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第1章 : 벼랑 끝의 손 (懸崖) — [前半部]
빗물인지 기름때인지 알 수 없는 시큼하고 차가운 액체가 서한별의 이마를 타고 내려와 눈꺼풀을 찔렀다.
서울 도심 한복판, 태산건설이 사운(社運)을 걸고 추진하던 초고층 복합 타워 건설 현장은 장마철의 장대비 속에서 거대한 무덤처럼 웅크리고 있었다. 타워크레인의 쇠줄이 번개에 울려 퍼질 때마다 피처럼 붉은 현장 등빛이 빗줄기를 사정없이 찢어발겼다.
"서 소장! 어이, 서한별이!"
시끄러운 엔진 소음을 뚫고 현장 출입구 쪽에서 현장 총괄이사 임태성의 목소리가 찢어지듯 날아왔다. 명품 코트 위에 노란 우비를 대충 걸쳐 입은 임 이사는 구두에 흙물이 튀는 것이 짜증 난다는 듯 연신 혀를 차며 한별의 앞으로 바짝 다가섰다.
"너 지금 제정신이야? 내일 아침에 국토부 감리단하고 회장님 오셔서 테이프 커팅식 하셔야 해! 그런데 지하 3층 서쪽 내력벽 콘크리트 타설을 멈춰? 네가 감히 회사 목줄을 쥐고 흔들겠다는 거야, 뭐야!"
한별은 손에 쥐고 있던 균열 측정기를 악물듯 움켜쥐었다. 안전모 아래로 드러난 그의 얼굴은 며칠 밤을 지새운 탓에 흙빛으로 까칠하게 말라붙어 있었지만, 두 눈만큼은 화염처럼 이글거리고 있었다.
"이건 타설을 진행할 단계가 아닙니다, 이사님."
한별의 목소리는 빗소리 사이로 낮고 단단하게 깔렸다.
"지하 3층 핵심 내력벽 자재로 들어온 철근, 기존 설계안인 SD500 고강도 철근이 아닙니다. 중국산 재활용 저가 철근에, 인장 강도 시험 성적서까지 완전히 위조된 가짜입니다. 이 상태에서 위로 수십 층의 콘크리트를 퍼부으면 바닥 판 전체가 하중을 견디지 못하고 펀칭 파괴(Punching Shear)로 무너집니다. 사람 죽이는 공사입니다!"
"이 새끼가 진짜 세상물정 모르고 세상 편하게 소리 하고 있네!"
임 이사는 소리를 지르며 한별의 가슴팍을 세게 밀쳐냈다. 한별의 몸이 진흙탕 속으로 휘청이며 물보라가 튀었다.
"철근 성적서? 그거 내가 도장 찍어서 통과시킨 거야! 네가 뭔데 본사 승인까지 끝난 자재를 가지고 이래라저래라 지랄이야? 넌 그냥 우리가 시키는 대로 시멘트나 부어 넣고 도장이나 찍으면 돼! 흙수저 출신 건축공학과 놈 하나 불쌍해서 과장, 소장까지 속성으로 달아줬더니 은혜를 원수로 갚아?"
한별은 비틀거리는 몸을 추스르며 천천히 일어섰다. 장화 사이로 스며든 시린 흙물이 발가락 마디마디를 얼려버릴 듯 시려왔다. 그는 빗물에 젖은 서류 봉투 하나를 품 안에서 꺼내 임 이사의 가슴에 팍 소리가 나도록 문질렀다.
"이게 지하 내력벽 구조 계산서입니다. 감리단에 직접 전달할 겁니다. 제가 이 현장의 총괄 안전 바카라임 소장입니다. 제 손으로 사람 목숨을 담보로 한 부실 공사 서류에 도장 찍을 수는 없습니다."
"……너, 정말 끝까지 가보겠다는 거지?"
임 이사의 얼굴에서 비아냥거리던 웃음기가 한순간에 사라졌다. 대신 그 자리를 채운 것은 살기 어린 차가움이었다. 임 이사는 빗물에 젖은 서류 봉투를 툭툭 터는 척하더니, 가뭇없이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현장 어둠 속에서 거대한 체구의 용역 인부 서너 명이 다가왔다.
"서 소장, 세상이 그렇게 네 뜻대로 정직하게 돌아가는 줄 알아? 소나무는 곧게 자라면 가장 먼저 베여 나가고, 사람은 곧게 굴면 가장 먼저 부러지는 법이야. 넌 오늘부로 이 현장 소장이 아니다. 비리 자재를 독단적으로 청구하고 시공사에 뇌물을 요구하다 걸린 불량 소장이지."
"뭐라고……?"
"네 바카라상에 이미 네 명의로 된 뇌물 수수 통장하고 회사 공금 횡령 서류 다 넣어뒀다. 감리단? 국토부? 네가 경찰서 가서 횡령죄로 조사받는 동안, 공사는 깔끔하게 끝날 테니 걱정 마라."
