쇳물과 소나무 (鐵水與松樹)

소설

by산들강바람

第十七章:歸鄕 (귀향) — 쇳소리가 멈춘 고요의 땅


버스에서 내렸을 때 가장 먼저 오진성(吳眞聲)의 감각을 깨운 것은 깊고 투명한 정적(靜寂)이었다.


삼십여 년간 허파 속 깊숙이 스며들었던 가늘고 비린 쇳가루 냄새 대신, 시리고 알싸한 겨울 계곡의 흙내음과 얼어붙은 이끼의 향이 허파꽈리 구석구석을 깨끗하게 씻어 내렸다. 수백 대의 프레스 기계가 지면을 때리던 육중한 진동과 귀를 찢는 가스 절단기의 파열음은 간데없고, 오직 산줄기를 타고 내려오는 미세한 바람이 골짜기의 앙상한 나뭇가지를 스치는 서걱거림만이 나지막하게 들려올 뿐이었다.


오랜 세월 굉음 속에서 마비되어 있던 그의 고막은, 쇳소리가 완전히 소멸한 이 낯선 고요 앞에서 오히려 아득한 이명(耳鳴)을 느낄 정도로 생경했다.


진성은 정든 쇳가루가 묻은 가죽 가방 하나만을 어깨에 멘 채, 눈이 하얗게 쌓인 오솔길을 천천히 걸어 올라갔다. 발밑에서 사각거리는 눈 밟히는 소리는, 작업대 위에서 화구(火口)가 철판의 표면을 기어가던 그 정직한 마찰음과 닮아 있었다.


마을 어귀에 들어서자, 오래된 기와지붕 너머로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하얀 장작 연기가 겨울 하늘을 향해 부드러운 직선을 그리며 올라가고 있었다. 공장의 매캐한 회색 연기와는 달리, 그것은 나무가 제 몸을 타울러 내어주는 온화하고 숭고한 숨결이었다.


진성이 마침내 도달한 곳은 고향 마을 뒷산 자락, 오랜 세월 홀로 자리를 지켜온 작고 오래된 한옥 집이었다. 툇마루는 오랜 풍우(風雨)로 결이 거칠게 드러나 있었으나, 햇살이 잘 드는 마당 한구석에는 그가 어린 시절 바라보았던 푸른 낙송(落松) 한 그루가 꿋꿋하게 서 있었다.


그는 어깨의 가방을 툇마루에 내려놓고, 천천히 장갑을 벗었다. 그리고 고목의 표면처럼 휘어지고 손바닥 전체가 황갈색 굳은살로 뒤덮인 자신의 오른손을 들어 마당가의 소나무 기둥에 가만히 가져다 대었다.


거칠고 메마른 소나무 껍질의 촉감은, 지난 삼십 년간 그가 매일같이 쓸어내리던 사십 밀리미터 연강(軟鋼) 철판의 녹슨 표면과 놀라울 정도로 닮아 있었다. 차가운 철(鐵)은 수천 도의 초열 불꽃을 받아내어야 겨우 몸을 열어주었으나, 이 나무는 바람과 눈서리를 온몸으로 받아내며 제 몸에 세월의 깊은 옹이를 새겨놓고 있었다. 진성은 굳은살 박인 손끝으로 나무의 거친 결을 가만히 짚어나갔다.


'차갑지 않구나…….'


철판의 냉기는 뼛속을 시리게 파고드는 거친 저항이었으나, 소나무의 거친 결 속에는 척박한 땅속 깊은 곳에서부터 끌어올린 은밀하고 따스한 생명의 맥박이 미세하게 숨 쉬고 있었다. 진성은 나무 기둥에 이마를 살그머니 대었다.


그 순간, 삼십 년간 공장의 초열과 굉음 속에서 결코 내색하지 않았던 거친 노동자의 피로가 밀물처럼 밀려왔다. 화구의 자루를 부러뜨릴 듯 움켜쥐었던 손가락 마디마디의 통증, 쇳가루를 마시며 억눌러왔던 가슴속 깊은 한숨, 그리고 자본의 냉대한 한풍 속에서 존엄을 지키기 위해 온몸을 바짝 세웠던 긴장의 시간들이 소나무의 깊은 향기 속으로 수증기처럼 기화(氣化)하여 날아갔다.


마침내 돌아온 것이었다. 쇳물이 끓어오르던 초열의 지옥을 지나, 불꽃이 소멸한 고요의 땅, 귀향(歸鄕)의 자리에 선 것이었다.


진성은 툇마루에 앉아 신발을 벗었다. 바닥에 내려놓은 가방 문틈 사이로, 그가 품어온 오래된 황동 화구가 겨울 햇살을 받아 아련하게 황금빛을 반짝였다. 이제 그 화구는 다시는 붉은 불꽃을 뿜어내지 않을 것이나, 그 황동 관에 담긴 정직한 직선의 철학은 그의 내면 속에 깊고 푸른 나무처럼 굳건히 자리를 잡고 있었다.


산골짜기의 겨울 해는 짧아서, 서녘 산봉우리 너머로 붉은 노을이 느리게 내려앉기 시작했다. 공장의 양철 지붕 위로 저물던 노을이 지친 노동자의 시름을 씻어주는 빛이었다면, 이 호젓한 산골 마을의 노을은 평생을 바르게 살아온 한 장인의 생을 부드럽게 감싸 안는 신성한 축복의 빛이었다.


진성은 눈을 감았다. 귀를 찢는 기계음은 마침내 완벽하게 소멸하였고, 그의 가슴 깊은 곳에서는 오랫동안 잊고 살았던 푸른 솔바람 소리가 나지막하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삼십 년을 지켜온 그의 정직한 직선이, 마침내 고향의 푸른 그늘 아래서 가장 고요하고 단정한 휴식을 취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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