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6. 6 (토)
토요일은 이상하게 기분이 좋다.
아마도 내일 하루 더 쉴 수 있다는 사실이 든든한 보험 하나 들어놓은 것 같은 안도감을 주기 때문일까.
늦잠을 자고 느긋하게 일어났는데 남편이 보이지 않았다.
잠시 후.
띠리릭.
현관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습관처럼 헬스장에 갔다가 현충일이라 문을 닫은 걸 보고 허탕을 치고 돌아온 것이다.
"아휴, 괜히 갔네."
투덜거리며 들어온 남편은 의자 위에 있던 리모컨을 찾아 TV를 켰다.
제71회 현충일 추념식이었다.
남편과 함께 묵념을 드린 뒤 고(故) 이재석 경사의 어머니 백연재 씨가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들었다.
순간 가슴 한쪽이 뜨거워지며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나는 과연 누군가를 위해 내 생명을 내놓을 수 있을까.
나라를 위해 자신을 희생한 분들의 숭고한 정신 앞에 다시 한번 고개가 숙여졌다.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을 갑자기 떠나보낸다는 것이 얼마나 큰 아픔인지도 생각하게 되었다.
어린 시절 아버지를 잃은 나에게 준비되지 않은 이별은 아직도 마음 한편에 지워지지 않는 흔적으로 남아 있다. 그 감정은 애써 지운다고 지워지는 것도 아니고 생각말자 하면서도 잊히는 것도 아니었다. 그 흔적은 내호흡과 같아서 언제나 나와 함께 하는 그런 감정이었다.
추념식도 끝나고 감정도 추스르고 고기를 볶고 점심을 준비하였다.
텃밭에서 따온 채소들로 쌈을 싸 먹었다. 채소가 줄어드는 것을 보며 문득 생각났다.
'아! 어제 상추 못 따왔는데!'
어제 못 따온 상추가 갑자기 내 머릿속에서 존재감을 뽐내기 시작했다.
게다가 어제 텃밭에서 저질렀던 일도 마음에 걸렸다.
초보 농부 부부가 의욕만 앞서 지주대와 그물망을 설치했다가 가지를 거의 압박붕대 수준으로 감싸놓고 온 것이다.
가지 입장에서는 얼마나 답답했을까.
'사람 살려...'
아마 속으로 그러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집안일을 하는 내내 머릿속은 텃밭 생각뿐이었다.
베란다 청소를 해도 텃밭.
빨래를 개도 텃밭.
청소기를 돌려도 텃밭.
마음은 마치 똥 누다 만 강아지처럼 계속 찜찜했다.
결국 집안일을 마치자마자 텃밭으로 출동하기로 했다.
가는 길에 현대종묘상에 들렀다.
오이 줄기를 그물망에 고정할 집게를 사기 위해서였다.
"텃밭 할 때 쓰는 집게 있죠?"
그러자 종묘상 아주머니가 물으셨다.
"어느 사이즈요? 구멍 작은 거, 큰 거 있어요."
가져다주신 집게를 보니 작은 것은 너무 아담했다.
우리 텃밭 작물들은 이미 덩치가 제법 있어서 작은 집게로는 감당이 안 될 것 같았다.
그래서 큰 구멍이 있는 검은 집게를 골랐다.
"얼마예요?"
"오천 원이요."
결제하려는데 문 옆에 빨간 가방처럼 생긴 물건이 눈에 띄었다.
자세히 보니 텃밭 의자였다.
그걸 보는 순간 엄마 생각이 났다.
10년 전쯤.
엄마는 지금보다 무릎도 훨씬 건강했고 폐암이 생기기 전이라 텃밭을 아주 열심히 가꾸셨다.
엄마는 성실했고 농사도 잘 지으셨다.
어느 날 친정집에 갔더니 두 다리 사이에 이상한 물건을 끼고 계셨다.
"혜원아, 이게 뭔지 알아?"
"엄마, 그게 뭐예요?"
그러자 엄마는 자랑스럽게 말씀하셨다.
"이거 봐라. 얼마나 편한지."
그리고는 그 자리에서 털썩 주저앉아 텃밭 일을 하셨다.
