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서한별은 스승이 넘겨준 감나무 먹통을 받아 들었다.
손때가 오롯이 묻은 나무 몸통은 생각보다 무겁고 묵직했다. 먹물에 젖은 실타래에서 피어오르는 그윽하고 그을린 먹향(墨香)이, 도심의 매캐한 쇳가루 냄새로 마비되어 있던 그의 코끝을 깨끗하게 씻어 내렸다.
그의 앞에는 제 몸을 비틀며 성장한 굽은 샛기둥 감 소나무 한 토막이 누워 있었다. 태풍을 견디느라 결이 꼬이고 표면이 요철로 가득한, 야생의 고집을 그대로 품은 나무였다.
'공학 수식으로는 기둥의 중심축을 잡으려면 삼차원 좌표를 계산해야 한다. 하지만 전통 먹줄은 그 어떤 복잡한 굴곡도 단 하나의 직선으로 통섭(統涉)해낸다.'
한별은 먹칼을 소나무 끝 단면에 깊숙이 꽂았다. 그리고 먹실을 천천히 뽑아내며 반대편으로 걸어갔다.
먹실이 소나무의 거친 표면을 스치며 드르륵거리는 소리를 냈다. 한별은 무릎을 꿇고 앉아 먹실을 팽팽하게 당겼다. 그러나 손가락 마디마디의 상처와 손떨림 탓에, 당겨진 먹줄이 미세하게 흔들리며 소나무 표면 위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고 파르르 떨렸다.
"손끝에 마음의 욕심이 들어갔구나!"
진광의 차가운 목소리가 등 뒤에서 꽂혔다.
"나무의 휨을 네 눈으로 교정하려 하지 마라. 먹줄은 나무의 겉모습을 베어내는 칼이 아니라, 나무가 품은 숨겨진 중심을 찾는 눈이다. 네 안의 불안과 분노를 털어내지 않으면 그 먹선은 갈라지고 왜곡될 뿐이다."
한별은 눈을 감았다.
임 이사의 비아냥거리던 얼굴, 차가운 진흙탕 바닥에 처박혔던 수치심, 그리고 억울하게 매장당했던 지난날의 울분이 가슴속에서 밀물처럼 치밀어 올랐다. 그는 길게 숨을 내쉬며 가슴속의 검은 응어리들을 산골의 차가운 바람 속으로 천천히 내뱉었다.
어깨의 힘을 빼고, 오직 자신이 마주한 소나무의 결과 먹실의 정직한 장력에만 모든 감각을 집중했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손가락의 떨림이 멈추었다. 팽팽하게 당겨진 먹실을 통해, 소나무 고목의 무거운 침묵과 먹통 속 먹물의 은은한 파동이 한별의 손끝으로 고스란히 전달되어 왔다.
한별은 먹줄의 한복판을 집어 올렸다.
엄지손가락 끝으로 느껴지는 먹실의 팽팽한 저항. 그것은 자본과 타협하지 않고, 부실공사의 위협 앞에서도 끝내 굽히지 않았던 자신의 정직한 소신과 닮아 있었다.
'딱――!'
맑고 단정한 찰나의 마찰음이 온 작업장을 찰지게 울렸다.
흩날린 먹물 방울들이 눈발처럼 허공에서 파문을 일으키고, 마침내 굽은 소나무의 표면 위로 단 한 치의 오차도 없는 검고 굵은 먹선 하나가 선명하게 그어졌다. 휜 나무의 겉모습에 개의치 않고, 그 중심을 단호하게 꿰뚫어 낸 완벽한 정선(正線)이었다.
"……호오."
툇마루에 서서 가만히 이를 지켜보던 진광의 깊은 눈매에 미세한 경련이 일었다.
단 한 번의 시도. 스승의 가르침을 받아들여 제 안의 번뇌를 털어내고 그어낸 먹선에는, 기술을 넘어선 청년의 바르고 단단한 영혼의 궤적이 오롯이 새겨져 있었다.
진광은 소나무 기둥으로 걸어와 한별이 그어놓은 먹선을 가만히 쓸어내렸다. 손가락 끝에 검은 먹물이 묻어났지만, 진광의 입가에는 오래전에 사라졌던 옅은 미소가 조용히 피어올랐다.
"줄의 튕김에 주저함이 없구나. 네 안의 바른 결이 먹줄을 타고 나무로 들어갔어."
"어르신……."
"기억하거라, 한별아."
진광이 한별의 어깨를 묵직하게 짚으며 나지막이 말했다.
"먹줄을 튕긴다는 것은 단순한 작업이 아니다. 이 검은 선은 목수가 나무에게 내리는 첫 번째 명령이자, 평생 이 건물을 지탱할 대지와의 거룩한 약속이다. 세상이 아무리 편법과 거짓으로 빠르고 화려한 집을 지으라 유혹할지라도, 목수는 자신이 튕긴 이 검은 먹선 하나만을 믿고 가야 하는 법이다."
"예, 마음에 깊이 새기겠습니다."
저무는 산골의 햇살이 작업장 지붕 너머로 아련하게 스며들었다.
소나무 기둥 위에 그어진 검은 먹선은 황금빛 노을을 받아 마치 은은하게 타오르는 은하수처럼 깊은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쇳가루와 거짓의 먼지를 털어낸 서한별의 손에는, 이제 스승에게 물려받은 정직한 먹통과 먹줄이 단단하게 쥐어져 있었다. 벼랑 끝에서 시작된 젊은 대목수의 삶이, 마침내 대지 위에 가장 바르고 거룩한 첫 번째 선을 그리며 서서히 기지개를 켜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