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받은 역사와 버려진 역사

기억의 정치화와 역사관의 충돌

by다소느림

지난 5월,

광주시청 외벽과 전일빌딩245 벽면에

「대한민국헌법 전문(前文) 개정안」 현수막이 내걸렸다.


의안번호 2218099가 인쇄된 그 문서에서

'5·18민주화운동'이라는 여섯 글자만

붉게 강조되어 있었다.


전일빌딩 헌법개정(편집본).jpg

현수막을 내건 것은 광주광역시였다.

공교롭게도 전일빌딩은 1980년 5월,

계엄군 헬기 사격의 탄흔이 남아있는 건물이다.

그 건물 외벽에 걸린 헌법 개정안은,

의도했든 아니든,

하나의 선언처럼 읽혔다.


우리는 아직 여기 있다고.


그러나 그 현수막이 걸리기 열흘 전인 5월 7일,

같은 내용을 담은 헌법 개정안이

국회 본회의에서 표결조차

이루어지지 못한 채 무산됐다.


더불어민주당을 포함한 원내 6당과 무소속 의원 6명 등

총 187명 명의로 발의된 개헌안이었다.


헌법 개정에 필요한 재적 의원 3분의 2는

현재 의석 기준 191표다.

국민의힘 106석이 전원 불참하면서

투표 자체가 성립되지 않았다.


다음 날인 8일,

우원식 국회의장이 재상정을 시도했으나

국민의힘은 헌정 사상 처음으로

개헌안에 대한 필리버스터를 예고했고,

의장은 결국 상정을 철회했다.


국회의장은 의사봉을 내리치며 눈물을 닦았다.

39년 만의 개헌 시도는 그렇게 끝났다.


현행 헌법 전문이 담은 것과 담지 못한 것


현행 헌법의 전문은 1987년 10월 29일에 공포됐다.


그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하고…"


이 문장은 그날 이후

지금까지 한 글자도 바뀌지 않았다.

헌법재판소는 전문을 단순한 서문이 아니라

"규범적 효력을 지닌 조문"으로 해석한다.


독립유공자 예우 의무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의 배상청구권 같은 사안에서

전문은 실제 법적 근거로 활용됐다.


전문에 있는 역사와 없는 역사는

단순한 기념의 차원을 넘어 법적 위상이 다르다.


그 전문에 3·1운동과 4·19혁명은 있다.

부마민주항쟁, 5·18민주화운동, 6월항쟁은 없다.

이 비어있음이 우연이 아니라는 점은,

현행 헌법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보면 분명해진다.


1987년 6월,

전국 400만에서 500만 명이 거리로 나왔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에 분노한 시민들이

직선제 개헌을 요구하며 한 달 내내 시위를 이어갔고,

결국 전두환 정권은 6·29선언을 통해

직선제를 약속했다.


그 투쟁의 결과물이 현행 헌법이다.

그런데 그 헌법의 전문에 6월항쟁은 없다.

6월항쟁이 만들어낸 헌법에,

6월항쟁 자신이 들어가지 못했다.


이유는 단순하다.

개헌 협상은 6·29선언 직후

전광석화처럼 진행됐다.


7월에 여야가 협상에 착수했고,

9월 18일 발의,

10월 12일 국회 의결,

10월 29일 국민투표로 확정됐다.


진행 중인 사건을 전문에 담을 시간이 없었다.


6월항쟁은 자신이 이끌어낸 헌법에

스스로를 새기지 못한 채

역사 속으로 들어갔다.


이후 부마민주항쟁(1979년 10월)과

5·18민주화운동(1980년 5월)도

그 헌법 바깥에 남겨졌다.


6월항쟁이 만들어낸 헌법에

6월항쟁은 없다.


부마항쟁과 5·18을 넣자는 개헌안도 무산됐다.

어떤 역사를 헌법이 호명할 것인지는,

언제나 권력의 타결 가능성에 달려있다.


