쇳물과 소나무 (鐵水與松樹)

소설

by산들강바람

第四章:暮色 (모색) — 공장에 저무는 노을빛


철판을 가르는 불꽃의 빛깔이 청백색에서 차츰 붉은 자줏빛으로 탁해질 무렵, 공장의 서쪽 벌어진 함석문 사이로 길고 잔잔한 그림자들이 내려앉기 시작했다. 교대 시간을 알리는 기계적인 신호음은 아직 울리지 않았으나, 하루의 육체를 모두 소진해 버린 현장의 공기는 이미 저물어가는 태양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바닥으로 묵직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오진성(吳眞聲)은 허리를 펴고 고개를 들어 먼 창밖을 바라보았다. 높고 깨진 유리창 너머로 함양(鹹陽)의 하늘이 핏빛처럼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제철소의 용광로에서 뿜어져 나오는 쇳물처럼 뜨겁고 장엄한 저녁노을이었다. 그 노을빛은 공중을 떠돌던 미세한 쇳가루들을 황금빛 먼지로 변화시키며, 거칠고 둔탁한 크레인과 시커먼 기계들의 실루엣을 부드러운 음영 속에 가두고 있었다.


"후우……."


진성은 잠시 화구를 정반 위에 내려놓고, 땀에 젖어 축축해진 분진 마스크를 벗었다. 서늘한 저녁 바람이 공장 안의 매캐한 가스 냄새를 흩뜨리며 그의 이마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 바람 끝에서, 진성은 아주 오래전 지워진 줄 알았던 고향 계곡의 흙내음과 푸른 송지(松脂)의 향기를 미세하게 맡았다. 삼십 년 동안 매일같이 이곳에서 노을을 맞이했으나, 오늘 마주한 저녁의 빛은 유독 그의 마음을 쓸쓸하게 흔들었다. 이제 이 붉은 노을을 마주할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는 서글픈 자각, 즉 생의 모색(暮色)이 그의 가슴팍으로 스며들었기 때문이다.


그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작업대 반대편에서 묵묵히 정반을 닦고 있는 강민우에게로 향했다.


청년의 작업복은 아침의 청결함을 잃고 여기저기 검은 기름때와 불꽃이 튀어 구멍 난 자국으로 얼룩져 있었다. 낮 동안 진성의 호흡을 억지로 흉내 내며 서툰 불꽃을 다루느라 청년의 어깨는 잔뜩 내려앉아 있었고, 손목은 장갑을 낀 채로도 달달 떨리고 있었다. 그러나 청년의 눈빛만큼은 아침의 그 유약한 두려움을 털어낸 듯, 진성이 남겨놓은 바른 직선의 단면을 집요하게 응시하고 있었다.


"민우야."


진성이 청년의 이름을 나지막이 불렀다. 굉음이 줄어든 공장 안에서 그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부드럽게 울렸다.


"예, 반장님."


민우가 걸레를 멈추고 서둘러 허리를 폈다.


진성은 담배를 한 대 피워 물려다 이내 주머니로 다시 집어넣고는, 노을빛이 가득 들어차 있는 서쪽 문을 가리켰다.


"저 빛이 보이느냐."


민우는 진성의 시선을 따라 타오르는 서녘 하늘을 바라보았다. 하루 종일 어두운 고글 속에서 푸른 불꽃만 바라보았던 청년의 눈에, 대지를 물들이는 자연의 거대한 붉은빛은 생경하면서도 압도적인 감동으로 다가왔다.


"참…… 붉습니다. 꼭 낮에 보았던 쇳물 같습니다."


민우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진성은 고개를 가만히 저었다.


"쇳물은 인간이 탐욕으로 억지로 끓여낸 불이지만, 저 노을은 온종일 대지를 데우던 태양이 제 스스로를 갈무리하며 남기는 가장 정직한 빛이라네. 공장의 불꽃은 눈을 멀게 하지만, 저 노을빛은 지친 노동자의 거친 눈을 부드럽게 씻어주지."


진성은 자신의 휘어지고 굳어버린 손을 들어 노을빛 속에 비추어보았다. 붉은 태양 빛이 그의 깊은 손금과 두꺼운 굳은살의 경계를 따라 황금빛 선을 그리며 머물렀다.


"내 나이 삼십 대에 이 현장에 처음 들어왔을 때는 저 노을이 그저 야간작업을 알리는 가혹한 신호로만 보였어. 빨리 어둠이 내리고 이 고단한 하루가 끝나기만을 바랐지. 하지만 육체의 힘이 다하고 화구를 놓을 때가 가까워지니, 이제야 알겠더군. 저물어가는 빛이 이토록 아름다운 이유는, 지나온 낮의 시간 동안 온몸을 불살라 정직하게 일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말이야."


진성의 시선이 민우의 때 묻은 작업복과 떨리는 손목에 닿았다. 그것은 단순한 노인의 넋두리가 아니라, 이제 막 거친 삶의 한복판으로 걸어 들어온 젊은 영혼에게 건네는 장인의 가장 깊은 고백이었다.


"자네의 오늘 하루는 어땠나. 비록 철판은 비틀리고 서툴게 잘려 나갔을지라도, 자네의 땀방울은 거짓이 없었네. 물질은 정직해서, 자네가 흘린 그 땀의 무게를 다 기억하고 있을 걸세."


민우는 자신의 기름때 묻은 장갑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쓰리고 아픈 손목의 통증 위로, 진성이 건넨 묵직한 위로가 따스하게 얹혔다. 청년은 비로소 이 공장이 단순한 돈벌이의 감옥이 아니라, 한 인간이 한평생의 존엄을 지켜내기 위해 온몸으로 불꽃을 받아내던 거룩한 제단(祭壇)이었음을 희미하게나마 깨닫기 시작했다.


'위우우우웅――'


마침내 하루의 종막을 고하는 거대한 은퇴의 사이렌이 공장 전체를 울렸다. 기계들의 마지막 잔진동이 바닥을 타고 사라지자, 공장 안에는 노을의 붉은 그림자가 더욱 깊게 드리워졌다.


진성은 다시 화구를 들어 단정하게 공구함에 넣었다. 황동빛 토치 위로 저무는 태양의 마지막 잔광이 가늘게 머물다 사라졌다. 진성과 민우, 두 세대의 노동자는 붉은 모색(暮色) 이 가득한 공장의 함석문 주위로 나란히 걸어 나갔다. 그들의 등 뒤로, 평생을 곧게 뻗어온 진성의 직선들이 노을빛 속에서 고요하게 숨을 죽이고 있었다. 어둠이 밀려오고 있었으나, 그들이 걸어 나가는 길은 저무는 태양처럼 깊고 단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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