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겨울의 메마른 잔재를 털어내듯, 산골짜기의 바람 끝에서 차츰 눅눅하고 부드러운 봄의 기운이 묻어나기 시작했다. 툇마루 기둥 아래 맺혀 있던 얼음송곳이 맑은 수액을 떨어뜨리며 대지를 적셨고, 오랜 시간 차갑게 얼어붙어 있던 흙은 부풀어 오르며 생명의 숨결을 가늘게 내뱉었다.
오진성(吳眞聲)은 마당 한구석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삼십 년간 공장의 무거운 무쇠 정반(定盤)만을 마주해 온 그의 두 손에는 황동빛 화구(火口) 대신, 길쭉하고 투박한 나무 조각도(彫刻刀) 하나가 쥐어져 있었다.
그의 앞에는 뒷산에서 주워 온 버려진 낙송(落松) 토막 하나가 누워 있었다. 태풍에 부러지고 겨울 서리에 쓸려 거친 결을 그대로 드러낸 나무토막이었다. 진성은 가만히 그 나무의 결을 굳은살 박인 손가락으로 짚어나갔다. 차가운 강판 표면 위로 먹줄을 튕기듯, 그의 시선은 나무가 품고 있는 보이지 않는 결의 궤적을 묵묵히 읽어내고 있었다.
'슥-, 슥-.'
조각도가 나무의 표면을 긁고 지나갈 때마다, 향긋한 송지(松脂)의 향이 공중에 아련하게 번져나갔다. 수천 도의 아세틸렌 불꽃이 철판을 사정없이 뚫어내던 그 가혹한 파열음과 달리, 나무를 깎아내는 소리는 흡사 어머니의 가뭇한 숨소리처럼 부드럽고 온화했다.
진성은 나무를 베어내어 화려한 형상을 만들려 하지 않았다. 그저 나무가 제 몸속에 숨겨두었던 굴곡과 옹이를 따라, 겉면의 거친 허물만을 깎아내어 바르고 단정한 하나의 선(線)만을 다듬어낼 뿐이었다.
공장에서는 단 일 밀리미터의 오차도 허용되지 않는 철의 팽팽한 긴장 속에 살았으나, 이곳의 나무는 그가 조금 깊게 깎아내어도, 혹은 서툴게 엇나갈지라도 그 상처마저 제 몸의 새로운 결로 온전히 품어 안아주었다. 그것은 가혹한 물질의 저항에서 벗어나, 비로소 인간의 숨결과 자연의 결이 서로를 포용하며 만들어내는 은은한 여백(餘白)의 시간이었다.
"반장님, 손재주가 여전하십니다."
마당가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진성이 조각도를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아래 마을로 장을 보러 갔던 강민우가 두 손 가득 생필품과 따스한 국밥 거리를 들고 들어서고 있었다. 청년은 주말마다 스승의 거처를 찾아와 마당을 쓸고, 늙은 장인의 고독한 적막을 온기 있게 채워주곤 했다.
민우는 진성의 곁에 쪼그려 앉아 스승이 다듬어놓은 소나무 토막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불꽃이 지나간 철판의 잘려 나간 단면이 은빛의 날카로운 서슬을 품고 있었다면, 조각도가 지나간 나무의 단면은 부드럽고 따스한 나이테의 결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철을 자를 때는 내 안의 숨을 묶어 철판을 제압해야 했지만, 나무를 다듬을 때는 나무가 가진 결에 내 숨을 맡겨야 하더구나."
진성이 깎여 나간 나무 부스러기를 손으로 털어내며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평생을 밀리미터의 오차와 싸우며 살아왔으나, 막상 그 가혹한 정반을 내려놓고 보니 삶이란 그리 빽빽하게 채워 넣을 필요가 없는 것이었어. 약간의 어긋남과 여백이 있어야 그 사이로 솔바람도 지나가고, 사람의 따스한 체온도 스며드는 법이지."
민우는 스승의 그윽해진 눈빛을 바라보며 깊이 고개를 끄덕였다. 청년의 손목에 남아 있던 보라색 화상 흉터는 이제 완전한 황갈색의 단단한 피부로 굳어져 있었다. 청년 역시 지난 세월 자신을 괴롭히던 조급함과 무력함의 두려움을 털어내고, 스스로의 삶 위에 바른 여백을 만들어가는 법을 터득해가고 있었다.
두 사내는 마른 장작을 피워 작은 솥에 물을 끓였다. 하얀 수증기가 가을과 겨울의 묵은 때를 벗겨낸 산골의 청명한 공기 속으로 맑은 곡선을 그리며 피어올랐다.
공장의 굉음과 쇳가루는 먼 기억의 저편으로 아스라이 물러섰고, 두 노동자가 나누는 낮고 정직한 담소만이 마당가를 은은하게 채웠다. 삼십 년을 지켜온 장인의 정직한 직선은 이제 철판이라는 완강한 영토를 넘어, 삶의 깊은 여백 속에서 한 그루의 소나무처럼 굳건하고 평온하게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마음을 비워낸 자리에 차오르는 거룩한 평화가, 그렇게 시골집의 마당 위로 차분하게 내리 앉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