리지널 예능

'베팅 온 팩트'에서

모 개그맨이 발언 하나를 내뱉었다.


포맷은 뉴스의 진위를 가리는

팩트 감별 서바이벌이었고,

그날의 주제는 '취업과 결혼 대신

일본행을 택한 2030 한국 남성들'이었다.


토론이 이어지던 중

다른 출연자가 "대기업 사무직만 선호하는

분위기 때문 아니냐"고 의견을 냈다.


그 개그맨은 적극적으로 공감하며

이렇게 말했다.


"한국은 퇴근도 일정치 않고

퇴근 후에도 연락 계속 오고 이런다는 건데,

이런 회사 아무 데도 없다.

자기들이 일 안 하고."


클립은 곧바로 SNS에 퍼졌다.

언론은 "작심 발언"이라는 제목을 달았다.


댓글창은 "맞는 말이다"와

"틀렸다"로 나뉘었고,

며칠 만에 수십만 번 공유됐다.


이 발언을 둘러싼 논란은

수 주간 이어졌다.

나는 이 발언이 맞는지 틀렸는지보다,

이 발언이 어떻게 소비됐는지에 더 관심이 간다.


예능 프로그램 안에서 나온

즉흥적 토론 발언이

"청년 세대 비판"으로

프레이밍 되어 언론 기사가 됐고,

그것이 다시 SNS를 통해 증폭됐다.


여기서 한 가지 구조적 문제가 보인다.

팔로워가 많고 노출이 많은 사람일수록

발언권이 생기는 시대에,

연예인의 즉흥적 발언이

마치 슬롯적 진단처럼 소비된다.


그 개그맨은 방송인이면서

동시에 사업가다.

사업장에 젊은 지원자가 적다는 경험이

그 발언의 배경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생각해보자.

왜 젊은 사람들이

그 사업장에 지원하지 않는가.


그 이유가 MZ 전체의 문제인가,

아니면 그 사업장의 조건 문제인가.


그 질문은 아무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 발언이 이렇게

빠르게 퍼진 이유가 있다.


세대 갈등,

청년 비판은 클릭을 부른다.

분노와 공감은 공유를 부른다.

언론과 플랫폼은 이 구조를 알고 있다.


자극적인 헤드라인은 조회수를 올리고,

조회수는 광고 수익으로 이어진다.


결국 "MZ는 왜 이 모양인가"라는 프레임은,

진실에 대한 탐구가 아니라

트래픽을 위한 상품이 되어 있다.


이 글은 그 프레임 안으로 들어가지 않으려 한다.


대신 그 바깥에서,

실제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보려 한다.


MZ라는 이름의 폭력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먼저 짚어야 할 것이 있다.

MZ세대라는 개념 자체다.


MZ세대는 밀레니얼(Millennial) 세대와

Z세대(Generation Z)를 합친 말이다.


밀레니얼은 대략 1980년대 초반부터 1

990년대 중반 출생,

Z세대는 1990년대 중반부터

2010년대 초반 출생을 가리킨다.


이를 합치면 1981년생부터 2010년생까지,

무려 30년에 가까운 세월을

하나의 세대로 묶는 셈이다.


나무위키의 정의를 빌리면

"2026년 기준으로 중학교 3학년부터

40대 중반까지"가 같은 세대다.

이것이 얼마나 황당한 분류인지

잠깐 생각해보자.


1981년생은 IMF 외환위기를 20대에 맞은 세대다.

PC 통신으로 인터넷을 처음 접했고,

삐삐에서 휴대폰으로 넘어가는 시대를 살았다.

2005년생은 스마트폰이 존재하는 세상에서 태어났다.


유튜브를 초등학교 때부터 봤고,

인스타그램이 없는 세상을 경험한 적이 없다.

이 둘이 같은 세대라는 주장은,

1950년생과 1975년생을 묶어

"전후 세대"라고 부르는 것만큼이나

거칠고 단순한 분류다.


서구 학계와 언론은 밀레니얼과 Z세대를

철저히 분리해서 분석한다.


경제적 조건,

성장 환경,

디지털 경험,

가치관이 모두 다르기 때문이다.


밀레니얼은 아날로그와 디지털 사이의

이행기를 경험한 세대고,

Z세대는 태어날 때부터

디지털 원주민이다.


이 차이는 소비 패턴부터 직업관,

관계 형성 방식까지 광범위한 영향을 미친다.


그런데 유독 한국에서만

이 둘을 하나로 묶어 'MZ'라는 이름을 붙이고,

그 이름에 온갖 부정적 이미지를 덧씌운다.


