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약 이행률 87%

민주주의의 이행률은 1.7%

by다소느림

1995년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의 투표율은 68.4%였다.

그로부터 31년이 지난 2026년,

제9회 지방선거를 앞두고

전문가들이 내놓는 전망은

"40%대 투표율"이다.


유권자 절반 이상이 투표장에 가지 않는 선거.

그런데 이 숫자보다 더 불편한 건,

투표한 사람들 사이에서도

점점 커지는 질문이다.


"도대체 우리가 뭘 바꾼 건가?"


4년마다 한 번씩 지방선거를 치르고,

그 사이사이 재보궐선거가 반복되는 나라.


투표용지를 최대 7장씩 받아 들고

기표소에 들어서는 나라.


이번 선거에서만 전국 4,227명의

지방 공직자를 선출한다.


그런데도 내 동네의 도로는 그대로고,

골목 상권은 그대로고,

복지관 예산은 그대로다.


세상이 좋아졌다는 느낌이 없다는 것,

이건 개인의 감상이 아니라 구조의 실패다.

그 구조를 숫자로 해부한다.


68.4%에서 40%대로: 우리는 조용히 포기했다


지방선거 투표율의 궤적은

한국 민주주의의 피로도를 그대로 반영한다.


1995년 1회 지방선거 투표율은 68.4%로 시작했다.

분단 이후 수십 년간의 군부 통치와

권위주의를 끝내고 비로소

내 손으로 단체장을 뽑게 됐다는

역사적 감격이 그 숫자에 담겨 있었다.


그러나 감격은 오래가지 않았다.

불과 3년 후 2회(1998년)에는

52.6%로 떨어졌다.


IMF 외환위기로 온 나라가 혼란스럽던 그해,

지방선거 투표율은 같은 해

대선 투표율의 3분의 2 수준에 그쳤다.

특히 대도시 광역시들은 대부분

40%대를 기록하며 처음으로

지방선거에 대한 무관심을 드러냈다.


이후의 흐름은 더 가파르다.

3회(2002년) 48.9%,

4회(2006년) 51.6%를 거쳐

7회(2018년) 60.2%까지 반등하다가

8회(2022년)에 다시 50.9%로 추락했다.


그리고 이번 9회 선거를 앞두고

일부 전문가와 언론에서는

40%대 진입 가능성을 우려하고 있다.


30년을 돌아보면,

첫 선거의 감격에서

절반 가까이 이탈한 셈이다.


이 하락의 원인은 단순하지 않다.


학계는

"이념 성향이 약한 중도 유권자의 증가,

정치 불신 증대,

정당 일체감 약화,

투표 효능감 약화,

후보 간 차별성 부재"를

핵심 요인으로 꼽는다.


쉽게 풀면 이렇다.

누구를 뽑아도 비슷할 것 같고,

투표해봤자 달라지는 게 없을 것 같고,

정치 자체가 믿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한국갤럽의 최근 조사에서

"투표를 통해 우리나라 정치를 바꿀 수 있다"는 질문에

74%가 동의했다.


바꿀 수 있다고 생각은 하면서도

투표장에 가지 않는 사람들.

믿지만 행동하지 않는 사람들.


이 괴리가 한국 지방선거의

가장 정직한 자화상이다.

투표율의 또 다른 단면이 있다.

연령별 편차다.


8회 지방선거 기준으로

60~70대의 투표율은

70%대를 기록한 반면,

40대와의 격차는 무려

25%포인트 이상이었다.


이 숫자가 의미하는 것은

단순히 젊은 세대의 무관심이 아니다.

투표 참여율이 높은 고령층의 정치적 선호가

실제 선거 결과에 더 강하게 반영된다는 구조적 사실이다.


결국 공약이 누구를 향하는지가

이 숫자에서도 결정된다.


싸우지 않고 이긴 504명의 전쟁


선거의 기본 전제는 경쟁이다.

둘 이상의 후보가 유권자의 선택을 받기 위해 경쟁하고,

유권자는 그 경쟁을 지켜보며 판단한다.

경쟁 없는 선거는 선택 없는 민주주의다.


