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어 터진 라면과 마음의 온도

수필

by산들강바람

시곗바늘이 밤 아홉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하루 종일 바쁘게 움직이느라 제대로 된 식사를 하지 못했던 나는, 이제야 비로소 배고픔을 자각했다. 아니, 정확히는 배고픔을 느낄 여유가 생긴 것이었다. 그동안은 너무 바빠서, 너무 정신없어서, 내 몸이 보내는 신호를 무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배가 고팠다. 단순하고 원초적인 욕구였다. 그저 허기를 달래고 싶었다. 복잡한 요리를 할 기력도, 시간도 없었다. 그냥 빠르고 간단하게, 뱃속을 채울 수 있는 무언가가 필요했다.

냉장고를 열었다. 형광등 불빛이 차갑게 내부를 비추었지만, 그 안은 거의 텅 비어 있었다. 몇 개의 반찬통이 있었지만 대부분 바닥이 보일 정도로 비어 있었고, 우유 한 팩과 계란 몇 개가 전부였다. 장을 봐야 한다는 생각이 스쳤지만, 지금 당장은 그럴 기력도 없었다.

냉장고 문을 닫고 찬장을 뒤졌다. 그제야 발견한 것이 라면 한 봉지였다. 빨간 포장지에 싸인, 익숙하고도 위로가 되는 존재. 어릴 적부터 수없이 먹어온 그 맛. 배고플 때, 밤늦게 출출할 때, 때로는 마음이 허전할 때도 곁에 있어준 그 라면이었다.


물을 끓이기 시작했다. 가스레인지 위의 냄비에서 작은 기포들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나는 라면 봉지를 뜯으며, 오늘 하루를 되돌아보기 시작했다. 아침에 서둘러 집을 나선 순간부터, 지금 이 순간까지의 모든 일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갔다.

회사에서의 미팅,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 미뤄둔 일들. 그리고 오늘도 제대로 하지 못한 것들에 대한 아쉬움. 전화를 걸어야 할 사람, 답장을 보내야 할 메시지들. 마음 한구석에 쌓여가는 할 일들이 무거웠다.

물이 끓기 시작했다. 보글보글 소리가 나더니 김이 올라왔다. 나는 스프를 넣고 젓가락으로 저었다. 빨간 국물이 우러나오면서 그 익숙한 냄새가 코끝을 간질였다. 어릴 적 엄마가 끓여주던 라면 냄새와 같았다. 감기에 걸렸을 때, 밤늦게 공부하다 출출할 때, 엄마는 언제나 따뜻한 라면 한 그릇을 끓여주곤 했다.

면을 넣었다. 딱딱한 사각형 덩어리가 뜨거운 물속으로 들어가면서 천천히 풀어지기 시작했다. 보통이라면 이 순간부터 시간을 재기 시작해야 했다. 3분, 길어야 4분이면 완성되는 간단한 요리. 하지만 그날은 달랐다.


그 몇 분이 나에겐 너무 길었다. 생각이 많았다. 생각이 너무 많아서, 라면이 끓고 있다는 사실조차 잊을 정도였다.

최근에 만난 친구가 떠올랐다. 오랜만에 본 그 친구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새로운 일을 시작했고, 새로운 사람을 만났고, 새로운 꿈을 키우고 있었다. 반면 나는 그대로인 것 같았다. 몇 년 전과 똑같은 자리에서, 똑같은 고민을 하며, 똑같은 일상을 반복하고 있는 것 같았다.

변화에 대한 두려움이 스쳤다. 새로운 것을 시도하고 싶은 마음과 안정적인 현재를 놓치고 싶지 않은 마음이 충돌했다. 그 사이에서 나는 늘 망설이고, 고민하고, 결국 아무것도 선택하지 못하고 있었다.

부모님 생각도 났다. 점점 나이가 들어가시는 부모님을 보면서, 더 자주 안부를 물어야 한다는 생각을 늘 하면서도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있었다. 바쁘다는 핑계로, 나중에 하겠다는 약속으로 미루고만 있었다.

연인과의 관계도 떠올랐다. 요즘 들어 서로 바빠서 만나는 시간이 줄어들고 있었다. 말수도 적어지고, 함께 있어도 각자 스마트폰만 보는 시간이 늘었다. 사랑한다고 말한 지도 오래됐다. 언제부터인가 그런 표현들이 어색해졌다.

그런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과거에 내린 선택들에 대한 후회, 현재에 대한 불안, 미래에 대한 걱정. 모든 것이 뒤섞여서 마음속을 어지럽게 만들었다.


그때 냄비에서 이상한 냄새가 났다. 깜짝 놀라 돌아보니, 라면이 퉁퉁 불어 있었다. 면발은 탱탱함을 완전히 잃고 흐물흐물해져 있었다. 국물은 처음의 맑은 빨간색이 아니라 탁하고 진한 색으로 변해 있었다. 냄새는 여전히 라면 냄새였지만, 어딘가 태운 듯한 냄새가 섞여 있었고, 그것이 묘하게 슬펐다.

가스를 끄고 나는 그 불어 터진 라면을 앞에 두고 한참을 앉아 있었다. 먹어야 했다. 배가 고팠으니까. 다른 먹을 것도 없었으니까. 하지만 그 라면을 보고 있자니, 마음 한구석이 무너져내리는 것 같았다.

젓가락으로 면을 들어 올려보니 툭툭 끊어졌다. 쫄깃한 식감은 온데간데없고, 푸석푸석하고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변해 있었다. 국물 한 모금을 떠서 맛을 보니, 짜고 자극적이기만 했다. 라면 고유의 그 깔끔한 맛은 사라지고, 오랫동안 끓여서 우러난 탁한 맛만 남아 있었다.