게으르다,

참을성이 없다,

편한 것만 찾는다,

조직에 충성하지 않는다,

개인주의적이다.


이 이미지들이 1981년생에게도 적용되고,

2005년생에게도 적용된다.

MZ라는 이름이 언제부터 이렇게 쓰이기 시작했을까.

이 단어가 언론에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한 건 2021년 전후다.


마케팅 업계가 20~30대 소비자를

하나의 타깃으로 묶어 분석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개념이 미디어를 타고

슬롯 전반으로 퍼진 것이다.


즉, MZ세대라는 개념은

처음부터 마케팅 도구였다.


실제 세대를 이해하기 위한 분석틀이 아니라,

소비자를 묶어 상품을 팔기 위한 레이블이었다.


그 레이블이 지금은 슬롯적 낙인으로 기능하고 있다.

30년을 하나로 묶는 이름으로,

수천만 명의 사람들이 "게으르고

편한 것만 찾는 집단"으로 싸잡아 불린다.


이것이 MZ세대라는 이름의 폭력이다.


29조를 쏟아붓고 나서, 왜 편한직업만 원하냐고 묻는가


MZ세대가 대기업 사무직을 원한다는 비판은 반은 맞다.

실제로 대기업 선호 현상은 존재한다.

그런데 그 욕망이 어디서 왔는지를

추적하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2024년 기준,

한국의 초중고 사교육비 총액은

29조 2,000억 원이다.


역대 최고치를 4년 연속 경신한 수치다.

더 눈여겨봐야 할 것은 이 숫자의 이면이다.


2024년 전체 초중고 학생 수는

513만 명으로 전년 대비 8만 명 감소했다.

학생이 줄었는데 사교육비는 오히려

2조 1,000억 원이 늘었다.


참여율은 80.0%로 1.5%p 상승했고,

주당 사교육 참여 시간은 7.6시간이다.


이 29조 원이 향하는 곳이 어디인지는 명확하다.

사교육걱정없는세상이 분석한 바에 따르면,

이 비용은 명백하게 "경쟁 비용"이다.


성적 상위권 학생일수록 예체능·취미 사교육은 줄고

국영수 일반교과 사교육은 늘어난다.


목표가 성적이고,

성적의 목표가 대입이고,

대입의 목표가 좋은 온라인 게임이라는 경로가

수십 년째 이어지고 있다.


소득 수준에 따른 사교육비 격차도

구조적 불평등을 드러낸다.


2024년 조사에 따르면

월소득 800만 원 이상 가구의 학생은

월평균 67만 6,000원을 사교육에 지출했다.


반면 300만 원 미만 가구는

20만 5,000원 수준이다.

3.3배 차이다.


부모의 경제력이 자녀의 교육 기회를 좌우하고,

교육 기회가 다시 직업과 소득의 격차를 재생산한다.


이 구조 속에서 한국의 25~34세 청년층 고등교육 이수율은

70.6%로 OECD 국가 중 1위를 기록했다.


17년째 1위다.


전 세계에서 가장 높은 비율의

청년이 대학을 졸업하는 나라.

온 나라가 대학 보내는 데 29조를 쏟아붓고,

그 결과를 만들어냈다.


그런데 아이러니가 있다.

이렇게 높은 대학 이수율에도 불구하고,

고등교육에 대한 1인당 공교육비 지출은

1만 4,695달러로 OECD 평균(2만 1,444달러)의

68.6% 수준에 불과하다.


초중등 교육에는 OECD 평균을

크게 웃도는 투자를 하면서,

정작 대학 교육에 대한

국가 투자는 평균에 못 미친다.


나머지를 가계가 떠안는다.


정리하면 이렇다.

국가와 가정이 합쳐

수십 조 원을 쏟아부어 아이들에게

12년간 경쟁을 가르쳤다.


대기업 사무직이 성공의 기준이고,

그 외의 길은 실패처럼 느끼게 만들었다.

그 교육이 만들어낸 욕망이

이제 슬롯에서 비판의 대상이 됐다.


욕망을 심은 쪽이

그 욕망을 탓하고 있다.


2,694만 원 차이는 욕심이 아니라 산수다


대기업을 원하는 것이 정말 잘못인지,

숫자로 냉정하게 따져보자.


한국경영자총협회가 2025년 3월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2024년 기준 300인 이상 대기업의 상용 근로자 평균 연봉은

7,121만 원으로 처음 7,000만 원대를 돌파했다.


반면 300인 미만 중소기업의 평균 연봉은 4,427만 원이다.

