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끝에 닿은 빛 (觸光)》

소설

by산들강바람

第4章 : 묵향(墨香) 뒤의 진실 — [後半部]


서준은 한동안 말을 잊은 채 이원익 선생의 서첩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누런 고지(古紙) 위로 도도하게 흘러간 먹선은 언뜻 보기에도 조선 초의 기개가 서려 있었다. 하지만 관관청 감정단이 모사본이라 판정하며 찍어 누른 차가운 불합격 도장이 첫 장 구석에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서준 씨…… 부탁드립니다."


윤서진의 목소리에는 떨림이 섞여 있었다. 문화재청의 외딴 변두리로 밀려나면서도 진실을 좇아온 젊은 조사관의 눈빛. 그 눈빛은 3년 전, 아무도 자신의 말을 들어주지 않던 수장고 바닥에서 절망에 빠져 있던 서준 자신의 모습을 거울처럼 비추고 있었다.


서준은 마른 입술을 적시며 천천히 손을 내밀었다.


손가락 끝이 400년 된 고지의 까칠한 표면에 닿는 순간, 뇌수를 짓누르는 안통(眼痛)이 사정없이 들이쳤다.


'읏……!'


서준은 이를 악물었다. 오른쪽 눈 시야의 절반을 가로막고 있던 검은 먹구름 잔상이 또다시 사납게 요동쳤다. 이번에는 왼쪽 눈의 시야마저 바깥쪽 가장자리부터 찌그러지며 사물의 윤곽이 겹쳐 보이기 시작했다.


진실을 얻는 대가로 자신의 눈을 바치는 잔혹한 거래.


그러나 서준은 손가락을 거두지 않았다. 400년 세월 동안 배접지 사이로 침투한 묵향의 결정체들이 서준의 굳은살을 타고 신경을 흔들어 놓았다. 서준은 길게 숨을 내쉬며 네 번째 '안목(眼目)'을 열었다.


'파잇――!'


은빛 전율이 온 신경을 관통했다.


서준의 눈앞에서 서첩의 장엄한 비단 바탕이 겹겹이 분해되기 시작했다. 돋보기로도 볼 수 없는 먹물의 침투 깊이와 먹의 나이, 그리고 한지 섬유의 결이 촉각을 매개로 삼아 선명한 수채화처럼 뇌리 속에서 재현되었다.


"이건 모사본이 아닙니다."


서준의 낮고 단정한 목소리가 정적을 깼다.


"네? 하지만 감정단에서는 후대의 모사라고……."


"글씨의 표면만 본 자들의 착각입니다."


서준은 서첩의 세 번째 장, 글씨가 가장 밀도 있게 그어진 한자 구석을 가리켰다.


"이 서첩은 이원익 선생의 친필이 맞습니다. 다만, 누군가가 글씨 표면에 미세한 화학 코팅제를 바르고, 그 위에 후대의 모사본처럼 보이도록 조잡한 먹을 덧칠해 놓았습니다."


"뭐라고요? 진품을 일부러 모사본처럼 보이게 만들었다고요?"


윤서진이 깜짝 놀라 몸을 바짝 끌어당겼다.


"그렇습니다. 진짜를 가짜로 낙인찍어 문중에서 포기하게 만든 뒤, 헐값에 사들여 코팅제를 세척해 내고 제값에 팔아넘기려는 전형적인 '신분 세탁' 수법입니다."


서준은 손끝으로 서첩 바탕면의 아주 미세한 유화막을 쓸어내렸다.


"그리고 이 코팅제의 성분…… 감은사 불화의 겉면에 칠해져 있던 에폭시 아교와 정확히 같은 재료입니다. 태성 갤러리가 문화재를 빼돌리는 공식적인 루트가 바로 이 방식이었던 겁니다."


윤서진은 주먹을 단단히 움켜쥐었다. 그녀의 각진 안경알 너머로 서글픔과 격분에 차오른 눈물이 고였다.


"역시…… 국가 감정단 내부에도 카르텔의 끄나풀이 있었군요. 진짜를 가짜로 만들고, 가짜를 국보로 만들어 세상을 속여왔던 거예요."


서진이 벅찬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서준의 손을 잡으려던 그 순간,


'털썩―!'


서준이 중심을 잃고 툇마루 바닥으로 비틀거리며 쓰러졌다.


"서준 씨!"


서진이 비명을 지르며 서준을 부축했다. 서준의 두 눈에서는 차가운 눈물과 함께 붉은 진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왼쪽 눈의 시야마저 가장자리가 어둡게 꺼져 들어가며, 눈앞에 선 윤서진의 얼굴이 가뭇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괜찮으십니까? 눈에서 피가…… 당장 병원으로 가야 해요!"


"아닙니다……."


서준은 떨리는 손으로 윤서진의 팔을 거절하며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이건 병원에서 고칠 수 있는 눈이 아닙니다."


서준은 가쁜 숨을 내쉬며 툇마루 기둥을 잡고 가까스로 몸을 일으켰다.


오른쪽 눈의 절반, 그리고 왼쪽 눈의 가장자리가 검은 어둠으로 먹혀 들어간 상태. 이제 그는 고개를 똑바로 들지 않으면 사물의 형태조차 제대로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시력을 잃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그 가혹한 어둠 속에서도 서준의 손끝은 이원익 선생의 서첩과 스승의 낡은 가방을 놓지 않고 있었다.


"윤 조사관님."


서준의 목소리는 비참했지만, 그 안에 담긴 의지만은 단단한 암반처럼 묵직했다.


"태성 갤러리의 강민우는 지금 이 순간에도 사찰과 문중의 진짜 문화재들을 가짜로 낙인찍어 유출하고 있을 겁니다. 그리고 제게 덮어씌운 3년 전의 누명 역시 그 수법으로 완성되었겠지요."


서준은 어두워진 시야를 뚫고 윤서진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제가 이 손끝으로 놈들의 가짜 탑을 완전히 부숴버릴 때까지…… 절 믿고 이 증거들을 기록해 주시겠습니까?"


윤서진은 손끝이 하얗게 질리도록 주먹을 쥐며, 눈물을 닦아내고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서준 씨. 제 직을 걸고, 그리고 사범단의 조사관으로서 당신의 손끝이 밝혀낸 진실을 끝까지 세상에 증명하겠습니다."


혜화동 한옥 마당의 은은한 햇살 아래, 시력을 바쳐 진실을 좇는 보수사 서준과 정직한 조사관 윤서진의 거룩한 동행이 마침내 시작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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