그런데 그 라면을 먹는 순간, 눈물이 났다.


왜 울었을까. 라면 때문만은 아니었다. 물론 배고픈 상황에서 제대로 된 음식을 먹지 못한다는 실망감도 있었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큰 감정이 내 마음을 휩쓸고 있었다.

그 몇 분 동안 떠오른 생각들, 놓쳐버린 시간들, 말하지 못한 감정들, 그리고 나 자신에 대한 실망. 그 모든 것이 라면에 녹아 있었다. 불어 터진 라면은 내 마음 같았다. 제때 끓이지 못한 라면처럼, 나는 제때 살아내지 못한 것 같았다.

적절한 타이밍을 놓쳐버린 것들이 너무 많았다. 사랑을 고백하지 못한 순간, 기회를 잡지 못한 순간, 용기를 내지 못한 순간. 부모님께 안부를 묻지 못한 날들, 친구들과 연락하지 못한 시간들, 나 자신을 돌보지 못한 순간들.

그런 순간들이 쌓이면서, 마음은 점점 불어 터져 갔다. 처음에는 괜찮다고 생각했다. 아직 늦지 않았다고, 언젠가는 할 수 있다고. 하지만 어느 순간, 그 마음은 라면처럼 흐물흐물해지고, 더 이상 원래의 모습으로 되돌릴 수 없게 되었다.


나는 그 라면을 끝까지 먹었다. 맛은 없었다. 위로도 되지 않았다. 오히려 더 슬펐다. 하지만 먹었다. 그것이 그날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한 숟가락 한 숟가락 떠서 입에 넣을 때마다, 내 인생의 여러 순간들이 떠올랐다. 완벽하지 못했던 선택들, 아쉬웠던 결과들, 후회되는 말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나를 지금의 나로 만들어준 경험들이었다.

불어 터진 라면을 먹으며 흘린 눈물은, 나를 조금 더 솔직하게 만들었다. 나는 완벽하지 않다. 때를 놓치기도 하고, 실수도 한다. 집중력이 부족할 때도 있고, 우선순위를 잘못 정할 때도 있다. 하지만 그런 나도 살아간다. 라면을 먹고, 눈물을 흘리고, 다시 일어선다.

그날 밤, 나는 오랫동안 생각에 잠겼다. 내가 놓쳐버린 것들에 대해서가 아니라, 앞으로 놓치지 않을 수 있는 것들에 대해서.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것을, 때로는 실수해도 괜찮다는 것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날 이후, 라면을 끓일 때면 시간을 더 잘 지킨다. 핸드폰 타이머를 맞춰두고, 3분이 되면 바로 불을 끄고 맛을 본다. 면이 익는 시간을 지키는 것은, 내 삶의 리듬을 지키는 일처럼 느껴진다.

작은 것부터 시작했다. 아침에 일어나는 시간을 정하고 지키기, 부모님께 일주일에 한 번은 안부 전화드리기, 친구들과의 약속을 소홀히 하지 않기. 큰 변화는 아니었지만, 내 일상에 작은 규칙들을 만들어나갔다.

라면 하나에도 마음을 담는다. 물을 끓일 때는 그 시간에만 집중한다. 스프를 넣을 때는 골고루 잘 섞이도록 저어준다. 면을 넣을 때는 시간을 재고, 적절한 때에 맛을 본다. 그 몇 분의 시간이 나에게는 명상 같은 시간이 되었다.

그리고 가끔은, 일부러 조금 더 오래 끓이기도 한다. 불어 터진 라면을 먹으며 그날의 나를 떠올리기 위해서. 그날의 눈물, 그날의 생각, 그날의 깨달음을 잊지 않기 위해서.


불어 터진 라면은 실패가 아니다. 그건 내 마음의 기록이다. 내가 얼마나 생각이 많았는지, 얼마나 지쳐 있었는지, 얼마나 진지하게 살아내고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증거다.

우리는 모두 때때로 라면을 불려먹는다. 완벽한 타이밍을 놓치고, 최선의 결과를 얻지 못하고, 아쉬운 선택을 한다. 하지만 그것도 삶의 일부다. 완벽한 라면만 먹고살 수는 없다. 때로는 불어 터진 라면도 먹어야 한다.

중요한 것은 그 불어 터진 라면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다. 실패라고 여기고 자신을 탓할 수도 있고, 하나의 경험으로 받아들이고 배움의 기회로 만들 수도 있다. 나는 후자를 선택했다.

그날 밤, 불어 터진 라면을 먹으며 눈물을 흘린 나는, 그 순간에도 살아 있었다. 생각하고, 느끼고, 반성하고, 깨달으며 살아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지금도 가끔 라면을 불려먹는다. 바쁠 때, 생각이 많을 때, 마음이 복잡할 때. 하지만 이제는 그것에 대해 자바카라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순간의 나를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왜 집중하지 못했는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었는지.

불어 터진 라면은 나의 일부가 되었다. 완벽하지 않은 나, 때로는 실수하는 나,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는 나의 상징이 되었다. 그리고 그런 나를 사랑하기로 했다.

삶은 완벽한 라면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때로는 불어 터진 라면도, 짠 라면도, 밍밍한 라면도 있다. 하지만 그 모든 라면들이 모여서 우리의 삶을 이룬다. 그리고 그 모든 맛을 경험하며, 우리는 조금씩 성장해 간다.

오늘도 나는 라면을 끓인다. 시간을 재고, 맛을 보고, 정성스럽게 끓인다. 하지만 가끔 불려먹어도 괜찮다는 것을 안다. 그것도 나의 이야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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