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신교동 한옥의 나지막한 기와지붕 위로 가을 해가 사선으로 기울고 있었다.
서준은 툇마루 구석에 정좌한 채, 스승 이상현이 물려준 가죽 가방 안의 보수 도구들을 하나씩 꺼내어 손끝으로 감싸 쥐었다. 대나무 칼, 미세 붓, 아교 냄새 스민 무명천. 눈으로 보지 않아도 도구들의 미세한 무게와 날의 파임까지 손가락 마디마디가 완벽히 기억하고 있었다.
"서준 씨, 태성 갤러리 경매 및 전시 일정표예요."
윤서진이 서류 한 뭉치를 툇마루 위에 내려놓았다. 서준은 고개를 살짝 비스듬히 기울였다. 오른쪽 눈의 중심부와 왼쪽 눈의 바깥쪽을 까맣게 집어삼킨 어둠 때문에, 고개를 돌려 시야의 남은 조각으로 사물을 바라보는 것이 어느덧 습관이 되어 가고 있었다.
"이번 주말, 태성 갤러리 개관 20주년 특별전이 열립니다."
서진의 목소리가 알싸하게 가라앉았다.
"메인 출품작이 명재상 이원익 선생의 '친필 서첩'과 지방 사찰에서 발견된 고려 '관음보살도'로 잡혀 있어요. 원출처는 각각 '모사본 기각품'과 '지방 사찰 100년 불화'로 들어왔는데, 불과 일주일 만에 태성 갤러리 감정팀의 정밀 복원을 거쳐 국보급 진품으로 신분이 세탁되었습니다."
"강민우가 움직인 거군요."
"네. 강민우 수석 감정위원이 직접 세척과 배접 보수를 총괄했다고 언론에 대대적으로 홍보하고 있어요. 자화자찬이 대단합니다. 전통 보수 기법과 현대 과학 공법의 완벽한 결합이라면서요."
서준은 조용히 실소했다.
진품에 가짜 껍데기를 씌워 헐값에 강탈한 뒤, 자신들의 손으로 그 껍데기를 벗겨내며 '위대한 복원'이라 칭송받는 기만. 3년 전 수장고에서 서준을 모함할 때 썼던 수법이, 이제는 놈들의 거대한 부를 창출하는 공장형 세탁 시스템으로 완벽히 정착해 있었던 것이다.
"민우 형을 만나야겠습니다."
"네? 직접 찾아가시겠다고요?"
서진이 깜짝 놀라 서준의 소매를 잡았다.
"위험해요! 태성 갤러리는 수십 명의 사복 용역을 거느리고 있고, 문화재청 상층부와 정경계 고위 인사들까지 얽혀 있어요. 서준 씨가 나타나면 또다시 억울한 누명을 씌워 매장하려 할 겁니다!"
"도망칠 곳은 더 이상 없습니다, 윤 조사관님."
서준은 자신의 가늘고 딱딱한 손가락을 가만히 어루만졌다.
"그 불화와 서첩에는 제 손끝으로 확인한 민우 형의 음각 낙관과 특수 배접 수지가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놈들이 세상을 속이기 전에, 그 가짜들의 탑 한복판에서 민우 형의 눈을 똑바로 마주해야 합니다."
이틀 뒤, 서울 강남의 한복판에 위치한 태성 갤러리 본관.
웅장한 유리와 대리석으로 둘러싸인 미술관 안은 상류층 컬렉터들과 미술계 명사들, 그리고 취재진으로 북적이고 있었다. 화려한 샹들리에 불빛 아래, 고급 턱시도와 드레스를 입은 인사들이 와인 잔을 들고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전시장 한복판, 가장 화려한 조명이 내리쬐는 유리 수장관 안에 오늘 밤의 메인 출품작인 <이원익 친필 서첩>과 고려 <관음보살도>가 우아한 자태로 전시되어 있었다.
"보시다시피, 세월의 때에 덮여 가치가 묻혀 있던 유물들이 저희 태성 갤러리의 정밀 보수 공정을 거쳐 제 빛을 되찾았습니다."
수수한 명품 정장에 세련된 뿔테 안경을 쓴 단정한 사내가 기자단 앞에서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설명하고 있었다.
강민우.
