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끝에 닿은 빛 (觸光)》

소설

by산들강바람


第1章 : 찢겨진 비단 (破絹) — [前半部]


칠흑 같은 침묵이 흐르는 방 안에는 오직 고요한 붓질 소리와 낡은 조명등의 야속한 미등만이 낮게 웅크리고 있었다.


서울 종로구 혜화동의 한적한 골목 안쪽, 이끼 낀 붉은 벽돌 건물 지하에는 간판조차 없는 자그마한 표구 작업실이 숨어 있었다. 계단을 타고 내려오는 음습한 흙내음과 오랜 세월 동안 한지에 배어든 고서의 묵향(墨香), 그리고 아교(阿膠) 끓이는 냄새가 한데 엉켜 공기 중에 아득하게 감돌았다.


작업대 앞, 조그만 주황색 알몸 전구 하나가 위태롭게 흔들리는 불빛 아래 한 사내가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서준.


서른두 살의 나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그의 두 눈 밑에는 짙은 그늘이 그어져 있었고, 손가락 마디마디는 오랫동안 물을 다루고 삼포를 갈아낸 탓에 마른 나뭇가지처럼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그의 손에는 수십 년 동안 손때가 묻어 윤이 나는 자그마한 전통 竹칼(대나무 칼)이 쥐어져 있었다. 작업대 정반 위에는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누렇게 변색되고 곰팡이가 슬어 삭아버린 조선 후기의 낡은 사대부 문중 영정 한 점이 누워 있었다.


서준은 숨을 죽인 채, 대나무 칼끝을 영정 표면 0.1밀리미터 틈새로 살그머니 밀어 넣었다.


'스윽, 슥…….'


오래되어 바슬거리는 배접지(비단을 보강하기 위해 뒤에 붙이는 한지)와 비단 본래의 결 사이를 갈라내는 작업이었다. 조금이라도 손끝이 흔들려 날이 비단 결을 파먹는 순간, 수백 년을 견디어 온 고화(古畫)는 흔적도 없이 사정없이 찢겨 나가 버린다.


서준의 이마에서 흘러내린 차가운 땀방울이 턱끝에 위태롭게 맺혔다. 그러나 그의 손끝은 단 0.01밀리미터의 오차도 없이, 마치 잘 길들여진 수술도 처럼 정직하고 미세하게 한지와 비단의 결을 갈라내고 있었다.


이곳 지하 표구소의 습하고 차가운 공기는, 불과 3년 전 그가 모든 것을 잃었던 그 참혹했던 날의 기억을 가뭇없이 불러일으켰다.


3년 전, 서울 인사동의 중심에 위치한 국립 미술품 보수 수장고.


당시 스물아홉의 서준은 대한민국 전통 회화 보수계의 최고 거장인 '운곡(雲谷) 이상현' 대목수의 수제자이자, 업계에서 가장 촉망받는 젊은 보수사였다. 그의 손을 거쳐 간 조선 시대 혜원 신윤복의 그림이나 겸재 정선의 산수화는 본래의 빛을 잃지 않으면서도 세월의 깊이를 오롯이 품어낸다는 찬사를 받았다.


그날은 스승 이상현의 지휘 아래, 개인 소장가가 수십억 원을 주고 사들여 세상에 공개된 조선 후기 관관 화가 겸재의 미공개 대작, <경교명승첩(京郊名勝帖)>의 일부를 최종 보수하여 국가 지정 문화재로 등록하기 직전의 날이었다.


서준은 석 달 밤을 새우며 찢어진 비단 결을 하나하나 세실(細絲)로 엮어내었고, 스승에게 물려받은 천연 석채(石彩) 안료를 갠 붓으로 은은하게 색을 맞춰 복원해 냈다.


"역시 서준이 네 솜씨다."


