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회사가 아직 모으지 않은 데이터
사업을 10년 한 사람이 회사를 떠난다고 생각해 보자. 그 사람이 만든 매출과 계약서는 남는다. 만났던 고객 이력도 남아 있다.
그런데 어떤 고객에게 시간을 더 써야 하는지, 언제 그만 만나야 하는지, 고객이 가격을 깎아달라고 할 때 정말 가격이 문제인지, 어떤 고객에게는 데이터를 팔기보다 작은 분석부터 제안해야 하는지는 어디에 남을까? 대부분 그 사람과 함께 사라진다.
사업을 잘하는 사람의 판단도 데이터로 남겨야 한다. 그래야 사람이 바뀌어도 회사가 다시 처음부터 배우지 않는다. 새로운 직원은 더 빨리 일을 배울 수 있고, 충분한 기록이 쌓이면 AI는 과거를 검색하는 것을 넘어 다음 사업의 판단을 도울 수 있다.
헤르만 헤세의 『싯다르타』를 읽다가 한 문장에서 오래 머물렀다.
“지식은 전달할 수 있지만, 지혜는 전달할 수 없다.”
AI를 생각했다. AI에게 회사의 지식을 알려주는 것 자체도 쉽지 않다. 데이터 하나만 해도 속성의 정의를 알려줘야 하고 어떤 기준으로 만들어졌는지 설명해야 한다. 같은 단어가 부서마다 다르게 사용되기도 하고 문서에 없는 내용도 있다.
지식도 설명하기 어려운데, 직원들이 오랫동안 일을 하며 쌓은 지혜는 어떻게 AI에게 알려줄 수 있을까?
사업을 오래 한 사람에게는 자신만의 판단법이 있다. ‘이 고객에게는 가격을 낮추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다, 이 사업은 지금 시작하면 안 된다, 이 고객에게는 상품부터 설명하지 말고 문제부터 물어봐야 한다’
왜 그렇게 생각하느냐고 물으면 명확하게 설명하기 어려울 때도 있다. 수많은 일을 겪으며 만들어진 감각이기 때문이다.
지혜는 조합하는 능력에 가깝다. 김익한의 『거인의 노트』를 읽으며 데이터, 정보, 지식, 지혜에 대해 이런 메모를 남긴 적이 있다.
“우리가 일상에서 접하는 것은 데이터 자체보다 이미 어느 정도 가공된 정보가 많다. 정보에 나의 생각과 회사의 업에 대한 이해가 더해지면 지식이 된다. 그리고 여러 지식을 연결하고 반복해서 사용하다 보면 어느 순간 자신만의 문제 해결법이 생긴다.“
이 문제는 이렇게 풀면 잘 풀린다. 이렇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지혜가 아닐까? 같은 숫자와 보고서를 봐도 3년 일한 사람과 10년 일한 사람의 질문이 다르다. 정보의 차이만이 아니라 그동안 쌓은 지식을 조합하는 방식이 다르기 때문이다.
지식을 조합해 판단하는 능력까지 넘겨줄 수 없다면, 지혜 대신 판단의 궤적을 남기면 어떨까? 몇 차례 이야기 했던 복기에 대한 이야기다. 바둑에서 대국이 끝난 뒤 두 사람이 수를 하나씩 되짚어보는 복기.
사업에서도 결과만 기록해서는 얻을 수 있는 것이 많지 않다. 계약했다. 계약하지 못했다. 매출이 얼마였다. 이것은 결과의 기록이다.
복기는 그때 무엇을 알고 있었는지, 어떤 선택지가 있었는지, 왜 그 선택을 했는지, 무엇을 중요하게 보고 판단했는지를 돌아보는 일이다.
예를 들어 고객에게 데이터를 제안했지만 계약하지 못했다. 처음에는 가격이 비싸서 계약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고객에게는 그 데이터를 실제로 분석할 사람이 없었다. ‘미계약’이라고만 남겼다면 실패한 거래 하나로 끝난다. 하지만 판단과 결과를 함께 복기하면 다른 것이 남는다.
다음 고객에게는 가격을 이야기하기 전에 이 데이터를 누가, 무엇을 위해 사용할 것인지부터 확인한다.
경험 하나가 다음 판단의 기준으로 바뀐다.
그렇다고 모두에게 자신의 판단을 매번 상세하게 기록하라고 할 수도 없다. 그것 역시 또 하나의 일이 되기 때문이다.
숙련된 대장장이에게 쇠를 잘 다루는 노하우를 글로 써달라고 하면 어떻게 될까? 쇠를 언제 불에서 꺼내는지, 어디를 먼저 두드리는지, 몇 번 두드리고 다시 불에 넣는지를 모두 설명하기는 어렵다. 너무 오랫동안 무의식적으로 몸으로 체득하여 해온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대장장이가 일하는 모습을 영상으로 계속 남긴다면 어떨까? 본인이 말로 설명하지 못했던 행동까지 기록할 수 있다. AI가 여러 작업을 비교하면서 사람이 미처 언어화하지 못한 반복적인 패턴을 찾을 수도 있다.
사업도 비슷하다. AI에게 사업 잘하는 법을 설명하려 하지 말고, 우리가 사업해 온 과정을 보여줄 수 있다. 과정에 더 많은 데이터가 있다. 지금 회사에는 없는 데이터다.