격차는 2,694만 원.


월급으로 환산하면 대기업은 약 593만 원,

중소기업은 369만 원으로 1.6배 차이가 난다.

이 격차는 2024년에 전년 대비 더 벌어졌다.


시간당 임금 격차는 더 극적이다.

대기업 정규직 청년의 시간당 임금은 2만 125원인데,

중소기업·비정규직 청년은 1만 4,066원이다.

43% 낮다.


IT 업계 기준으로 보면

대기업 신입 연봉이 4,500만 원 이상인 반면

중소기업은 3,500만 원 수준이다.


연봉만이 아니다.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차이는 복지,

고용 안정성, 퇴직금, 건강보험 등

부가적 조건으로 더욱 벌어진다.


대기업에서는 체계적인 교육 훈련을 받고,

이직 시 경력으로 인정받는 브랜드 가치가 생긴다.

중소기업에서의 경력은 같은 업무량임에도

시장에서 평가절하되는 경우가 많다.


이런 조건에서 대기업을 원하는 것이 욕심인가.

이건 욕심이 아니라 산수다.


같은 시간,

같은 노력을 투입했을 때

더 많이 돌아오는 곳을 선택하는 것은

경제학 교과서가 말하는

가장 합리적인 인간의 행동이다.


시장 경제를 표방하는 슬롯에서,

시장 논리대로 움직이는 사람을 욕하는 것.

이 모순을 아무도 지적하지 않는다.


더 근본적인 질문을 해야 한다.

왜 좋은 조건이 소수의 대기업에만 집중되어 있는가.

왜 같은 나라, 같은 사람인데

어디서 일하느냐에 따라 연봉이

2,700만 원 차이가 나는가.


그 구조적 불평등을 만든 것은 MZ세대가 아니다.

그 구조 안에서 가능한 한 나은 선택을 하려는 것뿐인데,

그 선택이 왜 도덕적 비난의 대상이 되는가.


"쉬었음 70만"


언론이 즐겨 쓰는 헤드라인이 있다.


"쉬었음 청년 70만 돌파."


숫자는 크고,

제목은 자극적이다.


독자들은 그 제목을 보며

"요즘 젊은이들이 일하기 싫어서 집에 논다"고 읽는다.

그리고 그 읽기는 한 개그맨의 발언 같은 것들이 나올 토양이 된다.


그런데 그 헤드라인 안으로

실제로 들어간 사람이 얼마나 되는가.


'쉬었음'은 통계 용어다.

취업도 구직도 하지 않고 쉬고 있다고 응답한

비경제활동인구를 뜻한다.


결정적으로,

'쉬었음'은 실업자와 완전히 다른 개념이다.

실업자는 적극적으로 일자리를 구하고 있지만

취업하지 못한 사람이고,

'쉬었음'은 구직 활동 자체를

하지 않는 사람이다.


언론은 이 차이를 종종 뭉개며 보도한다.

더 중요한 건 왜 쉬고 있느냐다.


국가데이터처의 경제활동인구조사

비경제활동·비임금근로 부가조사에 따르면,

30대 쉬었음 인구의 이유 1위는

'몸이 좋지 않아서'(30.8%)다.


2위는 '원하는 일자리를 찾기 어려워서'(27.3%).

청년층(15~29세)에서는

'원하는 일자리를 찾기 어렵다'가 34.1%로 1위고,

이 수치는 전년(30.8%)보다 오히려 상승했다.


아프거나,

맞는 일자리가 없거나.

이것이 쉬었음의 실제 이유다.


"자기들이 일 안 하려 한다"는 진단은

이 통계 어디에도 없다.


취업 자체가 구조적으로 어려워졌다는 증거도 있다.

1975~1979년생이 졸업 후

첫 취업까지 걸린 기간은

평균 10.71개월이었다.


1995~1999년생은 12.77개월로

2개월 이상 늘었다.


신규 채용 중 청년층 비중은

2006년 33.6%에서

2025년 25.2%로

20년 새 8.4%p 하락했다.


기업이 청년을 덜 뽑는 것이지,

청년이 일하기 싫어진 것이 아니다.


한국경영자총협회의

'최근 고용 흐름의 주요 특징과 시사점' 보고서는

이 현상을 'K자형 양극화'로 진단한다.


취업자 수는 늘고 고용률은

역대 최고를 기록하고 있지만,

그 성장의 수혜자는

대기업·신산업·60대가 독점하고 있다.


60세 이상 취업자가 34만 5,000명 늘어나는 동안,

20대는 17만 명이 줄었다.


