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망쳤던 곳으로 다시 돌아가는 용기

by푸른 잎사귀

내 인생 50년이 넘도록 끝내 정복하지 못한 것이 하나 있다. 바로 영어다.


학교 다닐 때 그렇게 배웠던 영어는 어디로 날아갔는지, 지금은 겨우 읽는 정도만 가능할 뿐이다. 외국인을 만나면 입이 얼어붙는다. 좋게 표현해서 얼어붙는 것이지, 사실은 머릿속이 하얘진다. 하고 싶은 말은 입안에서만 맴돌고 끝내 입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새해만 되면 늘 영어 공부 계획을 세웠다. 하루에 단어를 몇 개씩 외우고, 예전에 보던 문법바카라부터 다시 펼쳤다. 하지만 작심삼일은 아니어도 몇 주를 넘기지 못하고 흐지부지되기 일쑤였다.


지금 사는 곳으로 이사 온 뒤 무엇을 배워볼까 고민하다가 도서관에 영어 동아리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전화를 걸어 문의한 뒤 모임에 참석했다.


그런데 이게 웬걸.

'영어 동화 동아리'라는 이름만 듣고 아주 쉬운 영어 동화바카라을 읽는 모임인 줄 알았다. 막상 가 보니 원서를 읽고 있었다.


첫 시간부터 기가 죽었다. 갑자기 영어 울렁증까지 생겼다. '내 수준과는 너무 다르다'는 생각뿐이었다.

결국 다음 모임 전에 총무에게 전화를 걸었다.


"제 수준보다 어려워서 못 나갈 것 같아요."


총무는 부담 갖지 말고 언제든 나오라고 했다. 나는 "이제 안 나가겠습니다."라는 말은 끝내하지 못하고 "네." 하고 전화를 끊었다.


단톡방에 "안녕하세요. 잘 부탁드립니다."라고 인사한 지 일주일 만에 나는 동아리에 나가지 않게 되었다.

그렇다고 단톡방을 나가지는 않았다.


총무가 나를 내보낼 줄 알았는데 그대로 두었고, 나도 두 달 동안 말없이 단톡방에만 남아 있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6월 30일.


또 갈등이 시작됐다.


사실 그 갈등의 시작은 영어가 아니라 텃밭이었다.


주말농장에서 키운 상추가 너무 많았다. 아무리 먹어도 줄지 않았다. 문득 영어 동아리 사람들에게 나눠 드리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또 다른 생각이 이어졌다.


'내가 그때 도망가지 않았다면 지금쯤은 영어가 조금은 익숙해져 있지 않았을까?'


마침 다음 날은 7월 1일.

지나간 6개월은 되돌릴 수 없지만 앞으로의 6개월은 달라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다시 총무에게 전화를 걸었다.


"다시 나가도 될까요?"

"바카라이 없는데 사진으로 찍어서 보내주실 수 있을까요?"


전화를 끊고 상추를 포장하기 시작했다.

다섯 봉지.


남편에게 말했다.

"이거 내일 영어 동아리 사람들 갖다 줄 거야."


"그 사람들 알아?"


"아는 사람도 있고 모르는 사람도 있어."


"오지랖 아니야?"


나는 웃으며 말했다.

"괜찮아. 살림하는 사람들은 이런 유기농 상추 좋아해."


다음 날.

나는 상추 다섯 봉지를 들고 도서관 지하 영어 동아리 교실로 향했다.


처음 보는 분들이 많았다. 특히 연세가 꽤 있어 보이는 분도 두 분 계셨다.

모두 돌아가며 자기소개를 했다.

내 차례가 되었다.


"안녕하세요. 박혜원입니다. 저번에 왔다가 수준이 높아서 도망갔어요. 그런데 오늘이 7월 첫날이라 새 마음으로 다시 공부해 보려고 용기를 내어 왔습니다. 그리고 이건 제가 주말농장에서 키운 유기농 상추예요. 필요하신 분은 가져가세요."


가방에서 상추 봉지를 하나씩 꺼냈다.


"어머, 이 귀한 걸 왜 가져오셨어요?"


"계속 상추만 먹을 수는 없잖아요."


그러자 모두 웃었다.


"저는 집에 상추가 많아서 다른 분 드릴게요."


그렇게 다섯 봉지가 금세 주인을 찾아갔다.


이어 다른 분들의 소개가 이어졌다.


"저는 올해 쉰일곱입니다. 초창기 멤버예요. 그냥 멈추지 않고 계속하다 보니 여기까지 왔네요. 꾸준히 하는 게 제일 중요한 것 같아요."


"저도 초창기 멤버예요. 영어를 하다 보면 날마다 새로운 걸 발견하는 기쁨이 있어요."


"여기서는 제가 제일 나이가 많을 거예요. 젊은 사람들과 함께 배우는 게 얼마나 좋은지 몰라요. 다 애기들 같아요."


"아이 둘 엄마예요. 아이들 학교 보내고 매일 아침 나와요. 안 그러면 우울해질 것 같아서요."


"저도 다닌 지 3개월 됐어요. 결국 용기를 내는 게 가장 중요한 것 같아요."


지난번에 만났던 해림 씨도 반갑게 인사했다.

"상추는 다음에 꼭 챙겨주세요."


나는 웃으며 등을 살짝 두드렸다.

"알았어요."


영어 공부는 한 사람씩 돌아가며 원서를 읽고, 해석하고, 기억할 만한 문장과 단어를 함께 이야기하는 방식이었다.


오늘은 바카라이 없어서 마음 편하게 '깍두기'가 되어 듣기만 했다.


모임을 마치고 나오는데 유순 씨가 웃으며 말했다.

"자주 얼굴 뵈어요."

그 한마디가 참 따뜻하게 들렸다.


집으로 오는 길에 서점에 들러 원서를 주문했다.

발걸음이 참 가벼웠다.


영어를 끝까지 계속할지, 또 중간에 포기하게 될지는 아직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오늘, 나는 다시 한 걸음을 내디뎠다.


2026년 하반기의 첫날.

영어를 잘한 날은 아니었지만, 도망쳤던 곳으로 다시 돌아간 날이었다.

그리고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뿌듯한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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