기억이 축제가 되기까지: 그리고 제도화의 거리


5월 17일,충장로에서는 축제가 열리고 있었다.


46주년 전날,

주먹밥을 나눠주는 부스 앞에 줄이 섰고

무대에서는 공연이 진행중이었다.


전남도청(편집본).jpg

이튿날 정식 개관을 앞둔

옛 전남도청 앞도 마찬가지였다.

슬픔보다 활기에 가까운 풍경이었다.

비판할 일이 아니다.


기억이 살아있으려면 사람이 모여야 하고,

사람이 모이려면 즐거워야 한다.

슬프기만 해서는 바뀌는 게 없다는 것을,

광주는 46년 동안 증명해왔다.


축제가 기억을 이어가는 방식이라면,

헌법은 그 기억이 이 나라의 규범 속에

살아있도록 만드는 방식이다.


지금 광주의 광장은 충분히 활기차다.

문제는 그 활기가 닿지 않는 곳이다.


5·18기념재단의 2025년 국민인식조사에서

응답자의 95.3%가 5·18을 안다고 답했다.

기념 인프라만 보면 상당한 수준이다.


1988년 민주화운동으로 공식 규정됐고,

1990년 보상법 제정 후

초기 보상자 2224명이 인정됐으며,

1995년 특별법이 제정됐다.


1997년에는 대법원 확정 판결로

가해자들에게 내란죄가 적용됐고,

2002년 국립묘지 지정,

2011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까지 이루어졌다.


그리고 46주년인 올해,

1980년 5월의 마지막 항전지였던 옛 전남도청이

당시 모습 그대로 복원돼 정식 개관했다.


그러나 같은 조사에서 5·18 국민인식지수는

100점 만점에 72.9점이었다.


안다는 95.3%와

실제 인식 수준 72.9점 사이의 간극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다음 수치가 말해준다.


응답자들이 5·18과 관련해

가장 시급한 과제로 꼽은 것은 '진실규명'이었다.

32.8%가 선택한 1위였다.


46주년이 지나도록 진실규명이

아직 최우선 과제라는 사실이

현재 어디에 와 있는지를 말해준다.


2019년 출범한

5·18민주화운동진상규명조사위원회는

4년에 걸친 활동을 마치고

2024년 6월 종합보고서를 제출했지만,

발포 명령자가 누구인지는

끝내 밝혀내지 못했다.


기념은 쌓였고,

진실은 아직 미완이다.


나라가 시끄러워진다: 그래서 선택한 전략


한국에서 개헌 논의가 시작되면

반드시 벌어지는 일이 있다.

헌법 전문에 어떤 역사를 넣느냐는 시작에 불과하고,

곧 권력구조 개편 논의로 번진다.


4년 중임제냐,

이원집정부제냐,

내각제냐를 두고

정치권 전체가

자기 의제를 밀어넣으려는

싸움이 된다.


대통령 임기,

국회 권한,

지방분권,

토지공개념까지 묵은 의제들이

한꺼번에 터져나온다.


개헌 논의가 시작됐다는 신호 자체가

정치적 혼란의 도화선이 된다.


이 경험이 쌓인 결과,

개헌은 '가능하면 건드리지 않는 것'이라는

불문율처럼 작동해왔다.


그래서 이번 개헌안이 선택한 전략이

'무쟁점 개헌'이었다.


권력구조 개편은 처음부터

논의 테이블 위에 올리지 않았다.

여야가 이미 공감대를 형성한

최소한의 내용만 담았다.


대통령 비상계엄에 대한 국회 통제 강화,

헌법 전문에 부마민주항쟁과 5·18민주화운동 명시,

국가의 지역균형발전 의무 조항 추가.


4년 중임제도,

이원집정부제도 없었다.

일단 물꼬를 트고,

나머지는 차후에 논의하자는 설계였다.


나라가 시끄러워지는 것을 최소화하면서

39년 된 헌법을 한 발짝 움직이려는 시도였다.