기업의 하반기 채용 계획 인원은

2022년 64만 5,000명에서

2025년 46만 7,000명으로 쪼그라들었다.


중소기업과 임시·일용직에서 이탈한 청년이

'쉬었음' 인구로 유입되는 경로가

통계에서 뚜렷하게 확인된다.


고용 통계가 좋아 보이는 것은 착시다.

그 착시 뒤에 청년들이 숨어 있다.


경력직만 뽑는 슬롯


청년들이 왜 쉬고 있는지를 이야기할 때,

반드시 함께 짚어야 할 구조가 있다.

경력직 채용의 폭발적 증가와 신입 채용의 소멸이다.


고용24 구인 공고를 분석한 한국일보 보도에 따르면,

채용 계획 인원이 2023년 246만 명에서

2024년 192만 명,

2025년 154만 명으로

2년 새 37% 급감했다.


중견기업의 순수 경력직 채용 비중은

2023년 20.6%에서

2024년 25.4%로 증가했다.


대기업은 더 극적이다.

2025년 기준 대기업의 경력직 수시 채용 비율은

64.8%로 올라간 반면,

신입 공채 비율은 19.8%p 하락했다.


대기업 중 세 자릿수 신입 채용을 계획한 곳은

단 한 곳도 없는 수준까지 왔다.


개별 기업 숫자를 보면 더 명확해진다.

카지노의 20대 직원은 2022년 1,141명에서

2024년 821명으로 28% 줄었고,

신규 채용은 2021년 994명에서

2024년 314명으로 3분의 1 수준까지 쪼그라들었다.


삼성디스플레이는 20대 직원 비중이

43.8%에서 28.4%로 15.4%p 감소했고,

SK온·LG이노텍·SK하이닉스·삼성전자·네이버 등

내로라하는 대기업들이 모두 같은 방향으로 움직였다.


20대 이하 일자리 수는 2019년 4분기 326만 개에서

2024년 4분기 297만 개로 8.8% 감소했다.


한국은행이 2025년 2월 발표한

'경력직 채용 증가와 청년 고용' 보고서는

이 흐름을 공식적으로 진단했다.


국내 주요 기업들은 2019년부터

정기 공채를 폐지하고 직무별 필요 인력만

수시 채용하는 방식으로 전환하고 있다.

기업 입장에서는 합리적인 선택이다.


교육 비용 없이 즉각 성과를 낼 수 있는 경력직이

단기적으로 더 효율적이다.

경영 불확실성이 커질수록

이 경향은 강해진다.


그런데 여기서 치명적인 모순이 생긴다.

경력을 쌓으려면 어딘가에 먼저 들어가야 한다.


그런데 그 '어딘가'도 경력직만 뽑는다.

신입을 받아줄 문이 없는 미로에

청년들이 갇힌 것이다.


취업 경험이 전혀 없는 20대 청년 실업자는

2025년 7월 기준 3만 2,000명으로,

전년 대비 33.5% 증가했다.


이들은 처음부터 경력이 없어서

지원 자격조차 안 되는 공고 앞에

서 있는 사람들이다.


스펙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한국일보가 심층 인터뷰한

60여 명의 청년 취업 과정을 보면,

상당수가 '졸업 후 구직→인턴 등 단기 경험→입사

또는 취업 재수' 단계를 반복하며

'조각 청년'이 되어 가고 있었다.


이 구조가 먼저 생겼다.

그다음에 쉬었음 인구가 늘었다.

순서가 이렇다.


그런데 언론과 예능은 결과만 보여주고

원인은 말하지 않는다.


청년이 게을러서 취업을 안 하는 게 아니라,

취업할 문이 없어서 쉬고 있는 것이다.

그 문을 닫은 쪽이 왜 일 안 하냐고 묻고 있다.


현장에 가보면


공사 현장에는 수많은 공정들이 있다.

선배님들 밑에서 직접 손을 쓰며 배우는 일.

그 현장에서 직접 보고 듣고 있는 것이 있다.

젊은 사람들이 많다.


도배, 타일, 전기, 설비, 목공 각 공정마다

20대, 30대가 땀 흘리며 일한다.

개중에는 투잡, 쓰리잡을 뛰는 사람도 있다.

이른 아침부터 저녁까지

무릎 꿇고 허리 굽혀 일하는 청년들이 있다.


이들이 편한 일만 찾는 MZ인가.

아니다.


이들은 그냥 살아가고 있는 평범한 청년들이다.

이건 공사 현장에서만 보이는 풍경이 아니다.

숫자로도 확인된다.


