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우리도 가을 걷이 하러 가자"
작은 아이가 어느 날 아침 던진 말이다. 학교에서 가을걷이를 배운 모양이었다. 땅 한 평 없는 현실을 그때 깨달았다. 농사를 짓고 산 부모님 덕분에 산이고 밭이고 논이고 지천이었기에 누구나 어느 때나 마음만 먹으면 누릴 수 있을 것으로 알았지 뭔가. 살다 보니 아이들에게는 땅 한 번 밟을 기회도 거의 주지 못하고 살았다. 그 말을 처음 들었을 때의 황망함이란.
그래서인지 살면서 언젠가는 흙을 쪼는 시간을 만드리라 했다. 상추도 심어보고 배추도 심어보고 정말 가을걷이를 해봐야지 했다. 꽃도 심고 꽃나무도 심으리라. 그날이 꼭 퇴직 후에라야 하는 건 아니다. 아이들이 다 자라 선 지 이제 하루 이틀 지나는 날들이 보여서 인지 최근에는 땅을 많이 기웃거려 왔다. 여러 사이트의 부동산도 보고 홀로 탐사도 했지만 구경만 해왔다.
바라면 이루어진다고 했던가. 우연한 기회에 지인과 연결이 됐다. 하고 싶은 만큼 만들 수 있을 만큼 개간해서 심어보라지 뭔가. 작년까지 경작하던 사람이 내놓는 바람에 빈터가 있다고 했다. 얼마 후에는 경운기로 흙을 갈아도 주겠단다. 깻잎 모종도 주마하는 분은 활터에서 만난 어른이다. 지천에 땅이 많은데 의외로 텃밭을 일구고자 하는 이는 갈수록 줄어든다고 했다.
꽃나무도 심고 과실수도 심으려면 아무래도 내 땅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지만 첫 텃밭을 일굴 수 있게 됐다. 다 커버린 아이를 데리고 올 가을에는 가을걷이를 할 수 있겠다. 한 여름쯤에는 깻잎을 따러 갈 수도 있겠고, 내가 키운 고추를 따고 오이를 따고 호박잎을 따와서 쪄먹어야지. 부모님 생각이 가장 많이 날 듯하다. 오매불망 텃밭을 외는 건 어쩌면 부모님에 대한 그리움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고속도로와 국도가 지나가고 지방도로가 어지럽게 겹쳐져 있다. 그 길조차 가다 보면 기찻길이 썰고 지나간다. 아파트 촌을 벗어나자마자 이런 곳이 있다니 놀랍다. 이제 막 여름 냄새를 풍기는 시골 풍경이다. 작물들이 허리 반치나 자랐다. 옥수숫대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고 고춧대 아래로 감자순이며 고구마 순이 시퍼렇게 땅을 기고 있다.
이른 새벽 차도 뜸하다. 신호등이 모조리 점멸등이라 10여 분도 채 되기 전에 텃밭에 도착했다. 이제 서너 번 와본 길인데도 능숙하다. 반듯하게 난 도로 가에 접한 300여 평의 밭이 그동안 기다려줬을까. 이렇게 우연히 소개받다니. 지난 주말 처음으로 산 호미랑 삽, 물조리와 모자와 장갑까지 트렁크에 실려있다. 철물점 옆에 있는 모종 가게에서 갖가지 모종을 살 때는 벌써 수확하는 기분마저 들었다. 호박 3 포기 가지 3개 땡고추 2개 오이고추 3개 부추 모종 5개에 상추 씨앗을 한 봉지 샀다.
한 사람은 삽을 들고 한 사람은 호미를 들고 흙을 퍼올려 높게 둔턱을 만들었다. 거기에 사 온 모종을 옮기고 씨앗도 뿌리고 물을 주었다. 이튿날 새벽에도 찾아가 물을 주었는데 놓친 점이 있었다. 소식을 들은 지인이 거름흙을 한포 실어오고 땅을 준 분이 온 셋째 날에야 제대로 흙을 파지 않았음을 알았다. 먼저 거름을 섞어 모든 땅을 엎은 후에 고랑을 파고 흙을 모아 둔턱을 만들어야 했다. 그래야 심은 모종이 뿌리를 내리기 쉽다고 했다.
부지런히 영상을 보며 배운다. 하루 거른 새벽에 가보는 건 이제 두 번째다. 물도 이틀에 한 번 주라고 했다. 긴 고랑을 하나 더 만들었다. 3곳에 묻은 호박은 어찌 자라려는지. 도로 건너편에는 시에서 분양한 시민텃밭이 수십여 칸 있다. 이른 새벽인데 곳곳에 주인들이 와서 작물을 다듬는다. 그 위로 길게 퍼져 오는 햇살이 벌써 싸하다. 저 앞에 누운 우리 밭은 아직 산 그림자에 덮인 시간, 그러고 보니 낮은 산이 평지를 둘러싸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