그러나 국민의힘이 개헌안 무산 직후

건국·새마을운동 삽입을 요구하는 순간,

무쟁점 개헌은 다시 쟁점 개헌이 됐다.


합의 불가능한 역사관 논쟁을 끌어들이는 것 자체가,

개헌을 무한정 지연시키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된다.


그리고 개헌 논의가 혼란으로 귀결될 것이라는

예상이 또다시 확인되면,

다음 개헌 시도는 더 멀어진다.


이것이 개헌 실패가

반복되는 구조의 핵심이다.


왜 5·18인가 그리고 왜 6월항쟁은 아닌가


이번 개헌안이 부마민주항쟁과

5·18민주화운동을 묶은 것은

처음부터 설계된 조합이 아니었다.


초기 논의는 5·18 정신의

헌법 전문 수록에 집중되어 있었다.

부마민주항쟁이 개헌안에 포함된 것은

3월 말 원내 6당 연석회의에서

추가 합의된 결과였다.


79개 시민슬롯단체로 구성된

'부마민주항쟁 헌법전문 수록 범시민추진위원회'가

지난해 9월 출범해 활동한 것이 배경이 됐다.


그렇다면 6월항쟁은

왜 이번 논의에서도 전면에 나타나지 않았는가.


6월항쟁의 역사적 규모는

부마항쟁이나 5·18을 상회한다.

전국 단위에 400만~500만 명이 참여했고,

직선제 개헌이라는 구체적인 제도적 성과를 만들어냈으며,

현행 헌법 체제를 직접 낳은 사건이다.


그럼에도 6월항쟁을 전문에 명시하는 것은

'87년 체제' 자체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지라는

훨씬 복잡한 역사 해석을 수반한다.


양김 분열과 노태우 당선으로 귀결된

그 항쟁의 결말을 어떻게 규정할 것인지의 문제가 뒤따른다.


단순한 기념의 언어로 처리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6월항쟁은 이번에도 논의의 중심에서 비켜났다.

헌법 전문에 올라가는 역사는 역사적 중요도와

반드시 비례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 선택이 보여준다.


개헌이 어려운 구조적 이유


한국 헌법은 이른바 '경성헌법'이다.

개헌안이 확정되려면 여섯 단계를

모두 통과해야 한다.


국회 재적의원 과반수 또는 대통령이 발의하고,

대통령이 20일 이상 공고하고,

공고일로부터 60일 이내에

재적의원 3분의 2 이상이 찬성 의결하고,

그 후 30일 이내에 국민투표에서

선거권자 과반수의 투표와

투표자 과반수의 찬성을 얻어야 한다.


일반 법률이 재적 과반수(149표)면 통과되는 것과 달리,

개헌은 191표라는 초다수가 필요하고

그 위에 국민투표라는 별도의 관문이 존재한다.


여기에 더해 현재 개헌 국민투표를 실시하는 것 자체가

법적으로 불가능한 상황이다.


현행 국민투표법은 재외국민의 투표권을 제한하고 있는데,

2015년 헌법재판소가 이 조항에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다.

결론적으로 국민투표법이 개정되지 않으면

개헌 국민투표를 진행할 수 없다.


국회 표결을 통과한다 해도

그다음 단계를 밟을 도구 자체가 없는 셈이다.


이 선결 과제는

이번 개헌 논의 내내

해결되지 않은 채로 남아있었다.


이 구조를 감안하면,

이번 개헌이 무산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더 정확하게는,

1987년 이후 한국에서 개헌이

단 한 차례도 이루어지지 못한 것이

이 구조의 필연적 결과다.


국민의힘은 이번 개헌에 내용으로는

반대하지 않는다면서도 방식에는 반대했다.


공식 입장은 "지방선거용 정략 개헌"이었고,

선거가 없을 때 차분하게 논의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논리가 얼마나 반복됐는지는 연혁이 증명한다.