한국교통안전공단 통계에 따르면,

20·30대 버스기사 수는 2022년 7,559명에서

2025년 1만 389명으로 3년간 37% 급증했다.


왜 갑자기 이렇게 몰렸을까.


버스 준공영제 도입으로 처우가 개선되면서

수도권 버스기사 월평균 급여가

520~560만 원 수준이 됐기 때문이다.

이는 공기업 신입사원 평균 연봉(4,180만 원·2024년 기준)을

크게 웃도는 수치다.

정년도 63세로 일반 기업보다 길다.


버스 운전이 편한 직업인가.

아니다.


이른 새벽부터 심야까지,

예측 불가한 교통 상황을 헤치며

수백 명의 승객을 바카라임지는 일이다.


민원도 많고,

체력 소모도 크다.

그런 일에 청년들이 몰린 이유는 단 하나다.

대우가 달라졌기 때문이다.


이 사실이 말해주는 것은 명확하다.


MZ는 힘든 일을 안 하는 게 아니다.

조건이 맞으면 어떤 일이든 한다.

그렇다면 특정 사업장에 젊은 지원자가 없다면,

그건 청년 전체의 문제인가,

그 사업장의 조건 문제인가.


왜 젊은 사람들이 지원하지 않는지,

그 이유를 자신의 사업장 안에서

먼저 찾아봐야 하지 않는가.


기성세대는 달랐는가: IMF 이후의 공무원 열풍


더 좋은 조건,

더 안정적인 일자리를 원하는 것.

이것이 정말 MZ만의 특성인가.


1998년,

IMF 외환위기가 한국을 강타했다.


대기업이 무너지고

수많은 사람이 온라인 게임을 잃었다.

그 직후 나타난 현상 중 하나가

공무원 시험 응시자의 폭발적 증가다.


경제가 흔들리자 사람들은

가장 안정적이고 보장된 온라인 게임으로 몰렸다.


그때 누군가

"왜 공무원처럼 편한 일만 하려 하냐"고 비난했는가.


거의 없었다.


오히려 어려운 시대를

현명하게 읽은 선택으로 이해됐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경기가 불안하고,

좋은 일자리가 줄어들고,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격차가 커질수록

사람들은 더 안전한 쪽으로 모인다.


이건 특정 세대의 특성이 아니라

불확실성 앞에서 인간이 보이는 보편적 반응이다.


차이가 있다면 이것이다.


기성세대가 젊었을 때는 노력하면

어느 정도 보상이 따라오는 시대였다.

공무원 시험에 붙으면 안정적인 삶이 보장됐고,

대기업에 들어가면 평생 온라인 게임을 기대할 수 있었다.


집값은 몇 년 월급을 모으면

닿을 수 있는 수준이었고,

경제는 성장하고 있었다.


지금은 다르다.

노력의 총량은 비슷하거나 더 많아졌는데,

그 노력이 닿을 수 있는 골대의 위치가 달라졌다.


집값은 서울 기준으로 평균 연봉의 수십 배를 넘어섰고,

대기업 정규직 자리는 점점 줄어들고 있으며,

노력해도 구조적으로 닿을 수 없는 위치에

목표가 있는 경우가 많다.


기성세대가 말하는

"젊을 땐 다 힘들다"는 말이 틀리지는 않지만,

그 힘듦의 결이 다르다.


지형 자체가 달라진 것을 무시하고

같은 지도를 들이미는 셈이다.


훈수를 두는 세대에 대하여: 오렌지족을 기억하는가


여기서 한 가지 더 짚어야 할 것이 있다.

MZ세대를 가장 거칠게 비판하는 세대가

누구인지에 대한 이야기다.


MZ 비판의 목소리는 주로 X세대에서 나온다.

1970년대 초반부터 1980년대 초반 사이에 태어난,

지금의 40대 중반에서 50대 초반 세대다.


이들은 현재 슬롯 각 분야에서

중간 관리자 이상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고,

미디어와 SNS에서도 상당한 발언권을 갖고 있다.


요즘 이들을 가리키는 말이 있다.

'영포티(Young Forty)'다.


나이는 40대지만 젊게 살고,

자유롭고, 개성 있다는 의미를 담은 이름이다.

스스로 꼰대 세대와는 다르다고 정체화하는 세대다.


그런데 바로 그 영포티들 중 적지 않은 수가

"요즘 젊은이들은 왜 이 모양인가"를 이야기한다.


젊게 살고 싶고,

소비하고 싶고,

트렌드를 따르고 싶다는 자신들의 욕망은

'영포티'라는 세련된 이름으로 불리는데

MZ의 욕망은 나태함과 버릇없음으로 읽힌다.