그리고 지금 한국의 지방선거에서

그 기본 전제가 무너지고 있다.


이번 9회 지방선거에서 투표 없이

당선이 확정된 무투표 당선자는 504명이다.

전체 당선인 4,227명의 약 12%다.


기초단체장 3명,

지역구 광역의원 108명,

지역구 기초의원 305명,

비례대표 기초의원 88명이다.


8회 지방선거(490명, 11.95%)에 이어

두 번 연속 역대 최고 수준이다.


비교가 필요하다.

지방선거에 비례대표제가 도입되기 전까지

무투표 당선자 비율은 5% 미만이었다.


그것이 최근 두 번의 선거에서

연속으로 12%를 기록하고 있다.

두 배 이상 증가한 것이다.


민주화 이후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투표 당선자는 단 한 번,

2016년 20대 총선 통영시고성군에서

1명이 나왔을 뿐이다.


지방선거에서 이렇게 광범위하게

경쟁이 실종되는 것은

다른 나라에서 좀처럼 보기 어려운 현상이다.


더 주목할 점은 이 현상이

더 이상 영·호남만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번 선거에서 서울·수도권 무투표 당선인은 223명으로,

기존 최다 기록이었던 1998년 2회 지방선거(105명)의

두 배를 훌쩍 넘겼다.


제5회 지방선거(2010년)에서

서울·수도권 무투표 당선인이

단 3명이었던 것과 비교하면

약 74배 증가한 수치다.


지역주의의 산물이라 여겼던 현상이

이제는 대한민국 정치 전반의 문제가 됐다.


무투표 당선이 선거에 미치는 영향은 숫자 이상이다.

무투표 선거구에서는 선거운동이 불가하고

선거 공보물도 발송되지 않는다.


유권자가 후보자 정보나 공약을 확인하려면

선관위 홈페이지를 직접 찾아가야 한다.

이름도, 얼굴도, 공약도 모르는 사람이

내 동네 의원이 된다.


경쟁이 없으니 공약을 만들 이유도 없고,

공약이 없으니 임기 중 바카라임을 물을 근거도 없다.


광주·전남의 경우가 특히 심각하다.

이번 지방선거에서 광주·전남 무투표 당선자 80명 중

79명(98.8%)이 민주당 소속이었다.

4년 전 63명에서 17명이 더 늘었다.


기초자치단체장 중에는

광주 서구청장과 남구청장이

단독 등록으로 무투표 당선됐다.


광역의원 선거에서도 34개 선거구에서

경쟁 없이 당선자가 결정됐다.


한 지역 공무원의 말이 이 현실을 압축한다.

"민주당 공천장만 쥐면 끝나는 동네에서

당원들끼리만 투표해서 후보를 정해버리면,

사실상 우리 투표권은 휴지 조각이 된 셈입니다."


이 문제는 대구·경북도 마찬가지다.

방향만 반대일 뿐 구조는 동일하다.


어떤 지역에서든,

한 정당이 압도적으로 지배하는 선거구에서는

경쟁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


경쟁이 없으면 투표율이 떨어지고,

투표율이 떨어지면 경쟁은 더 불가능해진다.

이 순환이 4년마다 반복된다.


진짜 선거는 투표일 전에 끝난다


안전 지역구에서 선거의 본질적 경쟁은

공천 과정에서 이미 결판이 난다.

본선 득표율이 아니라

공천심사 결과가 사실상의 당선증이다.


영·호남 독점 구도를 수치로 보면 구체적이다.

2022년 대선에서 이재명 후보는

광주에서 84.82%를 득표했다.

5개 자치구 모두에서 80% 이상이었다.


역설적이게도 같은 선거에서

보수 진영 후보가 광주에서

처음으로 10%를 넘겼다는 것(12.72%)이 '뉴스'였다.

반대로 대구에서 국민의힘 후보는 71.41%,

경북에서 67.68%를 득표했다.


이 극단적 편중이 공천의 성격을 바꾼다.

광주에서 민주당 공천을 받으면

사실상 당선이 확정된다.


그렇다면 후보자의 진짜 경쟁은 어디서 벌어지는가.