8년 전에도 같은 장면이 있었다


2018년 5월,

문재인 대통령이 발의한 헌법 개정안이

국회 본회의에 상정됐다.


4년 중임제, 기본권 강화, 지방 분권을 핵심으로 한 개헌안이었다.


당시 자유한국당(현 국민의힘)은

"청와대발 관제 개헌"이라며 단체로 표결에 불참했다.


투표 불성립.


그리고 8년 뒤인 2026년,

같은 장면이 반복됐다.


민주당은 "선거용 반대"라고 비판했다.

"내용엔 동의하지만 방식이 문제"라는 논리로

개헌을 저지하는 패턴이 반복되고 있다.


이것이 만년 떡밥이 된 한국 개헌 논의의 실상이다.


국회사무처가 한국갤럽에 의뢰해

올해 2월 전국 성인 1만 2569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대규모 조사에서 응답자의 68.3%가 개헌에 찬성했다.


이번 개헌안의 핵심 내용들에 대한 지지율은 더 높았다.

계엄에 대한 국회 통제 강화에 77.5%,

지역균형발전 헌법 명시에 83%가 찬성했다.


개헌 방식으로는

'합의 가능한 부분부터 단계적으로'가

69.5%로 가장 많았다.


그리고 국민의힘조차

"개헌안 내용에는 반대하지 않는다"고

공식적으로 밝혔다.


국민 10명 중 7명이 찬성하고,

야당도 내용에 반대하지 않는 개헌안이 무산됐다.

이 역설이 이번 사태의 핵심이다.


건국과 새마을운동: 반대의 진짜 논리


개헌안 무산 직후,

국민의힘 송언석 원내대표의 발언이

더 많은 것을 드러냈다.


그는 "부마항쟁, 5·18민주화운동을 헌법 전문에 담는 데

근본적으로 반대하지 않는다"면서도

"대한민국의 건국과 6·25전쟁 승리 등을

헌법 전문에 먼저 넣어야 하고,

새마을운동·근대화 등도 다 헌법에 포함해야 한다"고 말했다.


표면적으로는 '균형잡힌 역사 인식'의 요구처럼 들린다.

그러나 이 발언이 함의하는 것은 다르다.


현행 헌법 전문은 이미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을 명시하고 있다.

이것은 대한민국의 정통성이

1919년 임시정부로부터 이어진다는 선언이다.


실제로 1948년 제헌헌법도

"기미 삼일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여

민주독립국가를 재건함"이라고 명시했으며,

당시 정부가 발행한 관보 1호에는

1948년을 '대한민국 30년'으로 표기했다.

1919년을 기점으로 계산한 것이다.


건국을 1948년으로 보자는 주장은

현행 헌법 전문과 충돌하는 해석이다.


새마을운동의 경우,

그것이 독재 체제 아래에서 이루어진

국가 주도 동원 사업이라는

역사적 평가가 공존한다는 점에서

헌법 전문에 담을 사안인지 자체가 논쟁적이다.


결국 이 요구는 5·18과 부마항쟁을

헌법적 가치로 승인하는 것을 막기 위한

불가능한 조건의 설정이다.


경향신문은 이를 두고

"5·18과 부마항쟁을 민주주의라는

보편적 헌정적 가치의 사건이 아니라,

뉴라이트식 역사관의 대칭점에 있는

정파적 사건으로 바라보는 시각"이라고 분석했다.


개헌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5·18을 헌법이 호명하는

민주주의의 역사로 인정하는 것에

반대한다는 뜻이다.


제도화의 현주소


5·18이 제도적 인정을 전혀 받지 못한 것은 아니다.

1988년 민주화운동으로 공식 규정됐고,

1990년 보상법 제정 후

초기 보상자 2224명이 인정됐으며,

1995년 특별법이 제정됐다.


1997년에는 대법원이 확정 판결을 내려

가해자들에게 내란죄를 적용했다.


2002년 국립묘지 지정,

2011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까지 이루어졌다.