보수를 마친 그림을 내려다보며, 옆에 서 있던 스승의 또 다른 제자이자 서준의 동문 형인 강민우가 감탄 어린 얼굴로 서준의 어깨를 뚝뚝 쳤다.


"이 정도로 완벽하게 결을 맞추다니. 스승님께서도 네게 이 작업을 맡기길 잘했다고 하실 게다. 내일 문화재 감리위원회만 통과하면, 네 이름은 이제 대한민국 최고 보수사의 반열에 오르는 거야."


"아닙니다, 민우 형. 형이 바탕 배접지를 깔끔하게 떼어내 주신 덕분입니다. 스승님이 가르쳐주신 대로 바탕의 결을 건드리지 않으려고 노력했을 뿐이에요."


서준은 피곤함 속에서도 환하게 웃어 보였다. 강민우는 스승 이상현의 문하에서 서준과 함께 10년 넘게 고락을 함께해 온 동료이자, 친형제보다 더 의지하던 인물이었다. 민우는 세련된 수완과 교제 술로 문하의 대외적인 행정과 감정위원들과의 교류를 맡았고, 서준은 작업실 깊은 곳에서 묵묵히 붓과 칼을 쥐며 보수 작업에만 전념해 왔다.


그러나 그 이튿날 아침 찾아온 것은 영광이 아닌, 지옥의 문이었다.


"이 그림은 가짜다! 전형적인 현대산 합성 안료로 덮어씌운 모조품이야!"


국가 문화재 감정위원회의 원로 위원장이자 업계의 절대 권력자로 불리는 '권장생' 박사가 돋보기를 내려놓으며 호통을 쳤다.


현장은 순식간에 차가운 정적에 휩싸였다. 쏟아지는 기자들의 카메라 플래시와 감정위원들의 수군거림 속에서, 서준은 멍하니 자신이 다듬었던 <경교명승첩>을 바라보았다.


감리단의 특수 자외선 투시경과 미세 화학 시약이 비단 표면에 대어지는 순간, 어제까지만 해도 은은한 천연 석채의 빛을 뿜어내던 그림의 주요 결구 부위에서 가혹한 푸른색 반응이 일어났다. 그것은 현대에 쓰이는 화학 합성 아크릴 물감과 위조용 과산화수소 착색제 반응이었다.


"이, 이럴 리가 없습니다!"


서준이 사시나무 떨듯 떨며 앞으로 엎드려 외쳤다.


"제가 쓴 안료는 스승님께서 주신 전통 천연 석채뿐이었습니다! 배접지 역시 300년 된 고지를 썼습니다! 제가 현대 안료를 쓸 이유가 없습니다!"


"그럼 이 시약 반응은 대체 뭐란 말인가!"


권장생 위원장이 정색을 하며 서준의 가슴팍에 위조 감정서를 내던졌다.


"자네가 공명심에 눈이 뒤집혀, 찢어진 진품 비단 부위를 떼어내고 그 자리에 현대산 합성 안료로 그린 가짜 비단을 짜깁기해 넣은 거 아닌가! 진품의 원본 비단 조각은 어디로 빼돌렸나!"


"빼돌리다니요?! 아닙니다! 저는 그런 적이 없습니다!"


서준은 도와달라는 절박한 눈빛으로 스승 이상현과 옆에 서 있던 강민우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스승 이상현은 차가운 표정으로 눈을 감은 채 아무런 말이 없었고, 강민우는 억울하고 슬픈 표정을 지으며 서준의 손을 잡고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서준아…… 네가 아무리 보수비에 목이 말랐어도 그렇지, 어떻게 스승님과 문하의 이름을 팔아 진품 자재를 빼돌리고 가짜를 짜깁기할 수 있느냐……."


"형?!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형도 알잖아! 내가 밤새워서……!"


"그만해라!"


스승 이상현의 무겁고 거친 목소리가 수장고 안을 갈랐다. 스승의 깊게 패인 눈골 사이로 차가운 수치심과 분노가 스쳐 지나갔다.