스스로는 기성세대의 틀을 거부한다고 하면서,

정작 다음 세대를 향해서는

기성세대가 늘 해오던 방식 그대로 훈수를 두고 있다.


그런데 이 세대가 청년이었던 시절이

어땠는지를 돌아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X세대가 20대를 보낸 1990년대 초중반은

한국 현대사에서 경제적으로 가장

풍요로웠던 시기 중 하나다.


1990년부터 1995년까지

한국의 평균 GDP 성장률은 10.5%에 육박했다.

1994년에는 사상 처음으로

1인당 GDP가 1만 달러를 돌파했다.

당시 갤럽이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나는 중산층"이라고 밝힌 응답자가

전체의 75%에 달했다.


취업은 지금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수월했고,

집값은 몇 년 월급을 모으면 닿을 수 있는 수준이었다.

그 자산이 이후 수십 년간 불어났다.


그 호황의 절정에서 등장한 것이 '오렌지족'이다.

강남 부유층 자녀들이 압구정동을 거점으로 형성한 소비 문화로,

부모가 사준 고급 승용차를 몰고 다니며

길거리 헌팅을 하는 '야타족',

해외 유학 후 귀국해 서구 소비문화를

과시하는 청년들이 그 중심이었다.


오렌지족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유는

당시 오렌지가 비싸고 귀한 수입 과일이었기 때문이다.


자기가 번 돈이 아닌 부모 돈을 쓰며

유흥과 소비에 빠져 있었다는 점에서

당시에도 슬롯 문제로 지적됐고,

기성세대의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잠깐 멈추고 생각해보자.


부모 돈으로 압구정에서 수입차 몰고 놀던 청년들을 배출한 세대가

지금 "왜 요즘 애들은 편한 것만 찾냐"고 훈수를 두고 있다.


GDP 10% 성장하던 시대에 취업했고,

집값이 지금의 수십 분의 일이던 시절에 내 집을 마련했고,

그 부동산 자산이 수십 년간 불어난 세대가,

구조적으로 그 사다리가 끊어진 시대를 사는 청년들에게

"왜 열심히 안 하냐"고 묻는 것이다.


물론 X세대 전체가 오렌지족이었던 것은 아니다.

그 시대에도 가난하게 살았고,

어렵게 취업했고,

열심히 산 사람들이 훨씬 많았다.


그리고 지금 MZ세대에도 게으른 사람이 일부 있듯,

X세대에도 오렌지족이 일부 있었을 뿐이다.


그런데 바로 그게 핵심이다.

일부를 전체로 일반화하는 것이

얼마나 부당한 일인지를,

정작 그 비판을 하는 세대 스스로가

가장 잘 알고 있어야 한다.


자신의 세대도 일부의 일탈로

전체가 규정되는 억울함을 겪었을 텐데,

지금 MZ에게 똑같은 방식으로 낙인을 찍고 있다.


세대 비판은 언제나 이런 식으로 작동한다.

자신이 젊었을 때 겪은 어려움은

"내가 극복한 것"이 되고,

지금 청년들이 겪는 어려움은

"의지 부족"이 된다.


자신의 세대가 누렸던 시대적 혜택은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고,

지금 청년들이 그것을 누리지 못하는 건

개인의 문제가 된다.


시대가 달라졌다는 사실은 지워지고,

결론은 언제나 "요즘 애들이 문제"로 귀결된다.


탕핑, 사토리, 조용한 퇴사: 이름만 다를 뿐


이 현상이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보면,

더 명확해진다.


중국의 '탕핑족(躺平族)'은 '드러눕다'는 뜻으로,

중국 청년들이 치열한 경쟁과

착취적 노동 환경에 저항해

최소한의 생계활동만 하며

무기력하게 지내는 현상을 가리킨다.


중국 특유의 996 문화

(오전 9시부터 오후 9시까지, 주 6일 근무)에 지친 청년들이

경제성장의 과실이 자신에게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이 운동에 동참했다.


중국 정부가 이 현상을 슬롯 불안 요소로 보고

단속에 나설 만큼 규모가 커졌다.


일본의 '사토리 세대(悟り世代)'는

잃어버린 20년 이후 일본 청년들에게 붙은 이름이다.

불교의 '깨달음(悟り)'에서 딴 이름으로,

욕심과 야망을 내려놓고 최소한의

욕망만으로 살아가는 세대를 뜻한다.