유권자를 향한 공개 경쟁이 아니라,

당 내부의 공천 심사 과정이다.

공천권을 쥔 당 지도부와

당원이 실질적인 유권자가 된다.


이번 지방선거를 앞두고 국민의힘은

경선에서 당원투표 70%,

국민 여론조사 30%의 비율을 적용했다.

민주당도 1인 1표제를 밀어붙이며

당심 중심으로 경선을 진행했다.


당심을 업고 당선된 지도부가

지지 기반을 공고히 하기 위한 전략으로 풀이된다.


이를 바라보는 당 내부에서도 비판이 나왔다.

국민의힘 한 중진 의원은

"선거에서는 중도층 표심을 얻는 게 중요한데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모습"이라고 직격했다.


공천이 당선을 결정하는 구조에서

후보자의 합리적 선택은 자명하다.


시민에게 잘 보이는 것보다

당 지도부에게 잘 보이는 것이 우선이다.

당선 이후에도 마찬가지다.

재공천을 받으려면 시민보다

당의 시선을 의식해야 한다.


공약이 시민의 필요가 아니라

당의 논리에서 나오는 이유가 여기 있다.

이 구조의 끝에서 나타나는 현상이

조국혁신당의 사례다.


2024년 총선에서 비례대표 득표율 24.45%로

12석을 확보하며 존재감을 드러낸 정당이,

이번 지방선거에서 전남광주통합특별시장 후보조차 내지 못했다.


조국 대표 본인이 작년 12월 직접

"전남지사 후보는 솔직히 아직 찾지 못했다"고 했다.

국회에서의 존재감과 지역의 인적 기반은

완전히 다른 문제다.


안전 지역구에서 오랫동안

다른 정당이 설 자리가 없었기 때문에

인재 풀 자체가 형성되지 않는다.


독점이 독점을 재생산하는 구조다.


완수율 87%, 그런데 왜 그대로?


선거가 끝나면 이행률 평가가 시작된다.

한국매니페스토실천본부는 매년

전국 지자체장의 공약 이행률을 평가해

SA부터 F등급까지 6개 등급으로 분류한다.


2026년 평가에서 전국 기초자치단체

평균 공약이행 완료율은 70.42%였다.


광주 남구는 86%(8년 연속 최우수 등급),

광주 서구는 87.8%(4년 연속 최우수 등급)로

모두 전국 평균을 크게 웃돌았다.


서울 강동구는 91.7%를 달성하며

2년 연속 최우수를 받았다.


이 숫자들은 인상적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 숫자에 담기지 않은 진실이 있다.

공약 이행률이라는 지표는

"약속을 지켰냐"만 측정한다.

"그 약속이 필요한 약속이었냐"는 측정하지 않는다.


필요 없는 공약 100개를 완벽하게 이행해도

이행률은 100%다.


꼭 필요한 공약 하나를 지키지 못하면

이행률은 0%다.


이 지표는 공약의 질이 아니라

공약의 완결률을 측정한다.

더 심각한 문제는 이 지표가

역방향으로 작동할 수 있다는 점이다.


후보자 입장에서 이행률을 높이는 가장 합리적인 전략은 무엇인가.


달성하기 어려운 공약보다

달성하기 쉬운 공약을 많이 넣는 것이다.


예산이 수백억 드는 인프라 공약보다

선포식 한 번으로 끝나는 공약,

10년짜리 구조 개혁보다

현수막 하나면 완성되는 사업.


이행률 90%를 달성한 지자체장이

이행률 60%의 지자체장보다

더 유능하다는 보장이 없다.


오히려 전자가 더 쉬운 공약을

더 많이 넣었을 가능성이 있다.


공약추적기(poligraph.kr)의 집계가

이 현실의 다른 면을 보여준다.


국회의원과 지자체장 통합 기준으로

전체 공약 11,014건 중 완료된 공약은 183건,

이행률은 1.7%에 그친다.

착수율(완료+진행 중)은 26.5%다.

준비 중인 공약이 8,038건으로

전체의 73%에 달한다.


지역별로는 전남이 60.2%로 가장 높고,

대전이 29.5%로 가장 낮다.