"이 개새끼들이!"
한별이 울분을 참지 못하고 임 이사의 빌미를 잡으려 돌진했으나, 용역 인부들의 억센 손아귀가 한별의 양팔을 뒤로 꺾어 눌렀다. 진흙탕 바닥에 얼굴이 박히며 차가운 오수가 입안으로 사정없이 쏟아져 들어왔다. 안전모가 벗겨져 빗물 속으로 굴러갔다.
"치워라. 다시는 이 건설판에 발도 못 붙이게 매장시켜."
임 이사의 냉정한 구두 소리가 빗소리 속으로 멀어져 갔다. 한별은 차가운 진흙탕 바닥에 처박힌 채, 자신이 바쳤던 십여 년의 정직한 땀방울이, 밤을 지새우며 공학 수식을 계산하던 정직한 건축의 꿈이 자본이라는 거대한 칼날 아래 참혹하게 도륙당하는 것을 무기력하게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사흘 후.
한별의 삶은 완벽하게 분쇄되었다.
태산건설이 퍼뜨린 악의적인 언론 보도와 위조된 횡령 혐의로 인해, 한별은 건축사 자격증 정지는 물론 업계 전체에서 완전히 매장당했다. 동기들은 그를 피했고, 그가 지키려 했던 안전의 가치는 '개인의 탐욕으로 인한 공사 방해'라는 가혹한 주작 아래 철저히 짓밟혔다.
재판을 기다리는 동안 보석으로 풀려난 한별의 손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원룸의 월세는 밀려 있었고, 통장은 압류되었으며, 그가 아끼던 건축 관련 전공서적들은 길거리에 폐지로 던져졌다.
비가 내리던 어느 음습한 밤, 한별은 서울역 구석진 벤치에 앉아 마른침을 삼켰다. 호주머니 속에 남은 것은 단 돈 몇 천 원과, 대학 시절 한옥 건축 기행을 다닐 때 품에 넣고 다니던 찌그러진 스틸 테이프(줄자) 하나뿐이었다.
세상은 자본의 속도와 거짓을 따라 도도하게 흘러가고 있었고, 그 정직함을 지키려 했던 한별의 자리는 어디에도 없었다. 차라리 저 한강 다리 위에서 몸을 던지는 것이 이 지독한 억울함과 수치심을 끝내는 길이 아닐까. 삶의 절벽 끝(懸崖)에 선 한별의 두 눈에서 핏빛 눈물이 흘러내렸다.
바로 그때, 한별의 주머니 속에서 먼지가 켜켜이 쌓인 오래된 2G 폰이 드르륵하며 거친 진동을 울렸다.
번호가 찍히지 않은 국선 전화였다. 한별은 멍한 눈으로 화면을 바라보다, 홀린 듯 버튼을 눌러 귀에 대었다.
"……여보세요."
차디찬 정적을 깨고, 수화기 너머에서 쇳소리가 섞인, 그러나 묵직하고 나지막한 노인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거기…… 서한별이냐."
한별은 멍하니 입을 벌렸다. 십 년 전, 대학 졸업 작품을 준비하며 강원도 산골의 오래된 사찰 중수 현장을 찾아갔을 때 딱 한 번 만났던 사람. 세상을 등지고 오직 나무와 대지만을 마주하며 산다던 대한민국의 마지막 전통 대목장, 도진광(道眞光) 영감이었다.
"뉴스 봤다. 쇳덩이와 시멘트로 거짓을 쌓아 올리던 놈들이 네놈 손목을 꺾어놓았더구나."
"……어르신."
한별의 목소리가 파르르 떨렸다. 세상 모두가 자신을 뇌물 범죄자이자 부실 소장으로 손가락질할 때, 단 한 번 만났던 저 산골의 늙은 목수만이 자신의 진심을 읽어주고 있었다.
"쇳소리와 거짓으로 가득 찬 도심 한복판에서 죽어자빠질 생각이 아니라면, 내려와라."
도진광의 목소리는 칼바람처럼 알싸했으나, 그 밑바닥에는 대지의 흙내음처럼 깊은 무게감이 깔려 있었다.
"강원도 영월, 사자산 밑자락이다. 먹통(墨筒)을 쥘 힘이 남아 있다면 오너라. 나무는…… 적어도 거짓말로 사람을 죽이지는 않는다."
딸깍.
전화는 끊어졌다. 한별은 비가 쏟아지는 허공을 가만히 응시했다. 차가운 빗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지만, 그의 손에 쥐어진 찌그러진 줄자 위로 무언가 뜨거운 열기가 서서히 차오르기 시작했다.
벼랑 끝,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는 낭떠러지 위에서, 한별은 정든 쇳가루와 도시의 거짓을 뒤로한 채, 늙은 대목장의 구원의 손길이 기다리는 깊은 산골의 고요를 향해 느린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준비가 되시면 언제든 말씀해 주세요. 바로 1장 후반부로 이어서 써 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