3년 전 스승의 문하에서 서준과 함께 먹을 갈던 그 풋풋했던 동문 형은 온데간데없었다. 세련된 언변과 관록, 그리고 미술품 경매계의 신성이라 불리는 자의 오만함이 그를 완벽하게 둘러싸고 있었다.
"강 위원님! 전통 보수 기법으로 이처럼 완벽하게 아교 때를 벗겨낸 비결이 무엇입니까?"
기자의 질문에 강민우는 부드럽게 웃으며 대답했다.
"장인 정신이란 단순히 옛것을 고수하는 것이 아닙니다. 정직하게 유물의 숨결을 읽어내고, 현대적 과학 공법으로 그 진실을 밝혀내는 것이죠. 거짓과 위작은 결코 진짜의 결을 따라올 수 없습니다."
"거짓과 위작은 진짜의 결을 따라올 수 없더라……."
기자들의 감탄사 사이를 뚫고, 차갑고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전시장 뒤편을 사정없이 갈랐다.
강민우의 표정이 순간 미세하게 경련했다. 기자들과 귀빈들의 시선이 일제히 전시장 입구 쪽으로 쏠렸다.
구겨진 야상 점퍼 차림에 낡은 가죽 가방을 어깨에 메고 서 있는 사내. 시력을 잃어가는 탓에 고개를 비스듬히 기운 채, 남은 왼쪽 눈의 조각으로 강민우를 똑바로 노려보고 있는 서준이었다.
전시장 안에 가벼운 동요가 일어났다. 미술계 관계자 몇몇이 서준의 얼굴을 알아보며 나지막하게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저 사람…… 3년 전 수장고 위작 사건의 서한별 아닌가?"
"횡령범으로 매장당했던 그 보수사잖아? 여기가 어디라고 감히 들어와?"
강민우는 수건으로 손을 가볍게 닦은 뒤, 경호원들에게 손짓하여 접근을 막았다. 그의 눈빛에 순간적으로 스쳐 지나간 것은 당혹감이 아닌, 깊은 서글픔과 차가운 경멸이 섞인 기묘한 감정이었다.
"오랜만이다, 서준아."
민우는 기자들을 향해 양해를 구한 뒤, 서준을 향해 조용히 걸어 나왔다.
"지하 골방에서 족자나 때를 벗기며 조용히 사는 줄 알았더니, 얽힐 수 없는 자리에 나타났구나."
"형의 그 가짜 복원 쇼를 보러 왔어."
서준은 가죽 가방에 손을 대며 민우의 눈을 직시했다.
"100년 된 사찰 불화 위에 칠해진 주사 안료와, 이원익 서첩 표면에 입혀진 에폭시 코팅제. 3년 전 날 매장시킬 때 썼던 그 수법으로 세상을 또 속이고 있더군."
강민우의 눈썹이 살짝 뒤틀렸다. 민우는 나지막하게 한숨을 내쉬며 서준의 어깨를 지그시 눌러 잡고, 관람객들의 시선이 닿지 않는 VIP 접견실 복도로 그를 이끌었다.
"착각하지 마라, 서준아."
단둘만 남게 된 서늘한 복도에서 강민우의 목소리가 차갑게 얼어붙었다.
"세상이 열광하는 건 '정직한 보수' 따위가 아니다. 저 사람들은 오직 스토리와 화려한 겉껍데기, 그리고 소장 가치라는 자본의 이름에 돈을 지불할 뿐이야."
"그래서 진품을 가짜로 만들어 강탈하고, 동문의 삶을 도륙했나?"
서준의 목소리가 분노로 떨려왔다.
"우리가 스승님 밑에서 배운 게 고작 이 따위 사기극이었어?!"
강민우는 서준의 고개 기울어진 자태와 빛을 잃어가는 오른쪽 눈동자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민우의 눈가에 비틀린 실소가 번졌다.
"너는 아직도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스승님이 왜 3년 전 너를 버리고 눈을 감으셨는지, 내가 왜 이 자리에 서 있는지."
민우가 서준의 가슴팍을 손가락으로 콕 찍었다.
"네가 품고 있는 그 정직함이란 건, 돈 없고 힘없는 장인의 가난한 핑계일 뿐이다. 당장 여기서 나가라. 한 번만 더 내 사업에 초를 치면, 그땐 제명에 못 죽을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