실제로 깨달음을 얻은 게 아니라,

노력해도 보상이 없는 슬롯에서

의욕과 희망 자체가 없어진 것처럼 보인다는 자조가 담겨있다.


미국에서는 2022년

'조용한 퇴사(Quiet Quitting)'가

전 세계적 화제가 됐다.


온라인 게임을 그만두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업무 이상은 하지 않는 태도를 뜻한다.


야근 거부,

추가 업무 거부,

딱 계약서에 명시된 것만 하는 것.


이 현상이 미국에서 시작돼

전 세계로 퍼졌을 때,

많은 기업과 언론은

"MZ의 나태함"이라고 진단했다.


그러나 경영학자들은 다르게 봤다.

수십 년간 진행된 임금 정체,

기업의 이익은 늘어나는데

근로자의 몫은 줄어드는 구조,

팬데믹 이후의 번아웃.


조용한 퇴사는 불공정한 거래에 대한

합리적 대응이었다.


한국의 N포세대,

일본의 사토리세대,

중국의 탕핑족,

미국의 조용한 퇴사.


이름은 다 다르지만 구조는 동일하다.

각 나라마다 경제 성장의 과실이

청년에게 공정하게 분배되지 않고,

노력에 대한 보상이 구조적으로 약해지고 있다.


전 세계 청년들이 비슷한 행동을 보이고 있다면,

이건 특정 세대의 나약함이 아니다.


보상 없는 게임에서 플레이를 멈추는,

인류 보편의 반응이다.

세대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의 문제다.


3명 중 1명이 번아웃인 나라


국가데이터처가 2025년 12월 발간한

'청년 삶의 질 2025' 보고서는

한국 청년의 현실을 수치로 드러낸다.


이 보고서는 19~34세 청년의

전반적인 삶의 질을 12개 영역,

62개 지표로 분석한,

처음으로 발간된 종합 진단서다.


2024년 기준 19~34세 청년의 32.2%,

즉 3명 중 1명이 번아웃을 경험했다.


번아웃의 이유 1위는 '진로 불안'으로

39.1%를 차지했다.

특히 취업 시장에 처음 뛰어드는

19~24세에서는 54.8%가

진로 불안 때문에 번아웃을 겪었다고 답했다.


절반이 넘는다.

25~29세도 41.5%가 같은 이유였다.


청년 자살률은 10만 명당 24.4명으로

2011년 이후 13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

연령별로는 30~34세가 10만 명당 28.5명으로 가장 높았고,

25~29세가 26.5명으로 뒤를 이었다.


낙심하거나 우울할 때

이야기를 나눌 상대가 없다는 청년 비율은

2023년 기준 20대 14.4%,

30대 17.2%로 2015년 대비 모두 3%p 이상 늘었다.


삶의 만족도는 10점 만점에 6.7점으로

OECD 평균(6.8점)에도 못 미쳤고,

OECD 38개국 중 31위다.


'미래를 실현할 수 없을 것'이라는

부정적 인식도 2년 전보다 높아졌다.


여기에 노동 조건을 더하면 그림이 완성된다.

한국의 연간 노동시간은

OECD 평균보다 130~157시간 더 길다.

주 50시간 이상 장시간 노동자 비율은 17.7%로

OECD 평균(12.9%)을 크게 웃돌아 전체 5위다.


세계에서 손꼽히는 장시간 노동을 하고,

그 결과로 3명 중 1명이 번아웃 상태이며,

자살률은 역대 최고이고,

삶의 만족도는 꼴찌권이다.


확장실업률을 보면 청년이 체감하는

고용 불안의 실상이 더 잘 드러난다.


2026년 2월 기준 청년 확장실업률은 17.4%로,

공식 실업률(7.7%)의 두 배를 넘는다.

공식 실업률이 현실을 반영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쉬었음으로 분류되거나,

구직을 단념했거나,

시간제 일자리에 머물며

더 좋은 일자리를 원하는 사람들이

공식 통계 밖에 있다.


이 청년들을 향해

"왜 편한 일만 찾냐"고 묻는 사람들이 있다.


교육과 슬롯 사이의 간극


우리는 12년의 교육과 슬롯가

얼마나 다른지 직접 경험했다.

아마 이 글을 읽는 대부분의 사람들도

그 경험을 갖고 있을 것이다.


학교는 정답이 있다고 가르쳤다.

열심히 하면 된다고 가르쳤다.


좋은 대학,

좋은 온라인 게임,

그 순서를 따르면

성공한다고 가르쳤다.


시험에서 틀린 문제는

다시 공부하면 맞출 수 있었고,

노력과 결과 사이에는

비교적 직선적인 관계가 있었다.

