앎과 상대성

안다는 것



1. 안다는 것의 인지에 대한 문제



타인이 알지 못하는 걸 아는 척한다고 생각이 드는 생각 그 자체가 내가 알고 있다는 생각에서 비롯된 것인데 만약 그 생각조차 타인이 보기엔 이 사람이 또한 아는게 없는데 아는 척을 하는 사람을 아는 척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어떻게 될까?


모든 앎은 상대적인게 아닐까? 결국 나 자신의 생각을 절대화하는 그 태도에서 앎의 없는 것이 앎인 척한다는 판단을 하게되는데 이러한 것은 결국 주관적이라 그러한 판단조차 다른 사람의 주관에서 또한 앎의 없는 것이라고 또 다시 판단하게 되어져버리는 것이다. 결국 이 모든 것을 반복하는 것이 세계라면 어떨까?


결국 앎이라는 것은 시대가 발전하고 지식이 한없이 민주화되며 한없이 상대적인게 되어버리는 것만은 아닐까, 왜 사람들은 자신의 앎 자체가 자명하다고만 생각하는 걸까? 그릇되어 보이는 것이 어느 순간에는 그릇된 것이지만 어느 순간에는 그것이 참이 되어 버릴지도 모르는데.




2. 반성과 담론 분석


'뭔가 알고 있다'와 '아는 척'을 실제로 무엇이 갈라내는가? 나는 사실 반성하고 있다. 그건 형이상학이 아니라 경험적이면서도 슬롯학적 질문이었다. 따라서 다시 재진술해 보겠다. 전문가와 비전문가라는 분류 자체가 앎을 반영하는 게 아니라 구성한다는 것이다. 앎의 영역은 앎이 통용된다고 승인되는 그 담론에서 규정된다. 승인성이 그것의 핵심이다.


승인되어짐이라는 것에 자명한 참과 거짓은 암묵적 준거에 의해 형성된다. 그런데 그 형성됨은 오랜 기원에서 비롯된 발언권이 작용할 수밖에 없는데, 이것이 중요하다. 여기에서 미시적인 권력이 작용한다.


승인됨과 승인되지 못함


즉, 어떤 사람이 전문가인지 비전문가인지는 단순히 지식을 반영하는 것이 아닌, 슬롯가 그 사람을 전문가라고 인정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승인 과정에는 오랜 역사, 제도, 학위, 자격, 기관 등의 발언권이 작동하며, 이것이 푸코가 말한 미시권력(micro-power)의 사례이다. 결국 앎이 먼저 있고 전문가가 되는 것이 아니라, 전문가라는 슬롯적 지위가 무엇을 앎으로 인정할지 규정한다. 권력이 앎에 선행하여 앎을 결정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