임기가 아직 남아있다는 점을 감안해도,

공약 대부분이 완결되지 않는 구조적 현실은 분명하다.

그리고 이 현실 앞에서 "이행률 87%"라는 숫자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87%의 공약이 완성됐는데

당신의 지역은 왜 그대로인가.

그 87% 안에 정작 필요한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공약의 내용 문제도 있다.

한 조국혁신당 당원이

이번 선거를 앞두고 쓴 글이 이를 정확히 짚었다.


"민주당이나 조국혁신당의 공약들은

상대적으로 거시적이고 원칙적인 이야기들이 많았다.

검찰개혁도 중요하고 민주주의도 중요하지만,

지방선거에서 주민들이 가장 먼저 체감하는 것은

내 삶 가까이에 있는 문제들이다."


공약이 유권자의 삶이 아니라

정당의 기조에서 나올 때 생기는 간극을,

그 정당의 지지자 본인이 지적한 것이다.


5명이 95명을 대표하는 나라의 민심


선거철이면 여론조사가 넘쳐난다.

하루에도 여러 기관이 지지율 조사를 발표한다.


언론은 이 숫자들을 받아

"민심은 이렇다"고 보도한다.

그런데 이 숫자들이 실제 민심을 얼마나 반영하는지,

우리는 얼마나 알고 있는가.


한국갤럽의 공식 입장은 명확하다.

ARS 여론조사는 받자마자

전화를 끊는 사람이 100명 중 95명이다.

응답률 5% 이내.


그런데도 조사 결과는 "표본 수 1,000명,

95% 신뢰수준,

표본오차 ±3%포인트"라고 발표된다.

5명이 95명을 대표하는 셈이다.


한국갤럽이 직접

"심하게 찌그러진 표본으로 구성된 조사의

표본오차를 이렇게만 표시하는 것은 난센스"라고 비판한 바 있다.

이 5%가 누구냐가 문제다.


ARS 조사에 응하는 사람들은

정치에 유독 관심이 많거나,

특정 정당을 열성적으로

지지하는 사람들일 가능성이 높다.


ARS 조사에서 보수와 진보 양극단의 특성은

강하게 나타나는 반면,

중도의 존재감은 상대적으로 미약하다.


전화를 끊어버리는 사람들이 대표하는 여론,

즉 중도층과 무관심층의 목소리는

여론조사에서 체계적으로 배제된다.

결과적으로 실제 민심과의 괴리가 발생한다.


비슷한 시기에 같은 정당 지지도를 조사했는데,

ARS 결과는 51.1%였고

전화면접 결과는 34%가 나온 사례가 있다.

한 정당 지지도 간극이 무려 17%포인트에 달한다.


어떤 것이 진짜 민심인가.

전화면접 방식의 응답률이 10%대라는 점을 감안하면,

어떤 방식도 온전한 민심의 거울이 되기 어렵다.


방법론의 문제만이 아니다.

현재 88개 여론조사 업체 중에는

분석 전문 인력이 1명밖에 없는 곳도 다수 존재하며,

응답률이 5% 미만인데도 결과를 공개하는 관행이 여전하다.


국내 언론에 보도되는 여론조사의 약 80%가 ARS 조사다.

ARS 조사 방식이 이처럼 광범위하게 활용되는 나라는

한국이 거의 유일하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여기에 또 다른 층위의 문제가 있다.

여론조사에서 사람들은 실제와 다르게 답하는 경향이 있다.


"투표할 의향이 있다"는 응답이 80%를 넘어도

실제 투표율은 60% 남짓 나온다.

승리한 후보를 찍었다고 사후에 응답하는 경향도

반복적으로 관측된다.


박근혜 정부 시절에도 전화 여론조사에서

2012년 대선 때 박근혜 후보에게 투표했다고 응답하는 비율이

실제 득표율보다 반드시 높게 잡혔다.


이런 편향은 진보 정부 시기에도,

보수 정부 시기에도 반복된다.


여론조사가 민심을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여론조사가 민심을 만들어내는 역설이 여기서 발생한다.


특정 후보의 지지율이 높다는 조사 결과가 발표되면,

그 자체가 지지율을 더 높이는 효과를 낸다.

