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8.9 (일)
절기상 8월 7일 (금)이 입추였다. 입추날까지도 더운 바람이 불어서 ‘이젠 정말 가을이 없어지려나 보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부터 나는 평소와 다른 바람의 감촉을 잘 느꼈다. 그리고는 달력을 들여다보곤 했다. 그러면 어김없이 입추 무렵이었다.
그런데 올해는 아니었다. 입추 당일은 특히 그랬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단 하루 차이로 바람이 달라졌다. 8월 8일 오후에 불어오는 바람은 갑자기 가을바람이 되어 있었다. 길을 지나가는 사람들도 “어머, 바람 부는 것 봐.”, “아이, 시원해.” 하며 저마다 바람을 반겼다.
나는 그 순간 밖으로 튀어나갔다. 그리고 지인들에게 문자를 보내고 사진도 보냈다.
“지금 다들 밖에 나가보세요. 바람이 너무 시원해요.”
그날 밤에는 풀벌레 소리까지 들렸다. 풀벌레는 어디에 있다가 바람이 불면 나와 연주를 시작하는 걸까. 계절의 변화를 알아채는 자연의 감각은 참으로 오묘하다. 텃밭을 하다 보면 그런 오묘한 자연을 날마다 느끼게 된다.
9일에는 밭에 나갔다. 예전 같으면 한낮이라 가지 않았을 시간이었다. 그런데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는 것이 기분 좋았고, 구름이 햇볕을 가려 그늘을 만들어 주어서 오후 3시경 밭으로 향했다. 그 시간에 밭에 갔는데도 아무도 없었다. 사람이 없다는 사실이 그냥 좋았다. 넓은 밭이 모두 내 것인 것 같았기 때문이다. 잠시나마 그 넓은 밭의 주인이 된 기분이었다.
오늘은 고구마 줄기를 잘라주기 위해 창고에 들러 낫을 챙겼다. 낫을 보니 ‘낫 놓고 기역 자도 모른다’는 속담이 생각나서 혼자 속으로 키득거렸다.
남편에게 사진을 찍을 테니 낫을 들고 있으라고 하고, 나름대로 포즈까지 알려주었다. 그렇게 오늘의 사진 한 장이 완성되었다.
오늘의 텃밭 방문은 큰 기대를 하지 않고 갔다. 그야말로 고구마 줄기를 다듬기 위해 간 것이었다. 그런데 밭에 도착하자마자 놀랐다. 사방으로 가지를 뻗은 가지가 열매를 달고 있었고, 이제는 더 이상 오이가 자라지 않을 것 같았던 오이에도 열매가 달려 있었다. 자연은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조금 더 오래, 조금 더 묵묵히 자기 일을 하고 있었다.
반면 고추는 생각보다 크게 자라지 않았고, 많이 열리지도 않았다. 이제는 달려 있는 고추들이 더 자라기보다는 빨갛게 물들 때가 되었나 보다 싶었다.
오이의 색도 한창 잘 자랄 때의 예쁜 초록빛이 아니었다. 노란빛이 살짝 도는 연두색이었다. 가지도 매끈하고 예쁘게 뻗기보다는 보랏빛 열매에 상처가 난 모습으로 조금은 뻣뻣하게 자라고 있었다. 대추방울토마토도 선명한 빨간색보다는 주황색이 많았고, 앵두처럼 작게 열린 채 익어버린 열매도 보였다.
쪽파는 끝이 하얗게 말라 있었다. 예전에 엄마가 말씀하시기를 쪽파는 끝이 하얗게 변하면 수확할 때가 된다고 하셨는데, 아직 크기가 작은 것 같아 수확을 해야 하나 잠시 망설였다.
자리를 옮겨 콩도 살펴보았다. 뽑을까, 말까 고민하던 콩이었다. 남편은 콩에 꼬투리가 있느냐며, 제대로 자라고 있는 것이 맞는지 물었다. 나는 손으로 조심스럽게 잎을 젖혀보았다. 그랬더니 꼬투리가 보였다.