그게 바로 텃밭 의자였다.
지금 내 눈앞에도 그 의자가 있었다.
문제는 색깔이었다.
전부 새빨갰다.
'너무 튀는 거 아닌가...'
망설이고 있는데 남편이 말했다.
"필요하면 하나 사."
그 말에 결국 집어 들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이거 얼마예요?"
"8천5백 원이요."
집게와 의자를 사고 기분 좋게 텃밭으로 향했다.
텃밭에 도착하니 이번에는 왼쪽 이웃이 나와 계셨다.
고등학생쯤 되어 보이는 딸과 함께였다.
남편과 나는 어제 설치했던 지주대를 다시 해체하기 시작했다.
그물망 제거.
케이블타이 제거.
지주대 뽑기.
재설치.
한마디로 어제 한 일을 오늘 다 부수고 다시 하는 작업이었다.
초보 농부의 특징이다.
어제는 천재적인 아이디어라고 생각했는데 다음 날 보면 사고 현장 복구 작업이 된다.
이번에는 오이 쪽에만 삼각형 지주대를 세우고 그물망을 설치했다.
그러자 답답하게 갇혀 있던 가지가 비로소 잎을 활짝 펼쳤다.
정말 큰 숨을 쉬는 것 같았다.
고추도 집게로 다시 고정해 주고 오이도 올라갈 방향을 잡아주었다.
그제야 내 속도 함께 후련해졌다.
그런데 또 문제가 생겼다.
가지 옆에 심은 고추가 서로 영역 다툼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회의 끝에 고추 이사를 결정했다.
조심스럽게 파냈는데 알고 보니 꽈리고추였다.
순간 지인 얼굴이 떠올랐다.
꽈리고추를 정말 좋아하는 분이다.
"잘 살아야 된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솔직히 큰 기대는 없었다.
그래도 물을 듬뿍 주고 지주대까지 세워주며 새 출발을 응원했다.
이제 남은 건 꽈리고추의 생존 의지뿐이다.
그 모든 작업을 하는 동안 옆 텃밭 딸은 계속 아빠를 불렀다.
"아빠, 이것 봐봐. 오이 진짜 귀엽다."
"아빠, 여기 수박도 있어."
"아빠, 토마토는 더 익어야 하지?"
"아빠."
"아빠."
"아빠."
참새 한 마리가 계속 지저귀는 것 같았다.
그 모습을 보는데 순간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
집으로 돌아와 남편에게 말했다.
"아까 옆 텃밭 딸이 계속 아빠, 아빠 부르는데 괜히 부럽더라."
"왜?"
"나는 그 나이에 아빠를 불러볼 수도 없었고, 아빠랑 텃밭도 못 해봤잖아."
남편이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당신 나이가 몇인데 아직도 그런 생각이 들어?"
"응. 나이가 먹어도 아빠랑 못 해본 것들이 생각나네."
예전에 아는 분이 들려준 이야기가 있다.
칠십이 넘은 분이었는데 교회 새 신자 모임에서 어린 시절 아버지에게 받았던 상처를 이야기하셨다고 한다.
그러자 친구가 말했다.
"순자야. 너 이제 부족한 것 없이 잘 사는데 아버지 일은 좀 잊어도 되지 않겠니?"
그분은 조용히 대답하셨다.
"그게 잘 안 잊혀..."
그 이야기를 들으며 생각했다.
아마 나도 그렇지 않을까.
밤이 되어 바카라상 앞에 앉았다.
문득 <꽃밭에서>를 흥얼거렸다.
"아빠하고 나하고 만든 텃밭에~~"
실제로는 함께 만든 적 없는 텃밭인데도 노래를 부르니 잠시 아버지가 내 옆에 와 계신 것 같았다.
종묘상에서 집게와 텃밭 의자 구입
지주대 재설치
꽈리고추 옮겨심기
상추 따오기
감자 북돋우기
콩 다시 심기
꽈리고추 생사 여부 확인하기 (제발 살아다오.)
지줏대를 다시 세우고 상추를 따러 갔다가, 아버지를 그리워하고 돌아온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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