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바람이 먼저 온다.
바다보다 먼저, 파도보다 먼저, 바람이 대지를 가로질러 온다. 소리도 없이 시작되었다가 어느 순간 귓전을 울리고, 나뭇가지를 꺾고, 마른 풀잎을 공중으로 날려버린다. 바람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지나간 자리는 분명하다. 흩어진 것들이 바람의 지도를 그린다. 나뭇잎이 어느 방향으로 날렸는지, 모래가 어느 쪽으로 쌓였는지, 사람들이 어느 쪽으로 옷깃을 여몄는지. 바람은 제 몸을 숨기고 흔적만 남긴다.
대지가 흔들린다.
들판의 풀들이 일제히 한 방향으로 눕는다. 억세 보이던 것들도 바람 앞에서는 몸을 낮춘다. 꺾이지 않으려면 구부러져야 한다는 것을 풀들은 오래전부터 알고 있다. 길가의 먼지가 소용돌이치며 하늘로 오른다. 지상에 고요히 가라앉아 있던 것들이 바람의 손에 이끌려 공중으로 흩어진다. 흩어지는 것들을 보며 나는 생각한다. 저것들은 지금 길을 잃은 것인가, 아니면 비로소 길을 얻은 것인가.
바람이 대지를 흩고 지나면, 바다가 답한다.
파도가 거세진다. 먼바다에서부터 바람이 밀어붙인 힘이 물 위를 달려와 파도가 된다. 파도는 바람의 말을 받아 적어 해안으로 전한다. 육지가 받은 것을 바다가 증폭시킨다. 바람 한 번에 파도 하나, 그 단순한 인과가 이토록 장대한 풍경을 만들어낸다.
오늘의 파도는 어제의 파도가 아니다.
평소의 파도는 해변을 어루만지듯 왔다가 조용히 물러났다. 모래 위에 하얀 레이스를 잠깐 펼쳐놓고 사라지는, 그런 파도였다. 그러나 오늘은 다르다. 오늘의 파도는 달려온다. 먼 곳에서부터 몸을 일으켜 점점 높아지며 달려온다. 그리고 바위를 친다.
쾅.
소리가 가슴속까지 들어온다. 파도가 바위에 부딪치는 소리는 단순한 충돌음이 아니다. 그것은 바람이 대지를 건너오면서 모은 힘의 총량이 한꺼번에 터지는 소리다. 바위는 꿈쩍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파도는 산산이 부서져 하얀 물보라가 된다. 누가 이긴 것인가. 바위는 남아있고 파도는 사라졌으니 바위가 이긴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파도는 돌아갔을 뿐이다. 잠시 후 또 온다. 그리고 또 친다. 억겁의 세월 동안 그렇게 쳐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칠 것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바위를 뚫는 것은 파도다. 한 번의 충돌이 아니라 돌아오는 것, 다시 오는 것, 멈추지 않는 것이 바위를 뚫는다.
해변이 날린다.
모래가 공중으로 오른다. 억겁의 시간 동안 파도에 갈리고 바람에 쪼개져 이 해변을 이루었던 모래알들이, 오늘은 바람에 실려 어디론가 떠난다. 어느 모래알은 바다로 돌아가고, 어느 것은 더 깊숙한 내륙으로 날려가고, 어느 것은 이웃한 다른 해변에 가 닿는다. 해변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해변을 이루는 것들은 끊임없이 바뀐다. 오늘의 해변과 내일의 해변은 같은 이름이지만 다른 모래로 이루어진다. 그럼에도 우리는 같은 해변이라 부른다.
사람도 그런 것인지 모른다.
십 년 전의 나와 지금의 나는 같은 이름을 가졌다. 그러나 그 사이 얼마나 많은 것이 바람에 날려갔는가. 믿었던 것들, 붙들었던 것들, 결코 잃지 않으리라 여겼던 것들이 바람 한 번에 흩어지고, 나는 그 자리에 서서 날아가는 것들을 바라보았다. 처음엔 그것이 상실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오늘 이 해변에서 날리는 모래를 보며 생각이 달라진다. 날아간 것들이 나를 가볍게 했는지도 모른다. 쌓인 것들이 때로 무거움이 되고, 바람이 그 무거움을 조금 덜어간 것인지도.
바람이 다시 몰아친다. 눈을 뜨고 있기 어렵다. 그러나 감을 수가 없다. 이 풍경을 놓치고 싶지 않아서. 거칠고 험하지만, 살아있는 것만이 이토록 거칠 수 있다는 것을 알기에.
파도가 또 바위를 친다. 쾅. 하얗게 부서진다. 모래가 바람에 날린다. 대지는 흔들리고, 바다는 포효하고, 그 사이에 나는 서 있다.
작고 보잘것없이, 그러나 두 발로.
바람이 나를 흩으려 해도 나는 여기 서 있다. 파도가 나를 삼키려 해도 나는 이 자리에 있다. 흩어지지 않으려는 것이 아니다. 흩어지더라도 다시 모이는 것, 날려가더라도 어딘가에 닿는 것, 그것이 이 해변의 모래가 내게 가르쳐준 것이다.
바람은 멈추지 않는다.
파도도 멈추지 않는다.
그러니 나도, 멈추지 않는다.