반대로 지지율이 낮다고 발표된 후보는

실제보다 더 낮은 지지를 받는 악순환에 빠진다.


5%의 응답자가 만든 숫자가

선거 판도를 흔드는 구조다.


돈 없으면 출마도 사치다


소수정당 후보가 여러 번 선거에 나와 낙선해도

다시 나오는 이유를 사람들은

종종 순수함이나 신념으로 설명한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구조를 들여다보면

그 신념이 얼마나 가혹한

물질적 조건 위에 서 있는지가 보인다.


먼저 이 제도가 왜 만들어졌는지부터 봐야 한다.

1970년대 이전에는 고무신·막걸리·밀가루를 풀었고,

1990년대 초반까지도 후보자가

유권자들에게 용돈 몇천 원을 나눠주는 것이

당연한 선거운동이었다.


재벌급이 아니면 선거운동 비용을 감당하기 어려웠고,

1990년대 후반에도 후보자 한 명당

5억 이상이 들었다.


이런 금권선거의 관행을 끊고

"돈 없어도 출마할 수 있는 선거"를 만들겠다는

국민적 열망 속에 2002년 선거공영제가 도입됐다.


취지는 명확했다.

"유권자들이 후보자의 자질과

능력을 고려하여 선거를 치러야 하며,

후보자 또는 정당의 재력에 의존하지 않아야 한다."

돈이 없어서 출마를 못 하는 상황을 막겠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현실에서 이 제도는

정반대로 작동하고 있다.

공직선거법 제122조의2는

선거비용 보전 제도를 이렇게 규정한다.


유효득표수의 15% 이상을 얻으면

선거비용 전액을 돌려받는다.

10% 이상 15% 미만이면 절반,

10% 미만이면 한 푼도 돌려받지 못한다.


이 기준은 대통령 선거부터

지역구 기초의원 선거까지 동일하게 적용된다.

거대 정당 후보는 15%를 못 넘는 경우가 드물다.

사실상 전액을 보전받는다.


비례대표 선거의 경우 후보 중

1명이라도 당선되면 정당이 지출한

선거비용 전액을 보전받는다.


반면 소수정당·무소속 후보는 인지도가 낮아 득표율이 낮고,

선거비용을 고스란히 본인이 부담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


돈 없는 사람도 선거에 나올 수 있게 하려고 만든 제도가,

돈 없는 사람한테 더 가혹하게 작동하는 역설이다.

"거칠게 비유하면 부자는 부자라는 이유로

큰 돈을 쓰고도 나라가 보전해줄 확률이 크고,

곳간이 부족한 이들은 유명하지 못해

홍보하기 힘든 악순환의 고리가 생긴다."


이 구조에서 소수정당 후보가

매 선거마다 출마를 결심하는 것은

단순한 신념의 문제가 아니다.


매번 수천만 원에 달할 수 있는 선거비용을

스스로 감당하겠다는 결단이다.

낙선하면 빈손이다.


그러나 15%를 넘기는 순간

판도가 달라진다.


비용을 회수하고,

"사람들이 나를 보기 시작했다"는 신호를 얻는다.


좋은 취지로 만든 제도가

나쁜 구조를 만든 전형적인 사례 속에서,

그 벽을 처음으로 넘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공약이 주가를 움직이는 나라들


한국의 공약 이행률 논쟁은

비교적 최근에야 본격화됐다.


그런데 이 문제를 훨씬 오래전부터

다른 방식으로 접근해온 나라들이 있다.

이들의 사례는 한국의 현실이

불가피한 것이 아니라

선택의 결과라는 점을 보여준다.


영국에서는 주요 정당의

매니페스토(공약집)가 발표되는 날이면

주가가 출렁인다.


투자자들이 정당의 정바카라 방향을

공약으로 읽기 때문이다.


매니페스토의 개념은 1834년

보수당 당수 로버트 필에서 시작됐다.

"유권자들의 환심을 사기 위한 공약은

결국 실패하기 마련"이라며

구체화된 바카라임공약의 필요성을

강조한 것이 그 출발이다.