미팅과 상담, 이메일, 제안서 변경 이력, 견적 변화, 내부 의사결정과 최종 결과를 연결하면 한 건의 사업에서도 상당한 판단 데이터가 만들어진다. 결론을 저장하는 회사에서 과정까지 학습하는 회사로의 변화다.
스콧 애덤스의 『더 시스템』에서 기억에 남았던 내용이 있다. 목표를 만드는 것보다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는 글이다.
‘올해 사내 노하우 1,000건을 등록하자’고 하면 목표가 된다. 목표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일을 하면서 판단의 흔적이 남도록 만들어야 한다. 업무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생성되는 기록은 연결하고, 사람에게는 마지막에 짧은 해석만 요구한다.
“이번 사업에서 예상과 달랐던 것은 무엇인가?”
2분이면 된다.
“가격 때문인 줄 알았는데 실제로는 데이터를 사용할 조직이 없었던 게 더 큰 문제였다“ 정리하고 분류하고, 비슷한 과거 사례와 연결해 다시 꺼내 쓰기 쉽게 만드는 것은 AI가 한다.
사람은 경험하고 판단하고, AI는 정리하고 연결하고 기억한다. 마찰이 크면 시스템은 오래가지 않는다.
직원들에게 노하우를 많이 입력하라고 독려하는 것이 아니라 일을 할수록 회사가 조금씩 더 똑똑해지는 구조를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
“견적서는 어떻게 작성하는가?”는 매뉴얼이 알려줄 수 있다. 하지만 “이 고객에게 어떤 견적을 제시해야 하는가?”는 경험이 필요하다. 단가표를 촘촘하게 만들면 되지 않냐는 말도 있다. 살아있는 현장을 엑셀표에 맞출 수 있을까?
새로운 직원이 실제 선배들의 성공과 실패를 필요할 때 찾아볼 수 있다면 회사가 무엇을 하는지를 넘어 이 회사에서는 어떻게 판단하는지를 배울 수 있다.
A부장의 성공, B과장의 실패, C대리의 새로운 시도가 연결되면 힘을 갖는다. 한 사람이 경험할 수 있는 사건에는 한계가 있지만 AI는 여러 사람에게 흩어진 수백, 수천 건의 경험을 함께 볼 수 있다. 이 지점에서 개인의 노하우는 조직의 데이터 자산으로 바뀐다.
기록이 쌓이면 질문이 달라진다. 그리고 여기서부터 사업적인 가치가 커진다. 처음에는 AI에게 과거 자료를 찾게 한다. 하지만 성공과 실패의 결과뿐 아니라 그 과정과 판단까지 충분히 쌓이면 질문이 미래를 향하기 시작한다.
“우리 데이터를 살 가능성이 높은 잠재고객을 찾아줘.”
“이 고객에게 제안했을 때 실패할 가능성이 높은 이유를 찾아줘.”
“과거 비슷한 고객의 성공과 실패를 비교해서 이번에는 어떤 방식으로 제안하는 것이 좋을지 알려줘.”
“그 내용을 반영해서 이 고객에게 보낼 제안서 초안을 만들어줘.”
이때 AI가 내놓는 답은 일반적인 지식만을 바탕으로 하지 않는다. 우리 회사가 실제로 고객을 만나고, 질문하고, 실패하고, 계약하고, 다시 시도하면서 축적한 경험을 바탕으로 한다. 이 차이는 시간이 지날수록 커진다.
좋은 AI 모델은 돈이 있으면 살 수 있다. 하지만 우리 회사가 지난 10년간 내린 수많은 판단의 기록은 다른 회사가 살 수 없다.
어쩌면 AI 시대의 차별화는 어떤 AI를 쓰느냐보다 그 AI가 우리 회사에서 무엇을 배울 수 있느냐에서 만들어질지도 모른다.
지혜가 다시 데이터가 된다. 정보에 나의 생각과 맥락을 더해 지식을 만들고, 여러 지식을 경험 속에서 조합하면서 지혜가 생긴다.
그런데 이제 사람이 일하면서 사용한 지혜의 흔적이 다시 데이터가 된다. 정보, 지식, 지혜, 다시 데이터, 그리고 AI, 다음 판단으로 이어진다. 다음 판단은 새로운 결과를 만들고, 그 결과는 다시 복기의 대상이 된다.
그 과정에서 계약 가능성이 높은 고객을 조금 더 빨리 찾고, 가능성이 낮은 고객에게 쓰는 시간을 줄일 수 있다. 실패 위험을 조금 더 일찍 발견하고, 고객에게 더 적합한 제안을 만들 수도 있다.
결국 데이터의 수익화는 데이터를 외부에 판매하는 것만을 뜻하지 않는다. 데이터가 더 좋은 판단을 만들고, 그 판단이 매출을 늘리거나 실패 비용을 줄이는 것도 데이터가 만들어내는 가치다.
우리는 지금까지 고객이 무엇을 샀는지, 어디에 갔는지, 열심히 데이터로 만들어왔다. 2027년에는 우리 회사 사람들은 무엇을 보고, 왜 그렇게 판단했는가를 추가로 봐야 한다.
지혜 자체는 전달하기 어렵다. 하지만 지혜가 사용된 순간은 남길 수 있다. 그것을 시스템으로 쌓으면 개인의 경험은 조직의 기억이 되고, 조직의 기억은 다른 회사가 쉽게 가질 수 없는 데이터 자산이 된다.
AI 시대에는 그 자산을 가진 회사가 더 빨리 배우고, 더 잘 판단하고, 결국 더 잘 팔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