“꼬투리 있어. 콩에게도 물 줘요.”
나는 남편에게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나는 또 콩에게 물을 주는 남편의 모습을 찰칵, 사진으로 남긴다.
그나저나 콩은 큰 기대를 하지 않으려고 한다. 잎이 누렇게 뜨고 줄기도 그다지 튼실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도 꼬투리를 발견했으니 조금은 기다려보기로 했다.
집에 돌아와 수확해 온 농작물들을 정리하고 사진을 찍어보았다. 참 이상했다. 정말 잘 자라기 시작했을 때의 모습과 지금의 모습은 분명 같은 오이이고, 같은 가지이고, 같은 토마토인데 색도 모양도 달랐다.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모든 것에는 자기만의 가장 아름다운 때가 있는 법이라고.
한창 싱싱하고 예뻤던 오이도, 반짝반짝 빛나던 가지도, 빨갛게 익어가던 토마토도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모습이 달라진다.
우리도 그렇지 않은가.
우리에게도 가장 젊고 예뻤던 전성기가 있었고, 지금은 그때와 조금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다. 그렇다고 지금의 모습이 아름답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저 아름다움의 모습이 달라졌을 뿐이다.
여름 오이는 길쭉하기보다는 통통하다. 잘라보면 씨도 많다. 오늘은 이 오이의 씨를 제거하고 피클을 만들었다. 그리고 오이무침도 만들었다. 그렇게 또 먹을 것을 안겨준 텃밭. 그리고 그 텃밭을 품고 있는 자연. 나는 오늘도 그들에게 감사함을 느낀다.
입추가 지나고 단 하루 만에 가을바람이 찾아온 것처럼, 자연은 우리가 알아채지 못하는 사이에도 조용히 다음 계절로 넘어가고 있다.
잘 자라던 것이 조금씩 시들고, 열매가 익어가고, 잎의 색이 달라지고, 새로운 계절의 소리가 들려온다.
어쩌면 삶도 그런 것인지 모르겠다.
무언가가 예전 같지 않다고 해서 그것이 끝난 것은 아니다. 다만 그때의 아름다움에서 다음 모습으로 넘어가는 중일뿐이다.
그러니 지나간 전성기를 아쉬워하기보다 지금 내게 주어진 계절을 잘 바라보고 싶다. 싱싱한 오이도 좋고, 조금 상처 난 가지도 좋고, 주황빛 토마토도 좋다. 지금의 모습에도 분명 지금만의 아름다움이 있으니까. 그리고 텃밭에서 내가 배우는 가장 큰 것은 어쩌면 이것인지도 모르겠다. 때가 되면 변하는 것을 억지로 붙잡지 말 것. 그리고 지금 내 앞에 놓인 계절을 충분히 사랑할 것.
가을바람의 살랑임에 풀벌레 소리를 들으며 밤도 전번보다 통통하게 커지고 있다.
아직 익어가는 중인 열매처럼, 나의 계절도 그렇게 천천히 무르익어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한 일 :
고구마 줄기를 다듬기 위해 낫을 챙겨 텃밭에 다녀옴
가지, 오이, 고추, 토마토, 쪽파, 콩의 상태를 살펴봄
오이와 가지, 토마토 등을 수확함
콩에 물을 줌
수확한 오이로 피클과 오이무침을 만듦
텃밭의 변화와 남편의 모습을 사진으로 기록함
할 일 :
고구마 줄기 계속 정리하기
쪽파의 상태를 살펴보고 수확 시기 결정하기
빨갛게 익어가는 고추 수확하기
콩이 잘 자라는지 계속 살펴보고 물 주기
오이와 가지, 토마토의 수확 시기를 놓치지 않기
한줄 요약 :
입추 다음 날 찾아온 가을바람처럼, 자연의 변화를 바라보며 모든 것에는 저마다의 아름다운 때가 있고 지금의 계절을 사랑하는 것이 삶이라는 것을 배운 텃밭의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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