이후 90년대부터는 출마자가

투명한 공약을 제시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 됐다.


하원의원 646명 전원이 임기 내내

지역구민의 검증을 받으며,

그 결과가 다음 선거에 직접

반영되는 문화가 형성됐다.


1997년 토니 블레어가 이끄는 노동당이

집권에 성공한 것도 매니페스토 10대 정바카라을

구체적으로 제시한 것이 결정적이었다.


미국의 팩트체크 기관 폴리티팩트(PolitiFact)는

오바마 대통령의 공약 508개를 하나하나

항목별로 추적해 임기 말에 보고서를 발표했다.


이행 완료 47%,

부분 이행 26%,

약속 파기 약 25%였다.


트럼프 2기의 경우 취임 100일 시점에

주요 공약 이행률이 13%에 그쳤다는 분석도 나왔다.

중요한 것은 이 숫자 자체가 아니다.


"어떤 공약을 지키고 어떤 공약을 어겼는지"가 항목별로 공개되고,

민간 기관이 독립적으로 실시간 추적한다는 점이다.


한국의 이행률 지표가

"몇 개를 이행했냐"만 집계하는 것과

결정적으로 다른 부분이다.


일본은 영국을 모델로

1998년 통일지방선거에서

처음 매니페스토가 등장했고,

2003년 공직선거법 개정 후

총선에서 본격화됐다.


학계 등 전문가 집단이

수시로 검증과 평가 작업을 벌여

유권자 판단을 돕고 있으며,

2009년 총선에서는 매니페스토를 통해

50여 년 만의 평화적 정권교체를 이루기도 했다.


이 나라들과 한국의 차이는 무엇인가.


이들은 공약을 계약서로 취급한다.

한국은 공약을 의향서 정도로 취급한다.


계약서에는 이행하지 않았을 때의 바카라임이 따른다.

의향서에는 없다.


한국에도 매니페스토 운동이 있고,

공약추적 사이트도 있다.

제도는 이미 있다.


문제는 그것이 실제 투표 기준으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공약의 질보다 당의 색깔이

더 강력한 투표 결정 변수인 한,

공약은 계약이 될 수 없다.


균열


지금까지의 이야기는 구조의 문제였다.

구조는 바꾸기 어렵다.


그렇다면 결론은 "선거는 아무 의미가 없다"인가.


아니다.

그것은 틀렸다.


선거는 의미가 없는 게 아니라,

선거만으로는 부족하다.

이 둘은 전혀 다른 이야기다.


한 동네에 매번 선거에 나오는

소수정당 후보가 있다.


열심히 선거운동을 하고,

여기저기 뛰어다니고,

그래도 매번 떨어진다.

선거비용도 날린다.


그런데도 다음 선거에 또 나온다.

좋아하는 정당도 아닌데,

그 사람이 나오는 것을 보며

마음이 움직이는 유권자들이 있다.


공약이나 당이 아니라

사람 자체를 보게 되는 것이다.


그 후보가 처음으로 지난 선거에서유효투표수의 15%를 넘겼다.

이 숫자가 당선에는 한참 못 미친다.

그러나 이 숫자가 의미하는 것은 적지 않다.


선거비용을 처음으로 돌려받게 됐다는 것.

"사람들이 보기 시작했다"는 신호를 처음으로 받았다는 것.

안전 지역구에서 기성 정당이 처음으로

"표가 새나가고 있다"는 경고를 받았다는 것.


민주주의가 느린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한 번의 선거로 바뀌는 게 아니다.


저런 후보들이 계속 나오고,

저런 후보에게 표를 던지는 사람이

조금씩 늘어나는 과정이 10년,

20년에 걸쳐 쌓일 때 구조가 흔들린다.


투표율이 50%라도,

나머지 50%가 어디로 갔는지가 중요하다.


관심이 없어서 안 간 50%와,

찍을 사람이 없어서 안 간 50%는 다르다.

후자가 언젠가 찍을 사람을 발견했을 때,

그 침묵이 움직이는 것이 선거의 진짜 변수다.


투표장을 나오는 순간이 진짜 시작이다


선거가 세상을 바꾸지 못하는 이유는

선거 자체의 문제가 아니다.