"네놈이 내 밑에서 10년을 배우고도 탐욕에 눈이 멀어 문화재를 도륙하고 거짓을 덮어씌웠단 말이냐. 오늘부로 내 문하에서 네놈의 이름을 파낸다. 다시는 내 눈앞에 나타나지 마라."


그 한마디로 서준의 인생은 완벽하게 분쇄되었다.


태성 갤러리와 권장생 위원장이 주도한 악의적인 언론 보도와 위조된 횡령 및 문화재 손괴 혐의로 인해, 서준은 보수사 자격 정지는 물론 법원에서 집행유예 선고를 받으며 업계 전체에서 철저히 매장당했다. 동기들과 문하생들은 그를 '탐욕에 눈이 멀어 문화재를 도륙한 불량 보수사'로 손가락질하며 피했다.


그가 목숨처럼 아끼던 붓과 보수 도구들은 경매 압류 딱지가 붙어 길거리에 던져졌고, 스승의 문하에서 쫓겨난 서준에게 남은 것은 단 돈 몇 푼과 범죄자라는 가혹한 주작의 꼬리표뿐이었다.


정직함을 지키려 했던 청년의 10년 노동은 자본과 권력이라는 거대한 칼날 아래 참혹하게 도륙당했고, 서준은 아무도 찾지 않는 이 지하 표구점의 어둠 속으로 스스로를 유배시켰다.


'스아아…….'


지하 작업실의 차가운 밤바람이 주황색 알몸 전구를 흔들었다.


서준은 과거의 끔찍한 기억을 털어내려는 듯, 눈을 꽉 감았다가 천천히 떴다. 손에 쥐어진 대나무 칼끝이 낡은 영정의 비단 표면 위에서 멈추어 있었다.


"후우……."


서준은 마른침을 삼키며 아랫배로 길게 숨을 내쉬었다.


3년이 지났지만, 그를 향한 세상의 손가락질과 억울함은 가슴속 깊은 곳에서 검은 응어리가 되어 굳어 있었다. 서준은 손가락 마디마디의 굳은살을 쓸어내리며, 정반 위에 누워 있는 낡은 영정을 향해 다시 대나무 칼을 대었다.


바로 그때였다.


지하 표구실로 내려오는 삐걱거리는 목조 계단 위에서 둔탁한 구두 소리가 정적을 깨며 들려왔다.


'뚜벅, 뚜벅, 뚜벅…….'


이 늦은 시각에 자신 같은 매장당한 보수사를 찾아올 손님은 없었다. 서준은 손에 쥔 대나무 칼을 고쳐 쥐며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계단 어둠 속에서 조그만 체구에 허리가 약간 굽은 노인 한 명이 낡은 사내용 트렌치코트를 입고 내려오고 있었다. 인사동 골동품 거리 구석에서 작은 고미술 상점을 운영하며 서준의 사정을 유일하게 알고 가끔 잡일을 맡겨주던 '황 노인'이었다.


황 노인의 품에는 보자기로 겹겹이 싸인 길쭉한 틀 하나가 들려 있었다.


"……황 어르신? 이 밤중에 어쩐 일이십니까."


서준이 나지막하게 묻자, 황 노인은 혀를 쯧 차며 품에 안고 있던 보자기를 작업대 위에 툭 소리가 나도록 내려놓았다.


"서 군. 자네한테 급히 부탁할 물건이 하나 들어왔네."


"저는 이제 문화재나 명화 보수 일은 하지 않는다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그저 낡은 유화 액자나 상장 틀이나 갈아주는 게 제 일입니다."


"알아, 아네. 하지만 이 물건은 사정이 좀 달라."


황 노인이 보자기를 풀어내자, 세월의 때가 시꺼멓게 앉은 나무틀 안에 갇힌 낡은 관음보살도(觀音菩薩圖) 한 점이 모습을 드러냈다.