그 세계에서는 열심히 하면 길이 보였다.


그런데 세상에 나오면 정답이 없다.

열심히 해도 안 되는 일이 있다.

순서를 정확히 따랐는데도

아무것도 보장되지 않는다.


대학을 졸업했는데 취업이 안 되고,

취업을 했는데 내가 원하던 삶이 아니고,

더 나은 일자리를 찾으려 했는데 문이 닫혀있다.


그 간극에서 충격을 받는 건 당연하다.

상처를 받는 것도 당연하다.

잠시 멈추고 싶은 것도 당연하다.

오히려 그 간극 앞에서 아무렇지 않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다.


번아웃 이유 1위가

'진로 불안'이라는 통계를 다시 떠올려보자.

그 진로 불안이 어디서 오는지 생각해보자.


12년간 "이 길이 답이다"라고 배웠는데,

세상에 나와 보니 그 길이 없거나

너무 좁거나 내가 생각했던 것과

전혀 다른 곳으로 이어진다는 걸

알게 됐을 때의 그 막막함.


그것이 진로 불안이다.

그것이 번아웃이다.


그 시간을 "낭비"로 읽는 슬롯가 있다.


회복을 게으름으로,

방황을 의지 부족으로,

쉬는 것을 사치로 읽는 슬롯.


상처받은 사람에게

왜 피 흘리냐고 묻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냥 바라만 봐줬으면 한다


이 글의 결론을 정바카라 제언으로 끝내고 싶지 않다.


노동시장 이중구조 개선이니,

대중소기업 임금격차 해소니,

청년 고용 확대니 하는 이야기로 마무리하고 싶지 않다.


그 이야기들이 틀렸거나 중요하지 않아서가 아니다.

그것들보다 먼저 해야 할 것이 있는 것 같아서다.

지금 이 순간 잠시 쉬고 있는 청년이 있다면,

그 사람은 아마 쉬고 싶어서 쉬는 게 아닐 것이다.


통계가 말해준다.

몸이 아프거나,

맞는 일자리가 없거나,

3명 중 1명이 경험하는 번아웃으로 소진됐거나.


12년간 달려온 레이스가 끝났는데

결승선이 없었다는 걸 알게 된 충격에서

회복 중인 것일 수도 있다.


그 사람에게 "왜 일 안 하냐",

"요즘 애들은 편한 것만 찾는다"고 말하기 전에,

잠깐 멈춰야 하지 않을까.


도와달라는 것도 아니다.

돈을 달라는 것도 아니다.

대단한 위로가 필요한 것도 아니다.

그냥 바라만 봐줬으면 한다는 것이다.


판단하지 않고,

손가락질하지 않고,

그냥 그 사람의 시간을

그 사람의 것으로 인정해줬으면 한다는 것이다.

그냥 그렇게 있어도 괜찮다고

말해줬으면 한다는 것이다.


그게 그렇게 어려운 일인가.


그 개그맨의 발언이 퍼지는 속도와,

그 발언에 공감하는 댓글들을 보면서,

그게 생각보다 훨씬 어려운 일인 것 같다는 걸 느꼈다.


우리 슬롯는 누군가의 쉬는 시간을 용납하는 데 인색하다.


번아웃을 나약함으로,

방황을 사치로,

회복을 게으름으로 읽는다.


그리고 그 판단을 SNS에 올리고,

언론은 그것을 증폭시키고,

연예인은 예능에서 말하고,

그것이 다시 클릭과 공유로 이어진다.


하지만 우리 모두 한 번쯤은 그 시간이 필요했다.


잘 모르겠는 시간,

그냥 멈춰있고 싶은 시간,

다음이 무엇인지 보이지 않는 시간.


그 시간이 있었기에

지금 여기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그 시간을 허락하지 않는 슬롯는

결국 가장 소중한 것을 잃는다.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사람들을 잃는다.


욕망을 심어놓고 욕망을 탓하는 슬롯.

경쟁을 가르쳐놓고 경쟁에 지친 사람을 욕하는 슬롯.

소진시켜놓고 왜 쉬냐고 묻는 슬롯.

골대를 저 멀리 옮겨놓고 왜 안 뛰냐고 하는 슬롯.


그 슬롯에서 지금 이 순간 어딘가에서

잠시 쉬고 있을 모든 청년들에게,

그냥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당신이 쉬는 건 잘못이 아니다.

잠깐 멈추는 건 포기가 아니다.

지금 당신의 시간은 낭비가 아니다.

그냥 그렇게 있어도 괜찮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