5·18기념재단의 2025년 국민인식조사에서

응답자의 95.3%가 5·18을 안다고 답했다.

기념 인프라로만 보면 상당한 수준이다.


그러나 같은 조사에서 5·18 국민인식지수는

100점 만점에 72.9점이었다.


'안다'는 응답률 95.3%와

실제 인식 수준 72.9점 사이의 간극은 무엇을 뜻하는가.

그리고 응답자들이 5·18과 관련해

가장 시급한 과제로 꼽은 것은 '진실규명'이었다.

32.8%가 선택한 1위였다.


46주년이 지나도록 진실규명이

아직 최우선 과제라는 사실이

현재 어디에 와 있는지를 말해준다.


2019년 출범한

5·18민주화운동진상규명조사위원회는

4년에 걸친 활동을 마치고

2024년 6월 종합보고서를

대통령과 국회에 제출했다.


그러나 발포 명령자가 누구인지는

끝내 밝혀내지 못했다.


민간인 학살 계엄군에 대한 고발은 접수됐지만,

수사 결과는 불투명하다.

헌법 전문 수록은 무산됐다.


기념과 제도화는 다르다.

기념은 과거를 추모하는 행위다.

제도화는 그 사건이 슬롯의 작동 원리를

구성하도록 만드는 행위다.


현재 5·18을 둘러싼 논의의 상당 부분은

기념의 언어로 채워져 있고,

제도화의 언어는 반복적으로 연기된다.


헌법 전문에 명시되는 것은

그 제도화의 가장 상징적인 형태다.


4·19혁명이 헌법 전문에 명시된 덕분에

그 이념이 국가의 최상위 규범 속에서 다루어지는 것과 달리,

5·18과 부마항쟁은 특별법과 기념 인프라 안에 있되 헌법 밖에 있다.


헌법 전문은 어떤 역사를 선택하는가


이번 개헌 무산이 드러낸 것은

단순히 국민의힘이 반대했다는 사실이 아니다.


어떤 역사를 헌법이 호명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과정이 순수한 역사적 평가가 아니라

정치적 타결의 산물이라는 구조다.


2018년에는 야당이 된 국민의힘의 전신이 막았고,

2026년에는 야당인 국민의힘이 막았다.

그 안에서 5·18과 부마항쟁은

계속 헌법 밖에서 기다렸다.


건국·새마을운동 삽입 요구가 말해주는 것은 더 깊다.

5·18을 헌법이 선언하는 민주주의의 계보에 올려놓을 것인가,

아니면 그것을 특정 진영의 역사로 두면서

반대편 역사와 '균형'을 맞출 것인가


이것이 이번 개헌 논쟁의 실제 쟁점이었다.


헌법 전문은 이 나라가

어떤 역사의 산물인지를 선언하는 문서다.

그 선언을 두고 벌어진 충돌은

개헌 절차의 문제가 아니라

역사관의 충돌이다.


국민 68%가 개헌에 찬성하고,

개헌안의 개별 내용에 대한 지지율이 77~83%에 달하며,

야당조차 내용에는 동의한다고 밝힌 개헌이 무산됐다.


경성헌법의 구조가 개헌을 어렵게 만드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국민투표법이 위헌 상태로 방치되어

투표 자체가 불가능한 법적 공백도 있다.


그러나 그 이전에,

어떤 역사가 헌법의 언어로

번역될 자격이 있는지에 대한 합의가

이 슬롯에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것이

더 근본적인 문제다.


광주 시청과 전일빌딩 외벽에 내걸린 현수막은

그 번역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선언이었다.


국회가 비운 자리를,

도시가 현수막으로 채우고 있다.


5·18은 충분히 기억되고 있는가.


숫자로만 보면 그렇다.

그러나 기억은 권력의 언어로 번역되지 않는 한,

매년 5월에 소환됐다가 6월이 되면

다시 유예되는 것을 반복할 뿐이다.


현수막은 걸렸다.

하지만 현수막은 법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