"지방의 작은 사찰인 감은사에서 올라온 불화라네. 절이 재정난으로 어려워져 사찰에 대대로 내려오던 이 보살도를 고미술 시장에 내놓으려고 가져왔는데, 표구 상태가 너무 엉망이라 손을 좀 봐야겠어. 절 스님이 자네 소문을 어렴풋이 듣고 꼭 자네 손으로 때를 벗겨내 달라고 신신당부하더군."


서준은 묵묵히 불화를 내려다보았다.


붉은색 단청 안료가 가뭇없이 바래져 있었고, 표면은 촛농과 향 연기에 그을려 검게 문드러져 있었다. 한눈에 봐도 족히 100년은 넘어 보이는 조선 말기의 흔한 지방 사찰 불화처럼 보였다.


"어르신, 전 이제 그런 일을 할 자격이 없습니다."


"자격 따위는 개나 주라고 해!"


황 노인이 툇마루 의자에 털썩 앉으며 쇳소리를 냈다.


"내 3년 전 자네가 억울하게 누명을 쓴 걸 안다네. 운곡 이상현 영감 밑에서 가장 정직하게 붓을 쥐던 청년이 이렇게 지하 골방에서 썩어가는 꼴을 보면 가슴이 찢어져. 이건 돈을 벌자는 게 아니야. 불쌍한 시골 절 스님의 마지막 소원이라 생각하고, 단청 때나 좀 털어내주게."


서준은 황 노인의 묵직하고 따스한 눈빛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세상 모두가 자신을 '범죄자'라 부를 때, 이 산전수전 다 겪은 골동품상 노인만큼은 서준의 정직한 손끝을 믿어주고 있었다.


서준은 한숨을 내쉬며 낡은 대나무 칼과 미세 붓을 집어 들었다.


"……알겠습니다. 겉면의 촛농과 때만 털어내 드리겠습니다."


"고맙네, 서 군. 내 내일 아침 일찍 다시 올 테니 수고해 주게."


황 노인은 서준의 어깨를 뚝뚝 치고는 계단을 따라 위로 올라갔다. 지하 표구실에는 다시금 묵직한 정적과 주황색 미등 불빛만이 남겨졌다.


서준은 작업대 위에 누운 낡은 관음보살도 앞으로 다가섰다.


그는 돋보기를 눈에 대고, 손에 쥔 정밀 핀셋과 미세 붓 끝에 알코올을 살짝 묻혀 관음보살의 얼굴 부분에 엉겨 붙은 검은 촛농 표면을 천천히 긁어내기 시작했다.


'슥, 슥, 슥…….'


정직한 마찰음이 고요한 지하의 공기를 두드렸다. 서준은 자신의 가슴속에 아려오는 오만 가지 잡념을 비워내고, 오직 불화의 표면에 남아 있는 안료의 결에 모든 감각을 집중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핀셋 끝이 관음보살의 눈썹 부근, 붉은 주사(朱砂) 안료와 검은 먹선이 교차하는 미세한 0.1밀리미터 틈새를 가만히 쓸어내리던 그 찰나.


'파아 아앗――!'


서준의 뇌리를 강렬하게 찌르는 서슬 퍼런 전율이 온몸의 신경을 관통했다.


망막 깊은 곳에서 정체 모를 은빛 파문이 사방으로 번져나가더니, 지하 표구실의 어스름한 시야 전체가 마치 투시경으로 들여다보듯 판이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앗?!"


서준은 저도 모르게 헛숨을 삼키며 손에 쥐고 있던 핀셋을 떨어뜨릴 뻔했다.


눈앞에 누워 있는 낡은 관음보살도.


조금 전까지는 그저 촛농과 연기에 그을린 투박한 지방 사찰 불화에 불과했던 그림의 내부가, 서준의 눈앞에 겹겹이 층을 이룬 투명한 구조화처럼 환하게 들여다보이기 시작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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