선거를 둘러싼 구조의 문제다.


95%가 전화를 끊는 여론조사가 민심을 대표하고,

당원 70%의 투표로 공천이 결정되며,

504명이 경쟁 없이 당선되고,

공약 이행률은 달성하기 쉬운 공약으로 채워지고,

소수정당 후보는 선거비를 고스란히 떠안는 구조.


이 구조 속에서 투표 한 번이

세상을 바꾸기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다.

그러나 이 구조가 영원하지는 않다.

구조는 사람이 만든 것이고,

사람이 바꿀 수 있다.


그러려면 무엇이 필요한가.

무엇을 보고 투표할 것인가.


당 로고가 아니라 사람을.

공약의 수가 아니라 공약의 내용을.

이행률의 숫자가 아니라 어떤 공약을 이행했는지를.

거시 담론이 아니라 내 골목에 무엇이 달라질 것인지를.


어떤 구조를 요구할 것인가.

응답률 5%의 ARS 조사가 아니라

실질적인 민심 측정 방법을.


당심이 민심을 대체하는 공천 구조가 아니라

유권자가 참여하는 공천 과정을.


자기 평가에 그치는 이행률이 아니라

민간이 항목별로 독립 추적하는 바카라임 시스템을.


누구를 지지할 것인가.

뻔히 이길 사람이 아니라,

꼭 필요한 사람을.


당이 공천한 사람이 아니라,

내 동네를 실제로 바꿀 사람을.


한국갤럽 조사에서 유권자의 74%가

"투표를 통해 정치를 바꿀 수 있다"고 답했다.


그 74%가 맞다.


다만 그 변화는 투표하는 순간이 아니라,

투표장을 나온 이후 4년 동안

지속되는 관심과 감시와 요구를 통해 만들어진다.


투표는 필요조건이다.

충분조건이 아니다.


민주주의의 이행률이 1.7%인 이유는,

우리가 투표만 하고

그 이후를 놓아버리기 때문이다.


광주에 필요한 공약


공약이 시민의 삶에서 나와야 한다는 말이

추상적으로 들릴 수 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이야기해보자.

광주 시민이 매일 체감하는 문제들,

그런데 선거때마다 후보들의 공약집에는

잘 보이지 않는 것들이 있다.


버스 노선 개편과 야간버스 신설


광주광역시 시내버스의 막차는

대부분 오후 10시 20분 전후로 끊긴다.

기·종점 기준이니 실제 정류소 도착 시간은 더 이르다.


야간에 광주송정역에서 내려

시내로 이동하려 해도,

밤 10시 30분이 넘어버리면

시내버스를 이용할 수 없다는 민원이

반복적으로 제기돼왔다.


광주광역시 시내버스 노선 중

심야버스는 사실상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한때 좌석02번 심야버스가 운행했지만

지금은 운행이 중단됐다.


인근 화순군 농어촌버스에는 심야버스가 있는데,

광역시인 광주에는 없는 셈이다.


비교하면 선명해진다.

서울시는 2013년 빅데이터를 활용해

'올빼미버스'를 도입했다.


심야 택시 승·하차 데이터 500만 건과

KT 통화량 데이터 30억 건을 결합해

심야 유동인구가 많은 구간을 분석하고 노선을 설계했다.


2017년까지 약 4년 동안

서울 올빼미버스 이용객은 1,100만 명을 돌파했고,

빅데이터를 효과적으로 활용한 성공 사례로 꼽힌다.


서울, 부산, 인천, 경기도, 제주 등에서

심야버스가 운행 중인 지금,

광주는 여기에 없다.


노선 개편 문제도 있다.

광주 시내버스는 2006년 대개편 이후

지선노선이 간선화되고 운행길이가 길어지며

규칙에 맞지 않는 노선번호가 많아지는 등

여러 부작용이 심화됐다는 지적이 있어왔다.


20년 가까이 된 노선 체계가

지금의 광주 생활권 변화를 반영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신도심과 구도심을 연결하는

환승 체계, 배차 간격, 빈차 문제

이것이 시민들이 버스 대신

자가용을 선택하게 만드는 이유다.


공영주차장 확대와 상권 연계 모델


자가용 의존도가 높아지면 주차 문제가 따라온다.

광주 도심과 골목상권 주변의

불법주정차 민원은 끊이지 않는다.


광주 동구 기준으로 불법주정차 잦은 민원 지역은

마슬롯 주변, 법원 주변, 의재로, 광산길, 지산길 등으로

반복적으로 특정된다.


단속을 강화하면 민원이 줄겠지만,

근본적인 이유는 주차할 곳이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핵심이 있다.

민간 주차장이 비싸기 때문에

불법주정차가 늘어난다는 인과 구조다.


시간당 2,000~3,000원을 넘기는

민간 주차장 요금이 아깝다는 판단이

불법주정차라는 선택으로 이어진다.

그 불법주정차가 골목 교통을 막고,

소방도로를 침범하고,

보행 안전을 위협한다.


해결바카라은 단속 강화가 아니라

합리적 가격의 공영주차장 확대다.


1시간 무료,

이후 30분당 250~350원 수준의 공영주차장이

상권 밀집 지역에 생긴다면 어떻게 될까.


공영주차장은 자치단체에서 운영하는 만큼

요금이 일반적인 유료 주차장보다

저렴하다는 것이 핵심 강점이다.


여기에 하나의 아이디어를 덧붙일 수 있다.

근처 식당이나 상점에서 식사 후 영수증을 가져오면

2~4시간 무료 주차 혜택을 주는 상권 연계 모델이다.


이미 민간 상업시설에서는

제휴 주차 할인 방식이 보편화돼 있다.


이것을 공영주차장과 골목상권이

연계하는 공공 모델로 가져오면,

주차 문제와 지역 상권 활성화를

동시에 건드릴 수 있다.


주차비가 부담되어 차를 두고

대중교통으로 오던 사람이

가까운 공영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근처 식당에서 밥을 먹으면,

그 영수증이 주차비를 대신하는 구조다.


이 세 가지

버스 노선 개편,

야간버스 신설,

공영주차장 확대와 상권 연계는

대단한 예산이 필요한 거대 프로젝트가 아니다.

의지와 기획의 문제다.


서울은 빅데이터로 야간버스 노선을 설계했고,

전국 수십 개 지자체가 공영주차장을 운영하며

상권과 연계하는 실험을 이어가고 있다.

광주가 못 할 이유가 없다.


그런데 이런 공약이 왜

이번 선거 후보들의 공약집에는 잘 보이지 않는가.


거시적인 구호와 대형 개발 사업이

공약의 중심을 차지하는 동안,

시민들이 매일 겪는 버스 막차 문제와

주차 민원은 "생활 밀착형 소공약"으로 분류되어 뒤로 밀린다.


그러나 정작 유권자에게 필요한 것은

거창한 비전이 아니라,

내일 밤 11시 이후에도 광주송정역에서

집까지 버스를 타고 돌아올 수 있는 도시다.


한 가지를 분명히 해두고 싶다.

이 글에서 꺼낸 세 가지 공약은

광주에 사는 한 시민의 시선에서 나온 것이다.

옆집 사람은 다른 걸 더 절박하게 느낄 수 있다.


혼자 아이를 키우는 부모에게는

공공 돌봄 시설이 더 급하고,

골목에서 장사하는 자영업자에게는

임대료 문제가 더 클 수 있다.


대학생에게는 등록금이,

어르신에게는 병원 접근성이,

장애인에게는 이동권이 먼저일 수 있다.


그게 핵심이다.


공약은 한 사람의 판단이나

당의 기조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시민의 목소리를 실제로

수렴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져야 한다.


버스가 불편한 사람,

주차가 문제인 사람,

돌봄이 필요한 사람이

각자의 언어로 말할 수 있는 구조


그 수렴 과정 자체가 공약이 되어야 한다.


공청회 한 번,

설문조사 한 번으로 퉁치는 것이 아니라.


그 과정이 없을 때 생기는 것이 지금의 공약이다.


후보가 좋아 보이는 것,

당이 원하는 것,

이행하기 쉬운 것.


시민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